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이별을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추방은 사색의 원천이며 창작의 조건

    •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 풍월당 대표)

입력 2011.12.10 03:02

박종호 (정신과 전문의, 풍월당 대표)
유럽의 역사나 문학을 원작으로 쓰는 오페라를 보면 '추방(追放)'이라는 말이 적지 않게 나온다. 인물이 결정적인 죄를 저질렀을 때, 종종 국가나 사회는 그에게 추방이라는 형벌을 내린다.

하지만 현대에 그것을 바라볼 때면, "추방이 그렇게 중형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았던 중세의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경우, 추방은 아주 끔찍한 벌로 여겨졌다. 당시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가 거의 한 세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개인은 한 도시나 그 부근에서 태어나 도시의 혈연과 지연 속에서 성장하고, 도시에서 자신의 사회를 이루면서 평생 그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갔다. 그런 그들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사실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정치적으로나 경제·사회·문화적으로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페라에서도 추방이 자세히 그려진다. 잘 알려진 예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들 수 있다. 로미오는 다툼 끝에 줄리엣의 사촌 오빠인 티볼트를 죽이게 되고, 로미오에게는 고향인 베로나를 영원히 떠나라는 추방령이 내려진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면 베로나 시내에 더 이상 로미오의 모습이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별을 앞둔 로미오와 줄리엣은 부득이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게 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는 너무나 많지만, 특히 잘 알려진 구노의 오페라에서 이 장면은 눈물을 참기 어려울 정도의 감동적인 이별로 그려진다. 함께 첫 밤을 지낸 두 사람이 새벽을 맞자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로미오가 "아침의 전령인 종달새다"라고 말하자, 그를 보내기 싫은 줄리엣은 "사랑의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이라며 그를 놓지 않는다. 이렇게 로미오의 추방은 바로 가족·친구·연인·사회와 영원한 격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추방을 그린 오페라는 무수히 많다. 베르디의 '포스카리가(家)의 두 사람'의 첫 장면은 크레타로 추방되어 있던 야코포가 조국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해상(海上)에서 고향을 본 그는 "여기는 나의 도시, 나의 바다. 그대는 나에게 가혹하였으나, 그대는 영원히 내 가슴에 남아있다네"라고 감격적인 테너 아리아를 부른다. 그 외에 베르디의 '돈 카를로' '에르나니' '운명의 힘', 바그너의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에서 모두 추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엄밀히 추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고향을 잃은 망명의 시련이 로시니의 '모세', 베르디의 '나부코' '운명의 힘', 푸치니의 '투란도트', 조르다노의 '페도라',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등에서 보인다.

그러면 추방된 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권력에서 쫓겨나고 사회를 잃은 그들은 대신 예술과 학문을 찾았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고 단테는 '신곡'을 완성한 일은 유명하다. 권력 대신 예술을 찾은 것이다. 누구나 은퇴한 이후에 예술을 찾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추방은 우리 역사에도 있었으니, 많은 관리가 귀양 간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를 쓰고 관료에 발탁된 그들이지만, 관직에 있는 바쁜 동안에 시를 쓰기는 힘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들은 졸지에 귀양을 가게 되는, 즉 추방자 신세가 된다. 그러면 귀양지에서 시간이 많아진 그들은 비로소 자연을 벗 삼게 되고 진정한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귀양을 간 대표적인 인물인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책 수백 권과 2000수 이상 시를 남겼다. 귀양을 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분량일 것이다. 윤선도와 김시습의 문학도 추방지나 망명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서양음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많은 예술가가 망명지에서 창작의 불꽃을 지폈다. 폴란드를 떠난 쇼팽이 조국을 그리면서 이역만리 파리에서 많은 명곡을 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헨델, 하이든, 베토벤, 브람스, 말러 등이 모두 고향을 떠나서 객지에서 성공한 예술가였다. 그 외에도 쇤베르크, 힌데미트,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아이슬러 등이 모두 나치로부터 추방당한 음악가다. 추방이야말로 사색의 원천이며 창작의 선결조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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