한국에겐 20여 년 전 일본이 참고서… '성공한 정책' '실패한 정책'샅샅이 따져보라

입력 2016.11.26 03:05

일본 '1995년의 악몽'
생산가능 인구 줄어들며 소비도 급격히 감소…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 경제가 내우외환을 겪고 있다. 국내는 최순실 사태로 경제 수장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인데, 미국에서는 보호주의 정책을 강하게 주창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경제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보자. 두 사건 모두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지만 일반 국민의 삶까지 뒤바꿀 일은 아니다. 국민의 생계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요인은 한국 경제의 저성장이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2%대에 머무르는 저성장은 대다수 국민이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무서운 사실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저성장의 고통은 이제 본격적으로 몰려올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저성장의 고통을 경험한 일본의 예를 살펴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

일본은 1980년대 후반부터 경기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수출이 타격을 입었고, 내수 시장은 1990년대 초 부동산과 주식 버블 붕괴로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본격적으로 장기 저성장에 돌입한 시기는 인구 절벽이 시작된 1995년부터다. 인구 절벽이란 15세부터 64세까지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늘어나던 일본의 생산 가능 인구는 1995년을 기점으로 줄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 경제는 본격적인 장기 저성장 시대를 맞았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든다는 말은 해당 국가의 생산 활동이 위축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들이 핵심 소비 가능 인구라는 점에 있다. 생산뿐만 아니라 내수 소비도 함께 위축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생산 가능 인구가 줄기 시작한 시점부터 내수 소비의 큰 축을 이루는 백화점과 할인점은 물론, 젊은 층이 주로 이용하는 동네 술집과 노래방, 옷 가게, 식당, 미용실, 세탁소 등의 매출이 시차를 두고 줄기 시작했다. 전국에 산재한 가게들을 정부가 나서서 일일이 돕기도 어려웠다. 결국 이런 동네 가게의 쇠퇴와 도산으로 일본 경제는 만성병 환자처럼 서서히 병들어 갔다.

생산 가능 인구 감소로 시작된 소비 절벽은 일본 경제를 악순환에 빠뜨렸다. 가계의 소비 감소로 매출에 타격을 입은 기업은 투자를 줄이는 동시에 인력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까지 단행했다. 그러자 일본 가계는 소비를 더욱 줄였다. 가계에서 시작된 불황이 기업 불황을 유발하고, 기업의 불황이 다시 가계 불황을 유발하는 '복합 불황'에 빠진 것이다.

경제의 구조적 악순환은 사회·정치 불안으로 이어졌다. 노후 준비가 안 된 노인이 거리의 노숙자가 됐고, 조기 퇴직 후 자영업에 나선 샐러리맨들이 파산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는 취업 빙하기를 겪고, 어렵게 취업을 하더라도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전 국민이 중산층이라고 했던 일본 사회는 양극화됐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됐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살기 어려워졌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국민의 환심을 사려는 포퓰리즘에 빠졌다. 한때 세계 최고의 재정 건전 국가였던 일본의 국가 재정은 20년 만에 선진국 가운데 최악 수준으로 전락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아베노믹스를 통해 어려움에 빠진 일본 경제의 도약을 꾀하고 있지만, 생산 가능 인구는 물론 총인구까지 줄어드는 상황에 일본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버블 붕괴로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악화했고, 올해는 인구 절벽을 맞았다. 한국의 생산 가능 인구는 내년부터 줄기 시작한다. 만약 한국 정부가 특단의 조처를 하지 않으면 일본과 같은 소비 절벽을 맞는 것도 시간문제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일본보다 더 나쁘다. 경제 규모도 1990년대 일본보다 못하고 국민소득이 일본보다 적다. 국가 재정 상황도, 기업 경쟁력도 일본보다 못하다. 그런데 고령화 속도는 인구 절벽을 겪던 당시의 일본보다 더 빠르다. 노인층의 빈곤율은 50% 가까운 수준이며, 사회 양극화도 일본보다 심하다. 게다가 장기 저성장의 직격탄을 맞게 될 가게가 골목 곳곳에 있다. 자영업 종사자가 600만명 이상이며, 이들이 전체 사업체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6%에 달한다. 앞으로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자영업자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최순실 사태도, 트럼프 정권의 등장도 곧 지나갈 문제지만, 장기 저성장의 고통은 오래도록 한국 경제를 짓누를 것이다. 위기는 모르고 당할 때 위기다. 알고 대비하면 피할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은 20여 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일본을 바로 곁에 두고 있다. 일본이 성공한 정책은 철저하게 따라 하고, 실패한 정책은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장기 저성장은 강 건너 불이 아닌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하루라도 빠른 인식 전환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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