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점 '독일 경제 모델' 오염되다

입력 2015.10.03 03:04

[Cover Story] 폴크스바겐 사태로 드러난 獨 약점… 현지 긴급 진단

'거짓말은 그만!(No more lies!)'

지난 9월 25일(현지 시각)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 볼프스부르크. 이곳에 있는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 폴크스바겐(Volkswagen)의 공장 정문 앞에는 환경보호 단체 그린피스의 한 회원이 배기가스 조작에 항의하는 포스터를 들고 서 있었다.

폴크스바겐(Volkswagen)의 공장 정문 앞에는 환경보호 단체 그린피스의 한 회원이 배기가스 조작에 항의하는 포스터를 들고 서 있었다.
AP 뉴시스

문을 오가던 직원들은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현장에 와 있던 기자들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부끄럽다." 한 직원이 나지막이 한숨 쉬듯 내뱉었다.

다음날인 26일 오후 폴크스바겐 아레나(경기장)를 'VW'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메웠다. 이날은 볼프스부르크와 하노버의 분데스리가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분노의 목소리는 이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한 20대 직원은 "폴크스바겐에 다닌다는 사실은 내게 '자부심'이었는데, 이제는 '수치심'이 됐다"고 말했다. 한 40대 남자 직원은 "회사가 파산해 실직할까 봐 겁난다"며 "제2의 디트로이트(미국 자동차 도시)가 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볼프스부르크는 인구 12만명의 작은 도시다. 시골이었던 곳이 1938년 히틀러가 폴크스바겐 본사와 공장을 건설한 것을 계기로 자동차 도시로 발전했다. 독일 내에서 1인당 소득이 가장 높은 곳 중 하나다.

폴크스바겐이란 '국민(volks)+차(wagen)'라는 뜻이다.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독일 전체 GDP의 2.7%를 책임진다.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폴크스바겐 본사에 있는 ‘자동차 타워’ 내부에 차량들이 들어 있다.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폴크스바겐 본사에 있는 ‘자동차 타워’ 내부에 차량들이 들어 있다. / 블룸버그

폴크스바겐이 사기 논란에 휩싸이자 독일 국민은 분노를 넘어 박탈감을 느끼는 상태다. 도심 전봇대에는 'VW=Vertrauen Weg!(사라진 신뢰!)'라는 검은색 스티커가 붙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최신호 표지를 노란색 폴크스바겐 '비틀' 자동차에 조화(弔花)를 얹고 장례식을 치르는 사진으로 장식했다. 표지 제목은 'Der Selbstmord'. 자살을 선택한 폴크스바겐이라는 의미다.

폴크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스캔들은 어떻게 보면 수많은 기업 비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동안 '무결점'으로만 보였던, 그래서 한국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까지 칭송됐던 독일 경제의 치부와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론 많은 전문가는 독일 경제가 이뤄온 성취에 비해 스캔들은 일부일 뿐이며 침소봉대(針小棒大)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건이 시사하는 것들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고 역시 덧붙인다.

게르만식 경제 모델의 한계인가

폴크스바겐 스캔들을 두고 제조업과 수출 중심 게르만식 경제 모델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제조업과 수출의 성장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하는데, 사실상 독일은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20년간 임금 동결로 이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홀거 셰퍼 쾰른경제연구소(IW) 수석연구원은 "오랜 임금 동결에 노동자들이 불만을 나타내 기업들이 2년 전부터 임금 인상을 시작했다"며 "일본 엔화와 미국 달러화의 가치 하락으로 가격 경쟁력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독일 기업에 부담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볼프강 매닝 함부르크대 경제학과 교수는 "폴크스바겐의 경쟁 기업은 미국의 GM과 일본의 도요타"라고 동의했다. 그는 "이들이 세계 시장에서 환율 효과를 톡톡히 보는 상황에서 폴크스바겐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부품비 절감 등으로 생산비를 줄이는 방법이었을 것"이라며 "생산비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는 2007년 미국 월스트리트발(發) 세계 금융위기로 금융을 위주로 하는 앵글로색슨식 경제 모델이 사실상 무너졌고 이후 각국이 모두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게르만식 경제 모델로 변해가는 도중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미국 시장에서 폴크스바겐의 인기가 높아지자 미국 정부가 과거 도요타 리콜 사태처럼 폴크스바겐 손보기에 나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배기가스 스캔들
그래픽=박상훈 기자

이원화된 독일식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

폴크스바겐 스캔들 과정에서 나온 지배구조의 잡음을 독특한 독일 기업 경영 구조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독일 기업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경영진으로 구성되는 경영이사회(management board)와 대주주로 구성되는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로 나뉘는 이원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서로 견제를 통해 투명 경영을 하기 위해서다. 사실상 경영이사회가 경영을 하고, 감독이사회가 이를 견제하는 방식이다. BMW는 이원화 체제가 잘 굴러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폴크스바겐은 감독이사회의 경영에 대한 간섭이 너무 컸고, 그 과정에서 기업 사유화 논란이 나왔으며, 감독이사회와 경영이사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사회 내부에서는 서로 편을 갈라 줄서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폴크스바겐에서는 올해 그룹 수뇌부가 내부 경영 분쟁으로 연이어 사임했는데, 4월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물러난 자리는 감독이사회 의장이고, 최근 마르틴 빈터코른이 물러난 자리는 경영이사회 의장이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26일 "스캔들이 발생하기 전에 빈터코른과 피에히는 모터쇼 같은 공개 석상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며 싸웠다"면서 "폴크스바겐의 복잡한 지배구조 때문에 다툼이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독일 경제가 지금 잘나간다고 만족하며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돼'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아주 큰 실수입니다."

작년 말 마르셀 프라처 독일경제연구소(DIW) 소장은 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경제장관이 초청한 정부 관료 대상 강연 자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지금 독일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독일 정계에서는 '위험한 낙관론'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난 지금, 프라처 소장의 주장은 일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독일 정부가 지금껏 취해온 경제 정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폴크스바겐으로 대표되는 자동차 업계였다. 정책들의 한계와 문제점이 폴크스바겐 스캔들로 드러났다.

미국 테네시주 차타누가에 있는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중형 세단 파사트를 조립 중인 노동자들.
미국 테네시주 차타누가에 있는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중형 세단 파사트를 조립 중인 노동자들. / AP 뉴시스

하르츠 노동 개혁과 불황형 경제 모델의 한계

이번 문제를 하르츠 노동 개혁의 한계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르츠는 2000년대 초반 독일 실업률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보다 높던 시절, 근무 시간을 줄이는 대신 일자리를 보존하는 방식의 노동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실업률을 낮추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비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만 양산해 직원들의 전문성을 낮추는 부작용을 낳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자동차 기업은 그동안 문제가 생기면 연구개발을 통해 해결했는데 폴크스바겐이 이번에 '꼼수'를 쓴 것은 해결 방법을 찾을 기술자가 없었기 때문 아니냐"고 말했다.

독일 경제가 그동안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를 탈출하기 위해 사용한, '아끼고 저축하며 성장률을 높이는' 불황형 경제 모델에도 한계가 왔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마르틴 고르니히 DIW 기업시장팀장은 "이 모델은 불황에는 빛을 발하지만, 호황기에는 기업 투자와 내수 성장을 억제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며 "현재 독일 경제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라고 말했다.

독일 경제의 정경 유착

이번 사건으로 불거진 독일 경제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경 유착이다. 몇 년 전부터 유럽연합(EU)과 민간단체들이 독일 정부에 디젤차 배출 가스의 문제를 경고했지만, 독일 정부는 기업 말만 믿으며 방치했다는 것이다. 독일 정부의 안일한 대처가 일을 키웠다는 것인데, 그 주요 원인이 자동차 업계의 강력한 로비와 정경 유착이라는 것이다.

볼프강 매닝 함부르크대 교수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프랑스 등 유럽 일부 나라가 대기오염을 이유로 디젤 차량 판매를 제한하는 상황에서 독일만 디젤차에 친환경 명목의 세제 혜택까지 주며 키우는 건 이상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특히, 폴크스바겐은 공장이 있는 니더작센 주정부가 지분을 20% 가진 주요주주이기 때문에 다른 자동차 업계보다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이 나온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크리스티안 불프 전 대통령, 지그마르 가브리엘 부총리 겸 경제에너지부 장관 등이 니더작센주 주총리(도지사에 해당) 출신으로 폴크스바겐 그룹 내 감독이사회 위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친손자인 포르셰와 외손자인 피에히의 싸움에서 피에히가 이긴 것도, 피에히가 슈뢰더 전 총리와 불프 전 대통령과 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외에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자문관이었던 에카르트 폰 클레든과 마르틴 예거는 공직을 떠나자마자 또 다른 자동차 회사인 다임러 그룹으로 들어갔다.

환경단체 움벨트힐페 위르겐 레쉬 회장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독일 정부는 그동안 실제 배출량을 측정하지 않은 채 업체가 제출한 신고 서류만을 근거로 허가를 내줬다"며 "아마 독일 정부도 오래 전부터 자동차 업체들의 서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럽의 독일 의존

폴크스바겐 스캔들을 두고 전문가들 일각에서는 유럽 경제 위기까지 거론된다. 유럽 경제의 독일 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독일은 현재 낮은 부채와 풍부한 현금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나 그리스, 스페인 등 재정 위기에 처한 나라들에 막대한 돈을 빌려주며 유럽 경제의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EU가 재정 위기에 처한 회원국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비상 기금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의 부담 비율이 가장 높은 곳도 독일이다. 독일 경제가 휘청거릴 경우에는 유럽 경제까지 직격탄을 입는다는 것이다.

또한 폴크스바겐 그룹 내 브랜드 공장들은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벨기에,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유럽 전역으로 흩어져 있다. 폴크스바겐이 흔들릴 경우 해당 국가들 경제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파산을 생각하긴 어렵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 폴크스바겐에 남은 것은 법적 절차와 보상 문제다. 독일 검찰은 지난 28일 마르틴 빈터코른 전 CEO를 대상으로 조작 사건을 미리 알았는지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조작 행위를 알았을 경우 사기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느냐가 쟁점이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검찰 수사가 폴크스바겐 소프트웨어 제작사인 자동차 부품회사 '보쉬'나 정치권 관계자 등으로도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 등 각국 정부와 소비자들로부터 벌금과 과징금, 리콜, 민·형사 소송 등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에서만 벌금으로 최대 180억달러(약 21조원)를 지불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벌금과 과징금으로 폴크스바겐이 파산 위기에 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문제는 폴크스바겐이 과거 도요타처럼 회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매닝 교수는 "폴크스바겐은 과거에도 GM 등과 산업 스파이 논란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이후 좋은 품질의 차를 만들며 위기를 이겨냈다"며 "도요타처럼 출시 제품만 좋으면 과거 논란은 잊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디젤 엔진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많은 자동차 전문가가 분석했다. 디젤 엔진 차량이 가솔린 엔진 차량보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상황에서 유가도 낮은데 굳이 환경에도 나쁜 것으로 판명된 디젤 엔진 차량을 소비자들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독일 내에서는 디젤 엔진에 주어지던 친환경 보조금이 전기차 쪽으로 옮겨질 경우, 전기차 시대를 앞당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CEO는 29일 "폴크스바겐 사태의 진정한 의미는 디젤과 가솔린 연료로는 기술 발전의 한계에 도달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기술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지금은 화석 연료에 대한 미련을 접고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시대"라고 말했다.

☞배기가스 스캔들

폴크스바겐이 미국 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해 배기가스 배출 소프트웨어(SW)를 조작한 사건이다. 폴크스바겐은 지난달 18일 미국 환경보호청(EPA)으로부터 48만2000여대의 디젤 차량에 대한 리콜 명령을 받았다. 폴크스바겐은 차량 테스트 중에는 배기가스 배출 억제 시스템을 가동하다가 일반 주행 중에는 억제 시스템이 꺼지도록 SW를 조작했다. 폴크스바겐의 조작은 연비(燃費) 향상이 주목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르츠(Hartz) 개혁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대표적인 노동 개혁 성공 사례로 꼽힌다. 2003년 개혁 추진 당시 독일은 ‘유럽의 병자(病者)’로 불렸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슈뢰더 총리 정부가 폴크스바겐 이사 출신인 페터 하르츠를 기용해 과감한 노동시장 개혁을 단행했다. 노동 능력이 있음에도 일자리를 찾지 않고 복지 혜택만을 누리려는 실직자를 줄이는 게 개혁안의 골자. 일괄 지급되던 실업급여 지급액을 근로 능력 유무에 따라 차등화하고, 시간제·한시적 일자리를 대거 도입하는 등 노동시장을 유연화했다.

☞게르만(German) 경제 모델

제조업을 기반으로 수출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경제 모델을 가리키는 말이다. 금융·서비스를 중심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더 낫다는 앵글로 색슨 경제 모델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앵글로 색슨 경제 모델이 무너지자 제조업 중심의 게르만 경제 모델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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