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무대 위 미친 여인들… 그 황홀한 광란

    • 박종호·오페라 평론가(정신과 전문의)

입력 2011.09.03 03:01

박종호·오페라 평론가(정신과 전문의)
오페라에 좀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면 무대의 주인공이 정신병적 상태, 즉 광란(狂亂)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 오페라에는 흔히들 '매드신(mad scene)'이라고 부르는 '광란의 장면'들이 적지 않다.

'광란의 장면'은 주로 주인공을 맡은 소프라노들이 부른다. 그리고 그녀들은 극중의 아주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겪는 상황에서 감정의 고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광란의 상태를 보인다. 그래서 19세기 초반 유럽의 오페라하우스들에서는 이곳저곳 모두 미쳐버린 여자들로 넘쳐났던 적이 있었다.

광란의 장면은 오페라 역사상 중요한 현상 중 하나다. 그것은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모두 그러했다. 문학적으로 광란의 상태에서는 인간 내면의 심리를 낭만주의의 환상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절묘하고 기괴한 성악적 기교들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즉 어려운 트릴(trill·어떤 음을 연장하기 위하여 그 음과 2도 높은 음을 교대로 빨리 연주하는 것)과 아주 높은 고음을 구사하는가 하면 다양한 콜로라투라(coloratura·기교적으로 장식된 선율) 기교들을 펼치는 장면이 됐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점차 화려한 광란의 장면을 기다리게 됐고, 소프라노들은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이 가진 비장의 기교를 사용하고 이름을 날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 이유로 극장 측도 광란의 장면을 조장했고, 작곡가들은 그런 관객과 극장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래서 광란의 장면에서 소프라노들은 정신적인 여러 광란 상태, 즉 착각·환각·망상·기억상실·초조·불안·몽유병 상태 등을 표현했다. 광란의 장면은 17세기에 시작됐다.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중에서 헨델의 '아리오단테'나 '오를란도' 그리고 비발디의 '광란의 오를란도' 등이 유명했다. 19세기 전반부터 '광란의 장면'이 대유행, 1820년경부터 이른바 '위대한 광란의 시대'가 펼쳐지게 됐다.

잘 알려진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이 시대에 나온 '광란의 장면'의 대표적인 예다. 스코틀랜드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은 원수 집안 간의 두 남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람메르무어 가문의 처녀 루치아와 레벤스우드 가문의 청년 에드가르도는 남몰래 사랑하고 있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 그들의 사랑을 눈치 챈 루치아의 오빠는 에드가르도가 루치아를 배신한 듯이 정황을 꾸며, 루치아가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승낙하도록 만든다. 그러다가 루치아는 결국 그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결혼계약서에 서명을 한 이후여서 물릴 도리가 없었다. 오빠의 강권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만, 에드가르도가 배신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안 이상 그녀는 새신랑을 안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첫날밤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랑을 순간적으로 과도(果刀)로 찔러 죽이고 만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채 그녀가 밖으로 나오면, 아직도 하객들은 피로연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들 앞에서 루치아가 '광란의 장면'을 펼치게 된다. 20분간이나 펼쳐지는 광기 속에서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을 기막히게 표현한다. 이 장면에서 루치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는 어렵기 짝이 없는 기술을 과시하게 된다.

대부분 광란의 장면들은 소프라노가 가장 슬퍼해야 하는 장면에서 라멘토(탄식) 대신에 부르게 된다. 이것은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맥스의 하나가 된다. 광란의 장면이 나오는 중요한 오페라들로는 벨리니의 '청교도', '몽유병의 여자'·'해적'·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샤모니의 린다'·베르디의 '맥베드'·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토마의 '햄릿'·구노의 '파우스트'·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와 '엘렉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극한적인 광란 상태를 전면에 내세워, 인간 심리의 내면을 엿보려고 했던 것은 당시 오페라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또한 그런 오페라를 통해 우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이해와 연민을 느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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