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서양 사극에 자주 나오는 결투 장면 그것은 그들에게 '신의 재판'이었다

    • 박종호 오페라 평론가(풍월당 대표)

입력 2011.12.24 03:01

박종호 오페라 평론가

알랭 드롱의 잘 알려진 영화 '태양을 가득히'를 리메이크한 영화 '리플리'에 보면, 내일 친구를 죽이려고 계획한 맷 데이먼이 오페라극장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극장에서 보는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이다. 그 오페라 중에서 오네긴과 렌스키가 눈밭에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지만 오해와 질투 그리고 충동으로 인하여 결투를 벌이고, 오네긴은 친구 렌스키를 죽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

서양을 무대로 하는 사극에는 결투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밤낮으로 총을 겨누는 서부(西部) 활극이 아니더라도 그러하다. 대체 결투란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법이나 경찰 또는 재판이란 것이 없었던가? 왜 그들은 걸핏하면 결투를 벌일까?

오페라에서도 결투는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을 배경으로 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일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투리두는 애인 산투차 대신에 이미 시집갔던 옛 애인 롤라와 다시 사랑의 정염을 불태운다. 투리두의 마음을 롤라에게 빼앗긴 산투차는 그 사실을 롤라의 남편 알피오에게 알린다. 이에 알피오는 투리두를 찾아오고,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직감한 투리두가 시칠리아의 풍습대로 먼저 알피오의 귀를 물어뜯어 결투를 신청한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리고 결투 전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는 투리두는 낮술을 마시고는 홀어머니에게 "혹시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산투차를 딸처럼 보살펴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결투장으로 떠난다. 그리고 투리두는 결투에서 젊디젊은 인생을 하직한다.

왜 그들은 결투를 했을까? 우리 상식으로 보자면, 언쟁을 먼저 하거나 고발을 해서 재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결투로 승자를 가린다. 즉 그들에게 결투는 '신의 재판'이다. 결투의 결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투리두가 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그의 불륜을 징벌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대신에 알피오가 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롤라와 투리두에게 새로운 사랑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판사에게 판결을 신청하기보다는 더욱 권위 있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의 판결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런 시칠리아의 전통이 그 자리에서 적을 응징하는 마피아 같은 문화를 탄생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두 사람이 시비를 가려야 할 때에 한쪽이 여자일 경우라면 어떡하는가? 이때 여성은 결투를 하지 않으며 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녀를 대신할 다른 기사를 지정해 내세울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술자리에서 흔히 등장하는 '흑기사'와 같은 것이다. 실제로 그런 형태의 기사가 여성을 대신해서 결투에 나서곤 했다. 독일을 배경으로 한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보면, 살인의 누명을 쓴 엘자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자신을 대신할 기사를 보내달라고 하늘에 기도를 올린다.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기사가 등장하여, 그녀를 고발한 텔라문트와 결투를 벌인다. 기사는 텔라문트를 한 칼에 쓰러뜨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엘자의 결백을 믿는다.

그 외에도 결투가 나오는 오페라로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이 있다. 카를로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원수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원수를 발견했을 때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두 자루의 칼 중 하나를 원수에게 주고 당당하게 그와 결투를 벌인다. 역시 응징의 결과를 인간의 힘이 아니라 신의 뜻에 맡기는 것이다. 그 외에도 구노의 '파우스트',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등에도 모두 결투가 나온다.

물론 그 당시에도 결투는 대부분 불법이었다. 그래서 결투가 끝나면 이긴 자는 보통 도피나 망명을 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재판은 멀리 있고 결투는 가까웠다. 그러니 결투를 다만 싸움이나 폭력으로만 볼 수는 없다. 결투는 그들의 오랜 신앙과 풍습 속에서 다듬어진 문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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