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 가던 '명품 神話' 되살린 해결사

입력 2016.05.21 03:06

[Cover Story] 베르사체 CEO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

1997년 7월 15일 오전 9시,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해변의 고급 주택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출입문 앞 계단에 쓰러진 중년 남자의 손에서 이탈리아어 신문이 떨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프랑스 파리 패션쇼장에서 찬사를 받던 패션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의 마지막이었다. 평소에는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던 그가 그날따라 산책 삼아 직접 신문을 사오던 참이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르사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 '메두사'의 머리 모양을 본뜬 로고와 화려하고 관능적인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지아니는 형 산토에게 경영을 맡기고 여동생 도나텔라를 조언자로 삼아 1978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세웠다. 지아니는 어렸을 때부터 익힌 재단 기술과 미술사 지식, 이탈리아 패션업체 경험을 바탕으로 신생 업체 베르사체를 순식간에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패션그룹으로 키워냈다.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

클라우디아 시퍼, 신디 크로퍼드, 크리스티 털링턴 등 모델들을 패션쇼에 적극적으로 기용해 1990년대 수퍼모델 열풍을 일으키고, 팝스타 마돈나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당대 스타들에게 의상을 입혀 패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조시킨 것도 그다.

연쇄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 범인이 자살한 탓에 지아니 살인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형 산토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아니를 도와 20년 넘게 일한 여동생 도나텔라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패션 기업의 제작 총괄)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 연간 약 5억달러 매출을 올리던 베르사체 그룹의 평가 가치는 약 20억달러였다.

천재적인 디자이너 겸 사업가였던 지아니는 베르사체 브랜드 그 자체였다. 핵심 가치를 잃어버린 기업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도나텔라는 관능적이고 화려한 스타일 대신 차분한 디자인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려 했지만, 베르사체의 인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10년도 안 되는 새 매출이 절반으로 줄면서 재무 상황이 악화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적자를 내기 이르렀다. 베르사체 일가는 2003년 전문 경영인인 파비오 마시모 카치아토리를 영입했지만, 카치아토리는 베르사체 일가와의 의견 차 때문에 1년 만에 회사를 떠났다. 후임자인 지안카를로 디 리시오는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 문제를 두고 오너 일가와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해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베르사체 일가는 지아니가 수집했던 앤디 워홀, 앙리 마티스, 에드가 드가 등 유명 화가의 미술품까지 경매에 넘겼다.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 베르사체 그룹 CEO.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 베르사체 그룹 CEO.
적자에 허덕이던 베르사체 그룹을 되살려낸 이는 2009년 7월 취임한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Ferraris·59) CEO다. 그는 2년 내 흑자 전환을 목표로 직원 4분의 1을 해고하고 전 매장의 실적을 평가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그러면서도 디자인에 대한 도나텔라의 권한은 최대한 존중했다. 베르사체의 모든 제품이 그의 디자인팀을 거치는 체계를 만들었다. 구조 조정을 단행할 때도 디자인과 제품 개발 인력은 단 한 명도 감원하지 않았다.

창업자인 지아니가 구축한 패션 스타일로 되돌아간 것도 일정 부분 그의 공이다. 페라리스 CEO는 "베르사체의 디자인은 미니멀리즘(minimalism·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 흐름)이 아닌, 관능적이고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을 쓰는 스타일"이라며 "베르사체의 고유한 디자인 DNA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페라리스 CEO는 계획대로 베르사체 그룹을 흑자로 바꿔 놓았고, 해마다 매출이 두 자릿수로 늘어나는 회사로 키웠다. 그가 취임한 해 2억7000만유로였던 매출은 2015년 6억4500만유로로 증가했다. 최근 2~3년 사이 명품 업계 분위기가 급격하게 악화된 상황에서 일군 성과다. 지난해 프라다는 5년 만에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고, 휴고보스의 CEO는 실적 부진 탓에 최근 사임했다. 샤넬, 루이비통, 구찌 등은 올 들어 중국 시장에서 '제품 가격 인하'라는 강수까지 꺼내들었고, 일부 패션 브랜드는 매장 수도 줄이고 있다. 반면 베르사체는 올해 이탈리아와 미국 등의 주요 매장을 재단장하고 새로운 매장을 내는 데 최대 5000만유로(약 67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위클리비즈가 한국을 찾은 페라리스 CEO를 만나 패션 기업을 부활시킨 전략에 대해 물었다. 사진으로 미리 본 인상은 날카로웠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평범하고 친근한 중년 아저씨 같은 분위기였다.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 베르사체 그룹을 바꾸셨습니까.

"패션 기업 경영자는 디자인팀과 긴밀하게 의사소통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전문적인 혼인 관계'랄까요. 일상적인 업무 결정을 할 때, 저는 도나텔라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나텔라는 저와 상의합니다. CEO인 저는 품질관리, 배송, 영업이익 개선 작업을 잘할 수 있지만, 제품은 디자이너의 창의성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경영자는 디자이너의 창작 활동을 지원해야 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팀이 '알맞은 주제'에 맞춰 작업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디자이너 스스로 본인이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면 패션 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도나텔라는 창업자인 지아니가 구축한 베르사체의 스타일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베르사체 그룹의 가구·인테리어 브랜드‘베르사체 홈’의 제품들. 쿠션, 소파, 탁자, 카펫 등을 모두 베르사체에서 디자인했다.
베르사체 그룹의 가구·인테리어 브랜드‘베르사체 홈’의 제품들. 쿠션, 소파, 탁자, 카펫 등을 모두 베르사체에서 디자인했다. / 베르사체 제공
페라리스 CEO는 베르사체의 핵심 가치를 ‘패션,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세련된 디자인, 명품 이미지, 옷과 가방 이외에도 향수와 가구 같은 일상생활 용품을 아우르는 제품군을 각각 의미한다. 그는 이 기준에 맞춰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던 라이선스 사업을 정리하고, 성장 전망이 좋은 인테리어 사업은 베르사체 그룹에서 직접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베르사체 그룹이 지분 60%를 보유하고 라이선스 방식으로 생산하던 ‘베르사체 홈’ 의 나머지 지분을 지난해 모두 사들여, 올해 1월 내부 생산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가구와 인테리어 산업은 앞으로 성장 전망이 좋은 분야이고, 우리도 한 걸음 더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 디자인 가구에 대한 수요가 많은 만큼 앞으로 가구·담요·향수 등 라이프스타일 관련 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고 봅니다.”

기업 실적이 개선되자, 페라리스 CEO는 그룹의 재무구조를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 외부에서 투자를 유치했다. 2014년 베르사체 일가가 100% 소유했던 회사 주식 중 20%를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에 매각하고, 투자 관계자를 베르사체 그룹 이사회에 참여하게 했다. 블랙스톤은 베르사체 그룹의 기업 가치를 10억유로로 추정하고 2억1000만유로를 투자했다. 페라리스 CEO는 장기적으로 베르사체 그룹의 주식을 상장할 준비도 하고 있다.

그는 “창업자인 지아니의 디자인 세계를 존중한다는 ‘공통의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 부문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했다”며 그 덕분에 자신은 오너 일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조 조정과 경영 전문가 같은 행보를 보인 페라리스 CEO의 생애 첫 직업은 예상 밖으로 고등학교 교사였다. 두 번째 직장은 이탈리아 통신그룹 올리베티의 계열사다. 그는 2004년 질 샌더 그룹 독일법인의 최고운영책임자(COO)로 패션 기업의 임원 직함을 처음 달았다.

화학 엔지니어로 일하다 패션업계로

―어떻게 패션업계에 입문하신 겁니까.

“제 전공은 화학공학이고, 두 번째 직장에선 화학 엔지니어로 일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화학공학은 섬유산업과 밀접합니다. 그 덕분에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천연섬유와 합성섬유 등 다양한 소재에 대한 지식을 얻고, 섬유산업 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었어요. 패션업계에서 구한 첫 직장이 이탈리아 섬유업체인 제냐(Zegna)였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다음엔 미국 컨설팅업체에서 일하며 기업 경영과 관리 기법에 대해 배웠고, 패션업체들과 같이 일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후 질 샌더 그룹 독일법인의 COO, 구찌 그룹의 기성복 부문 총괄, 질 샌더 그룹의 CEO를 거쳐 2009년 베르사체의 CEO가 됐죠. 섬유산업을 거쳐 패션업계에서도 단계별로 경력을 쌓은 셈입니다.”

―패션 기업 운영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기업 경영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제가 성공적으로 베르사체 그룹을 구조 조정 할 수 있었던 비결을 굳이 꼽자면, 창의적인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는 데 익숙하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질 샌더 그룹의 질 샌더는 물론이고, 구찌 그룹에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톰 포드와 보테가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 이브생로랑의 스테파노 필라티 등 뛰어난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한 경험이 도움이 됐습니다.

지난 6년여 동안 저는 베르사체 고유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창업자인 지아니는 당대의 유명 디자이너였고, 그가 살아 있을 땐 프라다 같은 다른 이탈리아 명품업체보다 베르사체가 더 유명했습니다. 가방과 신발 제품에서 시작한 프라다와 달리 베르사체는 처음부터 옷을 만들었어요.

베르사체는 샤넬만큼 길지는 않지만 5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베르사체 특유의 패션 DNA를 되살리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은 창업자 지아니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도나텔라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에게 디자인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겁니다. 이런 브랜드 인지도와 특징적인 디자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베르사체 핸드백 ‘팔라조 엠파이어’. 베르사체 선글라스 ‘그레카 스타’.
베르사체 핸드백 ‘팔라조 엠파이어’. 베르사체 선글라스 ‘그레카 스타’
시장 변화에 대응하면 불황은 없다

베르사체 그룹의 브랜드들은 스타일과 목표 고객군에 따라 차별화된다. 쿠튀르(고급 맞춤옷) 전문인 ‘아틀리에 베르사체’, 관능적이고 화려한 베르사체 특유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주력 브랜드 ‘베르사체’, 젊고 실험적인 제품을 만드는 ‘베르수스’, 라이선스 캐주얼 의류 브랜드인 ‘베르사체 진’ 등이다. 베르수스는 크리스토퍼 케인, 조너선 앤더슨, 안토니 바카렐로 등 신진 디자이너들을 기용해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며,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아틀리에 베르사체는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고급 여성복과 남성복을 제작하는, 일종의 창의적인 실험실 역할을 합니다. 명품 라인인 베르사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탈리아에서 생산해 품질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세컨드라인(디자이너 브랜드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보급형 브랜드)인 베르수스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헝가리나 스페인 등에서 생산합니다.”

―많은 명품 업체가 불황과 신흥 시장의 정체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입니다. 베르사체의 전략은 무엇입니까.

“유럽의 테러와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 (중국 정부의) 부패 척결 캠페인 등으로 인한 홍콩·마카오의 판매 부진 등으로 패션업계의 여건은 어렵습니다. 베르사체의 핵심 가치와 창업자인 지아니가 남긴 디자인 DNA를 제품 전반에 담으면서도, 시장 환경의 변화에는 탄력적으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예컨대 러시아·홍콩 등의 시장이 위축되면 한국과 일본 등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 영업을 확장하고 판매 경로를 소매·도매·라이선스 사업 등으로 다각화해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호주와 두바이 등에 베르사체 호텔을 운영하는 것도 우리 디자인을 여러 제품군에서 선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온라인 쇼핑의 발달이 패션산업의 지형도 바꾸고 있습니다.

“대응 방법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로 휴대폰으로도 언제든 베르사체의 온라인 사이트에 접속해 상품을 주문할 수 있는 ‘모바일 프렌들리’, 판매망 다각화(옴니채널), 고객의 성향과 취향을 파악하는 고객관계관리(CRM)에 대한 투자 확대, 마지막으로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소통 강화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온라인으로도 상품을 판매합니다만, 중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는 온라인 사이트를 홍보 목적으로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페라리스 CEO는 일본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이동해야 한다며 황급히 작별인사를 건넸다. 인터뷰 장소를 나서던 그는 “정장과 셔츠, 타이는 물론이고 속옷까지 지금 입고 있는 것들이 모두 베르사체 제품”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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