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에 사로잡힌 '버냉키 추종자들'

    • 스티븐 로치 예일대 경영대 교수

입력 2015.05.09 03:03

세계경제는 위험한 망상(妄想)에 사로잡혀 있다. 1990년대의 대호황이 대불황으로 전환될 무렵, 정책 당국은 낡은 금융 공학에 의존해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불균형에 빠져버린 세계경제를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실험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정책 당국은 이 실험이 통제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이는 완전한 착각이었다.

전후(戰後) 일본의 부상과 추락은 그 전조(前兆)였다. 일본의 성장 신화는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한 정책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1985년 미국과 유럽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이 중상주의적 환율 정책을 포기하도록 압박하자, 일본 은행은 공격적인 통화 팽창 정책으로 대응했고, 이는 거대한 자산·신용 거품으로 이어졌다.
망상에 사로잡힌 '버냉키 추종자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그 이후부터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거품이 붕괴하면서 일본 경제도 급속히 추락한 것이다. 그동안 거품경제에 가려져 있던 생산성 악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일본 경제는 경기 회복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일본은 여전히 불균형과 씨름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아베노믹스(경기 회복을 위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의 정책 과제인 '구조적 개혁'을 수행할 능력이 없거나 그럴 의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접근 방식이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이와 같은 구조적 문제를 고치기 위해 계속 비슷한 통화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이코노미스트들이 작성한 반기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는 앨런 그린스펀과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지도하에 미국 거시경제 안정화 정책의 청사진이 됐는데, 그 핵심 전제는 일본의 통화·재정 당국이 너무 소심하게 움직여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일본의 거품과 구조적 불균형은 문제로 보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이 좀 더 빨리, 좀 더 강한 부양책을 썼더라면 미약한 성장과 디플레이션 등 '잃어버린 10년'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국의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이른바 '큰 바주카포(대규모 유동성 공급)'의 핵심인 속도와 물량에 집중하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일본병(病)의 돌연변이가 확산된 것이다. 양적 완화 정책을 활용해 유동성을 주입하자, 통화정책의 전달 경로가 금리가 아니라 자산 및 통화 시장으로 옮겨갔다. 중앙은행들이 정책 금리를 '제로 금리'로 바꿨기 때문이다.

양적 완화 정책의 옹호자들은 이런 상황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조정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자산 시장에 돈을 풀면서 '부의 효과(wealth effect·보유한 자산의 가치를 높여서 전체 부의 수준을 높이는 효과)'를 일으키는 방법이나 통화 가치 절하를 통해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방법 등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이 생긴다. 부의 효과나 환율 효과는 금융 위기 이후의 경제를 뚜렷한 회복으로 이끄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성을 더 강화하는 새로운 불균형을 낳았다. 이 때문에 세계경제는 계속되는 경제 위기의 위험에 처해 있다.

경기 회복의 대표 사례로 알려진 미국을 생각해 보자. 연준이 새 대출을 늘리기로 결정하면서, 연준이 시장에 푼 돈은 2008년 1조달러에서 2014년 가을 4조5000억달러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기간 미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고작 2조7000억달러 늘어나는 데 그쳤다. 나머지 8000억달러는 금융시장으로 유입돼 미국 주식시장의 덩치를 3배로 불려 놓았다. 미국은 이 기간 보통 수준 이하의 회복세를 보이며 실질 GDP 성장률이 2.3%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경기 회복기의 평균 성장률 4.3%보다 2%포인트 낮은 것이다.

실제로 연준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투입했지만, 2008~2009년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미국 소비자들은 회복하지 못했다. 실질 개인 소비 지출은 지난 7년간 고작 연평균 1.4% 늘어났다. 당연하게도 양적 완화의 효과는 대부분 주식을 보유한 부유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사면초가에 몰렸던 중산층들에게 부의 효과로 인한 혜택은 거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어쩌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시장에 기반한 경제 체제는 지금까지 오랜 기간 절묘한 자기 회복 작용을 보여줬다. 하지만 금융 위기 직후 미국 정부가 구제 금융을 시행하고, 연준이 자산 가격을 의도적으로 조정한 뒤로는 이런 회복 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국이 보통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는데도, 다른 나라는 미국식 금융정책을 따라 하고 있다. 유럽은 막 양적 완화를 시행하겠다고 나섰고, 일본 역시 더 새롭고 강력한 양적 완화를 시행했다. 사실 애초에 이 모든 일이 일본의 잘못된 통화정책 때문이었는데, 오히려 일본은 '당시 더 강력한 통화정책을 폈어야 했다'는 미국의 잘못된 해석에 따라 여전히 통화정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급등하는 주식과 통화 약세로 인한 심각한 체계적 위험으로 이어진다.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과도한 유동성을 제공하는 방안을 시행하면, 다른 국가의 중앙은행도 이를 따라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자산 거품의 위험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통화가치 절하 경쟁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 정치인들은 현 상태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눈앞에 닥친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무엇이 이런 식의 연결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구조 개혁이 중국의 전략적 목표이자 정답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성장세 둔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우려하고 있지만, 사실은 거시 경제정책 과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최고 지도부가 선진국들의 지도부보다 더 현실적이고 건설적인 진단을 내린 듯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정책 논의는 금융 위기 이후로 모조리 뒤집혔다. 이는 잠재적으로 아주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금융 공학에 의존하면서 구조적인 변화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건강한 회복을 위한 옳은 방안이 아니다. 반대로 더 큰 자산 거품, 또 다른 금융 위기, 그리고 일본식 장기 침체를 불러올 것이다.

감수=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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