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 지혜 모았나, 서로의 약점 보완할 수 있나… 다양한 고객 영혼 울리려면 '창조적 팀원' 구성이 우선

입력 2016.02.13 03:04

로하나 로잔 말레이시아 '아스트로' CEO

싱가포르·태국과 국경이 접하고, 중국은 바다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곳. 할랄(Halal·이슬람 계율에 따라 도축·가공한 고기·식품) 인증을 갖춘 무슬림 국가이면서도 영어가 통하고 관세가 거의 없는 시장 개방적인 곳. 아세안뿐 아니라 중동에서도 쇼핑을 위해 방문하는 곳. 말레이시아는 아세안 경제의 중심지이자 중동 시장으로 향하는 관문이다.

특히 소비재 시장과 관광업이 발달해, 유명한 관광지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의 쇼핑몰 수리아 KLCC와 '파빌리온'이다. 매장 규모나 입점 브랜드 수 면에서 세계 10대 쇼핑몰로 꼽힌다. 글로벌 소비재 업체들이 중동·아세안 시장의 '테스트 베드(test bed·시험 무대)'로 삼는 곳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의 소비재 1위 기업은 '아스트로(Astro)'다. 위성 TV, 라디오, 홈쇼핑, 영화 제작 등을 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송상열 GS 법인장이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삼성이라면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브랜드는 아스트로"라고 말할 정도다. 관광지마다 분홍색 아스트로 깃발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2014년 기준 매출은 26억링깃(약 7500억원), 영업이익은 8억링깃(약 2300억원)이다.

2011년부터 아스트로를 이끌고 있는 CEO는 로하나 로잔(Rozhan·52)이다. CNBC가 뽑은 올해의 아시아 경영인, 미국 토스트마스터가 뽑은 올해의 리더, CNN이 뽑은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미디어 기업 여성 등에 선정된 말레이시아 대표 기업인이다.

말레이시아는 대부분의 여성이 히잡을 쓰고 다니는 엄격한 이슬람 국가다. 법적으로 일부다처제도 허용된다. 이런 나라에서 무슬림 가정의 딸로 태어난 그녀가 어떻게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기업인이 됐고 대표 기업을 5년째 이끌고 있는 것일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아스트로 본사에서 로잔 CEO를 만나 그녀의 경영 비법을 들었다.

―CEO를 맡은 후부터 말레이시아 소비재 부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로하나 로잔
로하나 로잔 '아스트로' CEO
"최고의 회사를 만들기 위해선 최고의 팀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장에서 선두가 된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다양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 완벽한 팀을 만들어야 하죠. '어벤져스' 등 미국 마블코믹스 만화에서 '무적의 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그래서 CEO가 된 후 여성 직원의 비율을 절반 이상(52%)으로 늘리고, 직원들의 민족 구성도 다양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최고위 간부 4명 중 3명도 여성입니다. 이는 말레이시아의 인구 분포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고용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직원들 구성이 다양하면 기업을 경영하기가 더 힘들지 않나요?

"물론 힘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관점으로 움직이는 집단은 성장 가능성이 없습니다. 아스트로는 여성들을 위한 필수 휴일(출산 휴가 등)이 있을 뿐 아니라 말레이계와 중국계, 인도계 등 각 민족의 기념일마다 쉴 수 있습니다. 이런 팀 구성은 다른 국가로 진출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아스트로는 싱가포르 등 아시아뿐 아니라 구미권 기업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과는 GS홈쇼핑과 홈쇼핑 사업을 하고 있는데 한류를 좋아하는 여성 고객들의 욕구가 컸습니다. 리더라면 창조적으로 팀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송이나 영화 제작, 미디어 등의 사업은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많은 기업이 뛰어들고 있습니다. 아스트로만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콘텐츠를 파는 회사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용이 편하고 가격이 싼 제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회사 제품으로 이동할 확률도 높습니다. 그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저희는 늘 빠르게 움직여야 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고객들의 가슴과 영혼을 울려야 합니다."

―의외로 평범한 비결로 느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음료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만드는 것입니다. 소비자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항상 반 보(步)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방송을 준비하다 보면 어떨 땐 녹화 하루 전에 내용이 트렌드에서 뒤떨어졌다는 걸 깨닫습니다. 준비하는 동안 유행이 지나가 버린 거죠. 그럴 때 기존 내용을 과감히 폐기하고 새로 만듭니다.

둘째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고객들의 요구를 세세하게 맞추려고 합니다. 저희는 위성 채널 개수만 100개, 라디오 채널도 20개가 넘습니다. 미국 CNN이나 폭스, 중국 CCTV 등과 제휴한 것도 있고, 저희가 자체 제작한 것도 있습니다. 고객들의 취향을 나눠서 공략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희는 최근 스포츠 채널 '이 스포츠(E-sports)'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기존 채널 '이 애슬리트(E-athlete)'보다 더 어린 고객을 위한 것입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고객도 연령대에 따라 선호하는 경기가 다르니 별도 채널을 만든 것입니다.

셋째로는 저희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제작합니다. 미디어든 영화든 스토리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빠른 전달 면에서는 신문이 방송을 따라잡을 수 없고, 방송이 인터넷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다 보도된 내용도 검색을 통해 추가로 내용을 찾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의외로 사람들은 '속도'보다는 '스토리'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 있습니다."
로하나 로잔

―CNN, CNBC 등 해외 언론에서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표현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경영하는 기업이 1위 자리를 유지하기 때문이겠지요(웃음). 하지만 기술적으로 본다면 제가 외국어 능력을 갖고 있고, 글로벌 시민의 매너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 두 가지가 제 인지도를 높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더 많은 외국어 공부를 할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제가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결로는 독서를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일이 막힐 때면 서점에 가 책을 스무 권씩 사온 후 쌓아 놓고 읽습니다. 제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저는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감하는 능력을 키웠고, 스토리를 전달하며 설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사실 나서기 싫어하는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지위가 높아질수록 남들 앞에 설 일이 많아지고, 남들을 설득해야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못할 줄 알았는데 독서 덕분인지 의외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영국 켄트대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이 영국 유니레버였다고 들었습니다. 유리 천장(glass ceiling·소수민족 출신이나 여성들이 상위 관리직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무형의 장벽)을 느끼진 않았나요?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을까요? 전 채용 당시 수습사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습니다. 대부분이 키 크고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영국인들이었습니다. 선배들이 서 있는 제게 '일어서세요'라며 키가 작다고 놀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남들 눈에 잘 띈다는 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당신 존재조차 모르는 것이 가장 나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글로벌 기업 내 아시아 여성은 어드밴티지(advantage)를 갖고 시작합니다. 물론 주목을 받고 난 후 상황을 좋은 쪽으로 이끌고 갈지, 나쁜 쪽으로 이끌고 갈지는 본인 역량입니다. 처음에 전 그들의 일원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을 거는 사람도 드물었죠. 하지만 묵묵히 일했습니다. 몇 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한 동료는 제게 '당신 별명이 피라냐인 건 알아요?'라며 농담을 건넸죠. 피라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육식성 물고기입니다. 다들 절 무서워한다는 거죠. 하지만 전 제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일원이 됐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차별을 받는 것이고,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주목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순간들을 '긍정의 힘'으로 넘겼습니다. 결국 전 이사회 멤버 중 유일한 아시아 여성이 됐습니다."

―많은 기업이 여성 리더를 원하지만 출산·육아 등으로 인한 '경력 단절'로 여성 리더를 키우는 과정이 힘들다고 합니다.

"이건 워킹맘 본인과, 여성 리더를 원하는 기업들의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가 어릴 때 남편과 헤어져 혼자가 됐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 열두 살 된 아이를 호주의 기숙학교로 보냈습니다. 가끔 아이의 학교에서 '아이가 축구를 하다 눈이 찢어져서 큰 수술을 해야 한다' '발목을 다쳐서 인대가 나간 것 같다' 등의 전화가 옵니다.

전 못 갑니다. CEO가 되길 원했기에 이런 순간들을 외면했고, 지금도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저 같은 선택을 할 필요는 없죠. 우리는 인간이지 수퍼우먼이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원하는 바를 잘 생각해 중요도를 설정해야 하죠."

―전통적인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사회 활동에 반대는 없었나요?

"저희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습니다. 집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공부를 한다는 자체를 반대하셨습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웠던 건 아닙니다. 오빠와 남동생은 영국 유학도 보냈습니다. 전 그들보다 성적이 좋았지만 딸이란 이유로 거부당한 것이죠. 결국 전 장학금을 받고 저 혼자 힘으로 영국 유학을 갔습니다. 아마 서구 가정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무슬림, 아시아 가정이기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제 자식들의 양육을 부모님이 전적으로 도와주시는 것이죠. 이 역시 서구 가정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시아 워킹맘들은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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