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6.05.21 03:06

글렌 캐럴 美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19세기 제조방식 그대로 위스키 만든다고? 사람이 갈퀴질하는 모습에 소비자는 감동

글렌 캐럴 美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글렌 캐럴 美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2012년 미 뉴욕주 허드슨강 상류에 문을 연 양주 생산업체 코퍼시(Coppersea)는 19세기 미국인들이 쓰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위스키를 만든다. 인근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보리·호밀 등 곡물을 가져다가 바닥에 깔아놓는다. 사람이 직접 연장을 들고 곡물을 뒤집으며 갈퀴질을 한다. 그리고 이 곡물을 커다란 통에 넣고 손으로 저어 주며 열을 가한다. 곡물을 몰팅(양주 제조)하는 과정의 일부다. 대형 기계를 쓰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코퍼시가 전통적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런 정성과 시간이 마케팅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코퍼시는 몇 년간 주요 주류 잡지에서 주목을 받으며, 기존 대형 주류업체들이 놓치고 있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대량생산에 따른 비용 절감이라는 대기업의 강점을 무력화시키는 브랜드 전략이 먹힌 것이다.

글렌 캐럴(Carroll·62) 미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코퍼시처럼 가치를 추구하고 신념을 밀어붙이는 제품들의 경쟁력으로 '진정성(authenticity)'을 꼽았다. 대기업이나 유명한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진정성을 보여주는 제품이라면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이다.

캐럴 교수가 말하는 진정성은 '진심'보다 훨씬 더 광의의 개념이다. 정통적이고 인위적이지 않다는 특징, 일관된 가치를 추구하고 사회적·도덕적 이슈에 깨어 있다는 특징을 모두 포괄해 진정성으로 봤다. 그는 현대의 소비자들이 자신의 가치에 맞는 상품을 선호하는 '가치 소비'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소비자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이 '진정성'이라고 주장한다.

사회과학자인 캐럴 교수는 선배이자 동료인 마이클 해난(Hannan) 스탠퍼드대 교수와 함께 조직(기업)들이 나타나고 없어지는 현상을 연구하는 조직생태학을 개척했다. 특히 캐럴 교수는 지난 몇 년간은 식음료·화장품 등 소비재 시장을 중심으로 조직과 소비자들의 행동을 연구해왔다.

캐럴 교수는 코퍼시의 사례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유행한 '소규모 증류업체 붐'에 대한 연구를 지난 2014년 발표했다. 그래서인지 지난 3월 말 방문한 캐럴 교수의 사무실에는 여러 종류의 음료수와 술병이 쌓여 있었다. 그는 "대기업들이 진출한 산업에서 틈새시장을 뚫으려면 소비자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가치가 담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양주 생산 업체 코퍼시는 19세기 전통 방식으로 양주를 만든다. 대부분을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맡긴다.
양주 생산 업체 코퍼시는 19세기 전통 방식으로 양주를 만든다. 대부분을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맡긴다.
①소비자를 감동시키는 가치를 전달하라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습니다. 우선 기억해야 할 점은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두고 진정성 여부를 평가할 때는 100% 주관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개별 소비자들이 느끼기에 어떤 제품이 자신의 가치관과 일치한다면 '진정성이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가치를 전달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소비자가 동일한 가치관이나 믿음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개별 소비자들의 다양한 가치관에도 어느 정도 반복되는 패턴이 있고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소비자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저의 연구입니다. 객관적으로 진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쓰는 단어와는 조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을 팔 때 말하는 '진품'이라는 뜻의 진정성은 매우 협소한 의미에 불과합니다."

②현지 문화를 반영하라

"1983년 기준으로 미국의 맥주 생산 기업은 40곳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은 크고 작은 업체들이 1000여개에 달합니다. 이른바 '소규모 수제 맥주 붐'이 시작된 것이죠. 특이한 점은 기존의 대형 브랜드 맥주를 마시던 소비자들이 수제 맥주로 옮겨오면서 더 높은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마치 수제 맥주의 '전도사'가 된 듯했다는 겁니다. 기존의 대형 브랜드 맥주는 정말 맛이 없다고 믿게 됐습니다. 사실 대기업 맥주 중에선 이런 수제 맥주보다 더 맛있는 제품도 많았는데 소비자들은 수제 맥주업체들의 맛을 평가할 때 가치를 높게 샀습니다. 맥주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한 코퍼시 같은 위스키도 마찬가지였고 초콜릿, 커피 같은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소비자들은 이국적인 음식을 먹을 때에는 '진짜' '정통'에 가치를 부여하곤 합니다. 1980년대 초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 음식점들이 손질한 오리를 식당 창문에 매달아 놓았는데, 이를 두고 위생법을 위반했다며 단속에 나섰습니다. 단속이 시작되자 중국인 이민자들은 '우리 선조들은 지난 4000년 동안 이 방법으로 요리해왔다'며 반박했습니다(베이징 오리는 그늘에 말린 후 굽는다·편집자 주). 더 놀라운 것은 소비자들이 식당 편을 들었다는 겁니다. 소비자들은 이것이 이국적인 문화이자 '진짜'라고 생각했고 위생 점수가 좀 낮아도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식당이 보건 당국으로부터 위생 단속을 무난하게 통과하면 소비자들은 '현지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렸을 겁니다."

미 식료품점 홀푸드 마켓은 유기농, 공정무역 제품을 공급한다(위쪽). 영국 러쉬는 화장품 제조 과정에서 동물실험을 하는 행위를 반대한다. 동물에게 권리를 주자며 거리 행진을 벌이고 있다.
미 식료품점 홀푸드 마켓은 유기농, 공정무역 제품을 공급한다(위쪽). 영국 러쉬는 화장품 제조 과정에서 동물실험을 하는 행위를 반대한다. 동물에게 권리를 주자며 거리 행진을 벌이고 있다.
③사용하는 것만으로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이미지를 심어라

"앞서 언급한 주류 시장의 경우, 대기업 브랜드가 아닌 영세 업체들이 만든 맥주나 위스키를 마시는 소비자들 사이에선 일종의 우월감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소비자들은 '대기업은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업체인 반면, 수제 맥주업체들은 이익뿐만 아니라 소비자에게 주는 가치를 우선시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맥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맥주에 대한 전문 지식이 더 높다는 것,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높다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유식한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마치 남들이 다 아는 와인·치즈보다 남들이 잘 모르지만 정말 괜찮은 와인·치즈를 먹는 사람이 더 신뢰 있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또 많은 사람이 자신이 믿고 쓰던 제품이 '대기업이 만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신뢰를 잃거나 실망하게 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어떤 제품이나 브랜드 배후에 대기업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소비자들은 의심하기 마련입니다."

④개성 표출하려는 욕망 있는 소비자를 공략하라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찍어낸 제품을 쓰는 대량생산 사회에서 개개인들이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고 찾기 위한 방법으로 진정성 있는 제품을 더 찾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획일적으로 똑같은 제품을 소비하고 싶지 않은 거죠. 다른 사람들과 나를 차별화하고 더 눈에 띄어서 나 스스로를 표출하고 싶은 겁니다.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들이 오랫동안 고수하던 아파트 문화를 버리고 다시 주택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아파트에선 인테리어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만약에 그런 트렌드가 혹시나 확대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남들도 모두 주택을 짓고 살면서 결국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살게 되는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⑤억지로 지어내면 역효과…있는 얘기 발굴해 최대한 부각시켜라

"그렇다고 없는 얘기를 지어내란 것은 아닙니다. 일부 업체는 대기업과 연관 없어 보이기 위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거나, 최대한 대기업과의 연관성을 숨기기도 했죠. 그랬다가 들통이 나면 소비자들한테 크게 혼이 납니다.

진정성 마케팅의 힘
송윤혜 기자
과거 80년대 얘깁니다. '바틀스앤드제임스(Bartles&Jaymes)'라는 곳이 와인과 탄산수를 섞은 '와인쿨러'라는 음료 브랜드를 내놓았습니다. 이름이 바틀스와 제임스인 매우 소탈하고 이웃집 삼촌 같은 남성 둘이 TV 광고에 등장해서 시골 사투리를 써가면서 '서민적 이미지'를 만들어갔죠. 처음엔 소비자들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최대 와인 업체인 갈로(E&J Gallo) 와인이 만든 브랜드였습니다. 소비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나선 크게 실망했습니다. 대형 맥주회사들이 '수제 맥주'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대기업과 연관성을 감추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⑥사회적 이슈 눈여겨봐라

"같은 맥락에서 사회적으로 영향을 주는 도덕적 가치,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화장품 브랜드인 '더바디샵' '러쉬'가 그런 예입니다. 더바디샵과 러쉬는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화장품 시장에서도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보고 사람들은 진정성 있는 업체라고 평가를 하고 믿게 되는 겁니다. 단순히 좋은 기업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로 보여주면서 어떤 문제를 이슈화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미 식료품 업체 '홀푸드마켓'을 들 수 있습니다. 유기농, 지역 농산물, 공정무역 등 매우 이타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소비자들에게 '홀푸드마켓은 퀄리티 높은 제품을 판매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줬습니다."

⑦각 문화마다 '진정성' 달라… 시장 이해하라

"다만 모든 곳에서 진정성 소비가 큰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맥주산업이라고 다 같지는 않죠. 홍콩에선 전통적인 수제 맥주가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질이 떨어지고 비위생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또 항공산업의 경우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형 항공사들과 거리를 둔 소규모 항공사보다 오히려 대형 항공사들과 어떻게든 연결된 것처럼 보이려는 작은 항공사들이 있었습니다. 미국엔 아메리칸항공 산하 '아메리칸 이글(저비용 항공사)'이 그랬습니다. 그건 항공사를 선택할 때 소비자들의 가치가 '안전' '편안함'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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