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가스 조작 뒤엔 어둠의 역사… 경영진 끊임없이 분쟁

입력 2015.10.03 03:04 | 수정 2015.10.03 18:19

78년 폴크스바겐 복잡한 지배 구조

올해로 설립 78주년인 폴크스바겐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성장한 회사다. 전쟁을 겪고 지분 상속 과정에서 분쟁이 일어나면서 지배 구조가 복잡해졌는데, 이번 배기가스 조작 사건 역시 복잡한 지배구조가 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①체코인 창립자

폴크스바겐 그룹의 창업자는 페르디난트 포르셰다. 그는 1875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보헤미아 지역 북부 마터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체코 영토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무너질 때,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선택했고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살면서도 체코 국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서 일하며 독일 시민권을 선택했다.

포르셰는 독일 다임러에서 수석 설계자로 일했다. 1926년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되는 과정에서 회사를 나왔다.

②첫 회사 '포르셰'

실업자가 된 포르셰는 193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명예 공학 박사 F 포르셰 유한회사, 자동차 및 엔진 개발 연구소'라는 긴 이름의 첫 회사를 세웠다. 이것이 포르셰의 전신이며, 폴크스바겐 그룹의 시작이다. 그는 경주용 고성능 엔진 개발 등에 성공하며 엔지니어로서 두각을 드러낸다. 구(舊)소련의 스탈린이 수석 자동차 제작자로 스카우트 제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회사는 경영난에 처했다.

독일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1938년 5월 26일 니더작센주에 새로 들어선 폴크스바겐 자동차 공장 개장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히틀러는 폴크스바겐에 ‘국민차’ 비틀(Beetle)을 만들라고 지시한 장본인이다.
독일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1938년 5월 26일 니더작센주에 새로 들어선 폴크스바겐 자동차 공장 개장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히틀러는 폴크스바겐에 ‘국민차’ 비틀(Beetle)을 만들라고 지시한 장본인이다. / AP 뉴시스

③후원자 히틀러

포르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경제적 지원을 한 것이 나치당 당수 시절 히틀러다. 이후 히틀러는 1933년 포르셰에게 독일인이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소형차를 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른바 '폴크스바겐' 프로젝트다. 폴크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volks)과 차(wagen)의 합성어이다. 1938년 포르셰는 히틀러의 지시로 '국민차' 제작에 성공했고, 그 차가 '비틀'이다.

비틀을 생산하기 위해 히틀러는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다. 대량생산을 위해 포르셰는 미국 포드 공장을 수차례 방문했는데, 당시 포르셰는 대량생산 시스템만큼이나, 사장인 헨리 포드가 직접 커피를 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④두 나라 두 회사

포르셰에게는 딸 루이제와 아들 페리, 1남 1녀가 있었다. 루이제가 페리보다 네 살 많은 누나다. 평소 아들 중심의 경영 시스템에 불만이 많았던 루이제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자기 지분을 챙겨 오스트리아에 따로 회사를 차렸다. 이후 포르셰는 '독일 포르셰(생산 및 기술 개발)' '오스트리아 포르셰(독점 수입 판매)' 시스템으로 이원화돼 운영된다. 창업자인 포르셰는 '루이제와 페리에게 재산을 동등하게 나눠준다'는 유언 외에 차기 후계자 지명 없이 사망했다.

⑤20% 지분 니더작센주(州)

폴크스바겐은 2차대전 후 처음엔 프랑스로 그다음엔 영국으로 경영권이 넘어간다. 그 과정에서 포르셰와 아들 페리, 사위 안톤 피에히는 전범(戰犯)으로 프랑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후 폴크스바겐 공장은 정부 간 협상에 따라 독일 정부로 넘어오게 되고, 독일 의회는 1960년 특별법에 따라 폴크스바겐을 주식회사로 전환한다. 그 과정에서 20% 정도는 공장이 있는 니더작센 주정부가 보유하고, 나머지는 일반인에게 공모하는데, 이 지분을 포르셰와 피에히 가문이 매입하는 방식으로 다시 대주주 자리를 찾았다.

⑥경영권의 난

되찾은 대주주 자리로, 2세인 루이제와 페리, 3세인 그들의 자녀 총 8명은 각각 지분을 나눠 갖고 포르셰(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폴크스바겐을 공동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3세들이 성인이 되면서 후계자 선정을 놓고 분쟁이 일게 되고, 이를 지켜보던 페리 포르셰는 1970년 오너가(家) 전원 경영진 사퇴를 선언한다. 오너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강력한 후계자였던 루이제의 장남과 페리의 삼남은 회사를 떠났다.

⑦친손자 vs. 외손자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셰는 친손자인 볼프강 포르셰가, 폴크스바겐은 외손자인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맡는 형식으로 분리된다. 하지만 이 둘이 다시 합쳐진 것은 2005년 포르셰가 폴크스바겐 인수를 시도하면서부터다. 당시 카이엔의 성공으로 30억유로에 달하는 현금이 생긴 포르셰는 폴크스바겐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은 뒤 주식 매입에 들어간다. 그러나 2008년 9월 세계 금융 위기가 발생하고, 포르셰는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미국 판매가 급감하면서 현금 유동성이 급격히 악화, 오히려 2009년 7월 폴크스바겐 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됐다.

⑧피에히 확장 전략

페르디난트 피에히 전 회장은 폴크스바겐 외형을 키우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포르셰에서 일하다 오너가 전원 사퇴로 회사를 떠난 후 1972년 아우디 기술 담당으로 재입사해 아우디를 럭셔리 브랜드로 키워낸 인물이다. 1988년 아우디 회장에 선출됐고, 1993~2002년 폴크스바겐 그룹의 회장을 지냈으며, 올해 4월까지 폴크스바겐 그룹의 감독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냉철한 성격으로 '지옥의 사자' '신들의 아버지' 등의 별명을 얻었다. 피에히는 외할아버지와 페라리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가 친했고, 본인도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이너 주지아로와 친해 이탈리아 브랜드 인수에 공을 들였다. 폴크스바겐과 아우디, 포르셰, 스코다, 벤틀리, 부가티, 세아트, 람보르기니, 스카니아, 만 등 10개가 넘는 브랜드를 아우르는 성장을 이뤘다.

⑨빈터코른 쿠데타

마르틴 빈터코른 전 폴크스바겐 회장은 원래 피에히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경영 스타일을 두고 갈등을 빚게 되고, 이 과정에서 피에히가 빈터코른을 내보내기 위해 이사진에게 '빈터코른이 나를 죽이려 한다' '그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내가 보유한 주식을 적들에게 팔아버리겠다' 등의 강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사회는 그의 경영 능력과 판단력에 의심을 품게 되고, 빈터코른의 손을 들어주며 피에히를 내보냈다. 포르셰의 친손자 볼프강 포르셰가 빈터코른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⑩피에히의 저주

이번 배기가스 조작 사건으로 빈터코른은 5개월 만에 회장직을 내려놓게 됐다. 피에히 쪽 사람으로 분류되는 마티아스 뮐러 포르셰 스포츠카 사업 부문 대표가 신임 회장직에 앉게 됐다. 이번 사건을 독일 내에서는 '피에히의 저주'라고 부른다. 폴크스바겐 그룹 수뇌부는 "브랜드별 개별 경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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