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규율의 성장'하라… 과거의 신흥국처럼

입력 2016.02.13 03:04 | 수정 2016.02.13 03:16

[Cover Story] 피터 블레어 헨리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장

카리브해의 섬나라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는 모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자메이카는 1962년, 바베이도스는 1966년 독립했다. 두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배경 때문에 정치·법률 등 거의 동일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독립 전 두 나라의 국민소득도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한데 독립 후 이들의 경제 발전 격차는 눈에 띄게 벌어졌다.

2009년 피터 블레어 헨리(Henry·47) 현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장이 '제도 대(對) 정책: 두 개의 섬 이야기'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경제학계에 논쟁이 일었다. 두 개의 섬은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를 가리킨다. 헨리 원장은 자메이카 출신 미국 이민자다. 그는 이 논문에서 두 나라의 차이는 규율(discipline)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때까지 많이 거론되던 견해는 '제도'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가른다는 것이었다. 앞서 대런 애스모글루 MIT 교수는 제임스 로빈슨 교수와 2000년 발표한 논문에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가 프랑스나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한 것은 영국의 경제·법률 제도가 더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논지를 발전시킨 것이 2012년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이다.

그러나 이 논지로는 같은 영국 식민지 출신 두 나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독립 후 두 국가가 선택한 경제 정책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베이도스는 위기의 순간 정책 결정을 내릴 때 규율을 지켰지만, 자메이카는 규율을 무시했습니다. 자메이카 정부는 포퓰리즘에 기대 재정 적자를 키웠고 무역을 제한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습니다. 1980년 자메이카의 실업률은 30%에 육박했습니다. 반면 바베이도스는 1990년대 유가 급등으로 경제가 위기를 맞았을 때도 재정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바베이도스 통화 가치를 절하하라고 압박했을 때도 이를 거부하고 공무원과 산업 노조의 합의를 이끌어내 임금을 삭감하는 강수를 뒀습니다. 독립 전 바베이도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3400달러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1만5000달러가 넘습니다."

제3세계 국가 중 일부는 경제 성장을 통해 신흥시장(emerging market)이란 새로운 호칭을 얻는다. 나머지는 계속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3세계로 남는다.

헨리 원장은 2013년 저서 '턴어라운드: 제3세계가 선진국 성장에 주는 교훈(Turnaround: Third World Lessons for First World Growth·한국 미출간)'에서 제3세계로 불리던 신흥국 일부가 턴어라운드(발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비결로 규율을 꼽았다. 여기서 규율이란 경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때 절제(節制)와 균형을 지키는 것이다.

"시장 친화적인 개혁 정책을 자국 상황에 맞게 선별하고 단행한 신흥국은 생활 수준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규율이 뒷받침됐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1970년대 급성장한 것도 규율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국내에 컬러TV 방송이 없던 시절에도 국내 소비를 억제한 채 컬러TV를 만들어 수출에 전력하는 원칙을 지켰고, 무역적자를 견디면서도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며 그 투자를 효율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반면 지름길을 택한 국가는 단기적인 부(富) 창출에는 성공했지만 지속적인 성장에는 실패했습니다. 지금 세계 경제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원인 중 하나로 신흥국이 과거의 규율을 잊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신흥국은 규율을 되찾고 선진국은 신흥국의 과거에서 규율을 본받아야 합니다."

헨리 원장은 국제경제, 금융, 신흥시장을 중점 연구해온 경제학자다. 스탠퍼드대 교수를 거쳐 2010년 스턴경영대학원에 최연소 원장으로 취임했다. 2008년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외부 경제자문그룹을 이끌었고 오바마 대통령 당선 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등 국제 금융기구에 대한 정책 검토를 맡았다. 맨해튼 뉴욕대에서 헨리 원장을 만났다.

피터 블레어 헨리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장
피터 블레어 헨리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장은 “나라 규모가 작을수록 자유 무역과 세계 시장 접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점이 더 중요해진다”며 “한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이를 활용해 고성장을 이뤘다”고 말했다. / 뉴욕=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신흥국의 성장 비결로 규율을 꼽았습니다. 다소 추상적인 개념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규율은 어감상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과 관련 있어 보이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규율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경제 성장에 좋은 정책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합리적인 균형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절제력과 꾸준한 목표 이행, 실용적 중도노선을 추구하는 것이죠. 규율은 국가의 장기 경제 건전성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평생 쌓이는 습관과 같습니다. 자원과 역량이 부족한 신흥국이 나라의 힘을 결집하고 이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밑바탕에는 규율이 깔려 있습니다."

―규율은 특정 국가에만 나타나는 특징인가요?

"규율은 특정 국가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오늘날 독일은 절제력의 상징과 같은 국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무분별하게 돈을 찍어내 초(超)인플레이션으로 고생했습니다. 독일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규율을 쌓아왔습니다."

―지금 선진국은 어떤 점에서 규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미국발(發)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지만, 원인 제공자인 미국, 유럽이 경제 회복을 이끌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선진국은 스스로 규율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입니다. 미국과 유럽은 비전통적 수단을 동원해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시행하는 동시에 긴축적인 재정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통화 완화 정책과 재정 긴축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규율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로존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감기가 유로존 전체에 독감으로 번지면서 붕괴 위기론까지 나왔습니다. 독일과 영국은 재정 긴축만이 선진국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경기 하강 상황에서 정부 지출을 줄이라고만 하는 것은 경제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경기가 과열됐을 때 흥청망청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규율이 잡히지 않은 행동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국가주석이 1976년 세상을 떠났을 때 중국 경제는 현재 규모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마오쩌둥은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외치다 10억명을 가난의 수렁에 빠뜨렸다. 마오쩌둥 사망 2년 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선택한 것은 개혁·개방을 내건 실용주의 정책이었다. 국민 소득을 높이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대업에 이데올로기는 거추장스러웠다.

집단농장 체제를 버리고 농민이 생산물을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게 허용했다.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사기업 설립을 합법화하고 외국인 직접투자의 문을 열었다. 서구 기업들은 낮은 임금과 광대한 시장을 보고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중국 경제 성장률은 1981년 5.2%에서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강타하기 직전인 2007년 14.2%로 올랐다.

헨리 원장은 이런 중국의 성장 역시 '규율'로 설명한다.

―중국의 사례는 앞서 언급하신 절제의 덕목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만.

"규율을 구성하는 원칙이 되는 것이 실용주의입니다. 늘 상황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며 유연하게 실용적인 성장 전략을 이행하는 것이죠. 중국 경제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올라선 것은 공산당 정부가 실용적이고 시장 지향적인 개혁을 받아들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중국은 1970년대 초만 해도 정부 내에 시장 경제의 기본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실용주의 개혁 노선을 꾸준히 걸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개혁으로 얻을 수 있는 잠재 효과를 인식하고 정책 결정을 내릴 때는 절제력을 보여줬습니다."

―중국 경제가 규율을 갖춘 성장을 이뤘다고 평가하는 건 사회주의와는 무관한가요?

"중국 정부는 이데올로기 대신 실용성을 선택했습니다. 그 덕분에 농민과 기업이 생산성을 높일 동기를 갖게 됐죠. 중국은 제3세계에서 '따라잡기 경제 성장'을 가장 성공적으로 해낸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이는 개혁 정책을 규율을 갖춰 실행하면 먼저 경제 성장을 이룬 선진국보다 일정 기간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따라잡기 성장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더 빨리 성장하고 싶다면 자본·노동·아이디어의 축적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장의 힘이 폭발했고 중국 경제는 20여 년간 매달 100만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해냈습니다."

―규율을 지켜 성장한 신흥국도 지금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만.

"신흥국은 과거에 익힌 규율을 잊은 듯합니다. 현재 세계 경제성장이 부진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IMF는 2015년 10월 그해 세계 성장률 전망치를 3.3%에서 3.1%로 낮췄습니다. 세계 경제성장률이 5년 연속 전년보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반대 효과를 내고 있고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이 택한 보호주의 정책이 신흥국에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브라질,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은 선진국이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할 때 경제 체질을 개선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잘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미국이 금리 인상에 돌입하면서 상황이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미국 금리 인상은 신흥국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신흥국은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의 여파를 견뎌낼 탄력을 기르지 못했습니다. 신흥국의 생활수준은 더 나빠지겠죠. 미국 금리 인상이 점진적으로 이뤄진다면 심각한 영향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경제가 둔화하고 있고 미국 달러화 가치가 오르면서 신흥국에 유입됐던 자금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흥국 상황이 더 빡빡해질 겁니다."

―신흥국 중에서도 중국 경제 둔화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연착륙이냐, 경착륙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 경제가 성장 둔화를 겪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단기적 둔화가 아닙니다. 중국 지도부는 2013년 11월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발표한 장기 경제 개혁 의제 이행에 대한 의지를 시험하는 중대한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중국 정부는 투자 의존도를 줄이고 소비 중심 경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성장 둔화에도 여전히 이 계획을 고수한다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중국은 특히 두 가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시장이 자본 배분을 결정하도록 하고 국민이 저축을 금융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자유를 더 줘야 합니다. 이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 소비 확대도 유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금융시장은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환율 변동성이 커졌고 자본 유출이 거셉니다. 투자자들이 중국 경제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 아닌가요?

"중국 정부가 개혁 의지에 대해 엇갈린 신호를 보내는 것을 중단해야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외국인이 중국 증시 상장사의 주식을 사는 것을 제한하는 규제를 없애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외국인 자금 유입이 활발해져 위안화 약세가 상쇄되고 중국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이 줄어드는 효과가 생기겠죠. 중국 주식이 (세계 신흥국 주가지수인) MSCI 이머징마켓 지수에 편입되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다음으로 자본 유출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한국 경제의 취약점은 뭐라고 보시나요.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큰 과제 중 하나는 인구 노령화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수준이 비슷한 발전을 이룬 국가와 비교하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한국 경제성장이 둔화하는 것은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자연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구조적 이유도 있습니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더 활발해져야 합니다. 문화와 관련된 부분이기도 해서 민감한 문제이긴 합니다. 그렇더라도 경제성장의 새 동력을 찾고 싶다면 민감한 문제도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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