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만 가지 제품 파는 월마트보다 1200가지 파는 할인점이 대세… 선택권 줄여줘야 선택받는다

입력 2016.12.17 03:00

'선택 심리학' 大家 시나 아이엔거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

지난 11월 8일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막을 내린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미국 현대 선거 사상 최악의 비호감 후보 간 대결'로 불렸다.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 그에 맞섰던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은 각각 여러 스캔들에 휘말리며 투표일 직전까지 비방전을 거듭했고, 갤럽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역대 미국 대선 후보 중 최악의 선호도를 기록했다. 미국 국민은 가장 좋은 사람을 가려내는 대선에서 '싫은 사람 둘 가운데 그나마 나은 사람'을 뽑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그 결과는 '선택의 포기'로 이어졌다. CNN은 "올해 대선 투표율은 최종 확인 작업을 하는 중이지만 이미 유권자가 행사한 것으로 집계된 1억2600만표는 전체 유권자의 55%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며 "투표율이 53.5%를 기록했던 1996년 이래 20년 만에 최저 수준"이라고 전했다. '선택의 심리학(원제 The Art of Choosing)' 저자 시나 아이엔거(Iyengar·47) 미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것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것을 고르는 작업은 사람에게 '재미'로 다가오지만, 모든 선택지가 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는 가장 좋은 것을 찾는 과정 전체가 부담으로 다가오고 귀찮아지기 때문에 아예 선택을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12만 가지 제품 파는 월마트보다 1200가지 파는 할인점이 대세… 선택권 줄여줘야 선택받는다
선택권이 많아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미 대선에 앞서 2015년 3월에 시작된 공화당 예비 경선에는 트럼프를 비롯해 총 17명의 후보가 경쟁했다. 최종 경선 후보로 트럼프가 낙점됐지만 공화당 내부는 분열됐다. 대선 한 달 전인 10월까지도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 후보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아이엔거 교수는 이를 '선택 과부하'의 부작용으로 해석한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선택권을 맞닥뜨리면 우리 정신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세세하게 따지는 것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단번에 눈길을 끄는 한 가지 잣대로 선택해버리기 마련이다. 가령 목소리가 제일 크고 간단명료해서 기억하기 쉬운 말을 하는 사람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시나 아이엔거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
시나 아이엔거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
인도 출신의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엔거 교수는 오랜 기간 선택의 문제를 연구해온 사회심리학자다. 아이엔거 교수는 색소성 망막염으로 고등학교 때 시력을 잃은 뒤 '선택'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눈이 보이는 사람에 비해 자신의 선택권이 얼마나 줄어들지, 그리고 제약 조건 속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 접목해 풀어낸 저서 '선택의 심리학'은 2010년 파이낸셜타임스(FT) '올해의 책'에 선정됐고, 아이엔거 교수는 2011년 경영학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싱커스 50'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달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봤다.

탁자 가운데에는 색색의 초콜릿이 종류별로 담긴 투명한 통 서너 개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아이엔거 교수는 "우리가 가장 만족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 대한 선택이다. 아마 초콜릿이라면 내가 제일 잘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우리 삶에서 선택은 어떤 의미가 있나.

"우리 삶에 작용하는 힘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운명, 우연 그리고 선택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사람이 실제로 바꿀 수 있는 요소는 단 한 가지, 선택의 영역뿐이다. 자신의 의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요소다. 자연히 선택권이 많을수록 사람이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그렇다면 소비자에게 선택권이 많을수록 좋은 것인가.

"한동안 소비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줄수록 매출이 늘어날 것이란 생각이 경영계와 산업계를 지배했다. 1949년에 미국 수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평균 3750가지였는데 2010년에는 4만5000가지로 늘어났다. 대형 할인점 월마트는 2014년 기준으로 매장에 진열한 품목이 12만 가지나 됐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어린이들을 관찰해보니 다양한 장난감을 한꺼번에 줄 때 분명히 그 상황을 즐기긴 했지만, 한 가지 장난감만 줄 때 그 장난감에 훨씬 강한 애착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진행한 실험이 샌프란시스코의 대형 수퍼마켓 드래거스(Draeger's)에서 실시한 '잼 시식(試食)' 실험이다. 수퍼마켓 입구에 잼 시식 테이블을 두 개 설치했다. 한 테이블에는 24가지 종류 잼을 진열하고, 다른 테이블에는 6가지 잼을 진열해 각각 맛볼 수 있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소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물론 24가지 종류를 진열한 테이블이었다. 전체 방문객의 60%가 이쪽 테이블로 몰렸다. 하지만 이 테이블에서 맛을 본 뒤 잼을 구매한 사람은 3%에 불과했다. 반면 6가지 종류 잼을 진열한 테이블은 맛본 사람의 30%가 실제로 잼을 샀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선택권이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맞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선택권이 많아지면 아예 선택 자체를 포기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최종 구매로 이어지는 결정을 내리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12만 가지 제품 파는 월마트보다 1200가지 파는 할인점이 대세… 선택권 줄여줘야 선택받는다
(윗쪽 사진) 독일계 할인점 알디는 매장에서 판매하는 물품의 수를 경쟁 업체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이는 전략으로 영국에 진출해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블룸버그 (아랫쪽 사진) 이탈리아 유통업체 이틀리(Eataly)는 이탈리아 음식과 재료, 조리법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 블룸버그
"선택권이 너무 많으면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있기 마련이다. 한 가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기회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다. 이런 기회비용은 선택하는 사람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나치게 선택권이 많아지면 그런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아예 최종 결정을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기준이 뚜렷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한 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컬럼비아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스피드 데이팅(즉석 만남) 실험을 했다. 시작 전에 각자 이성을 만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지 기준을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이성과 4분 동안 대화한 뒤 자리를 바꾸는 방식으로 10명 혹은 20명의 상대를 만났다. 만남이 끝난 뒤에는 어떤 사람과 좀 더 진지하게 만나고 싶은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적어내게 했다. 그랬더니 10명을 만난 학생들은 사전에 자신이 설문에 답한 기준과 취향에 부합하는 사람을 선택했다. 하지만 20명을 만난 학생들은 달랐다. 원래 제시했던 기준을 무시하고, 가장 알아보기 쉽고 단순한 기준에 따라 상대를 선택했다. 바로 '외모'였다.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비교하고 계산해볼 수 있는 수준의 선택권이 있을 때는 최대한 신중한 결정을 내리지만, 선택권이 너무 많아지면 혼란스러운 나머지 일단 그 순간을 무사히 넘기는 게 목적이 되는 것이다. 결국은 자신만의 기준을 무시한 채 가장 알아보기 쉽고 보편적인 기준인 외모를 잣대로 상대를 고르게 됐다."

―선택의 폭이 선택의 기준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우리가 선택에 이르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따른 장단점을 서로 비교한다. 어떤 선택을 할 때 장점이 극대화되고 단점은 최소화되는지 모두 고려해 최적의 것을 선택한다. 그런데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렇게 비교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 '계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가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선택권이 많아질수록 결과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선택권이 많을수록 자신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믿게 되고, 더 큰 만족을 바라게 된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요리가 닭요리와 야채요리 두 가지뿐이라면 크게 고민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 그러나 생선·닭·오리·소·돼지 등 다양한 선택권이 생기면 '나는 이 중에 정말 맛있는 걸 먹어야 해'라는 식으로 기대가 커진다. 이 경우 선택이 실패로 돌아가면 상실감도 크다. 신중하게 골랐는데 음식이 생각보다 맛이 없다면 내가 포기한 다른 음식에 대한 아쉬움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와 후회에 대한 공포가 커지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는 게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의 수를 줄이면 소비자 입장에선 누려야 할 권리가 줄었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 때문에 소비자를 설득할 수 있는 정당한 기준과 이유가 중요하다. 선택권이 줄어든 데에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사람들은 선택에 '제약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대신 '좀 더 쉽게 선택할 수 있게 도움을 받아 최선의 선택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고 여긴다."

―소비자가 결정 장애에 빠져 구매 결정을 포기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단기적인 전략으로는 기업이 먼저 소비자의 선택권을 좁혀 혼란을 줄여주는 편이 좋다. 프록터앤드갬블(P&G)은 한때 비듬 방지용 샴푸를 26가지나 출시해 판매했으나 판매량이 적은 라인을 과감하게 정리해 15가지로 샴푸 종류를 줄였다. 그러자 매출이 10% 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이것을 선택하라'고 권할 수 있을 만한 가치와 권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애플이 좋은 예다. 애플은 아이폰, 맥북, 아이팟, 아이패드 등 여러 품목을 취급하지만 분야별로 들여다보면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제한적이다. 색상이 늘어났다고 해봐야 4~5가지를 넘지 않는다. 그 대신 애플은 '우리가 권하는 것은 소비자에게도 최고의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줬기에 마니아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덴마크의 액세서리 업체 판도라는 소비자가 스스로 팔찌에 끼울 수 있는 장신구를 선택하게 하는 전략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선택권을 다양하게 유지하면서 성공한 사례 아닌가.

"단순하게 선택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큐레이션'이 중요하다. 소비자가 선택에 참고할 수 있는 전문가의 조언과 추천을 활용하는 것이다. 판도라는 선택권만 많이 주는 게 아니라 다양한 추천 샘플 상품을 시즌마다 정기적으로 내놓는다. 선택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좋은 디자인을 추천하는 큐레이션 작업을 알게 모르게 하는 것이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