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오페라에 나오는 의사들은 왜 하나같이 추악할까

    • 박종호·정신과 전문의(오페라 평론가)

입력 2011.10.29 03:23

잘난 체하는 욕심쟁이로 그려져 존경받는 의사는 가뭄에 콩 나듯
우리와 선배들이 저질러온 행동… 스스로 반성하는 거울로 삼아야

박종호·정신과 전문의(오페라 평론가)
몇 년 전 의사들로 구성된 한 학회로부터 "오페라에 나오는 의사상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이디어는 참신했지만 "오페라에서 의사들을 좋게 그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하며 사양했다. 그랬더니 주최 측에서는 "그래도 뭐 괜찮은 게 조금이라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번에는 단호하게 "전혀 없다"고 했더니 그쪽에서도 오기가 발동했는지 "뭐든 좋으니 해 달라"고 답이 왔다. 그래서 '정 그렇다면 해주겠으나 결과는 모른다'는 심정으로 응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끄러웠다. 점잖던 의사 선생들은 단순한 분노에서 부정, 초연에 이르는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오페라에서 의사들은 결단코 호의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의사들에게 있다.

일단 오페라에서 의사들은 잘난 체하는 대표적인 집단으로 그려진다.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에 보면 스피넬로치오 박사라는 나이 많은 의사가 나온다. 그는 왕진을 와서도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다. 볼로냐 의대를 나왔다고 학벌을 자랑한다. 환자는 이미 죽었는데도, 그는 자기 환자는 여태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고 큰소리친다.

오펜바흐의 '호프만의 이야기'에는 미라클 박사라는 의사가 등장한다.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한다. 한 성악도는 노래를 하면 몸이 상해 죽는 병이 있는데도, 의사는 그 성악도에게 노래를 시켜 결국 그녀를 죽게 만든다. 도니체티의 '돈 파스콸레'에 나오는 말라테스타 박사는 자신이 주치의를 맡아 알게 된 늙은 부자와 친하게 지낸다. 급기야 그에게 "젊은 처녀와 결혼시켜주겠다"고 속이면서 그의 재산을 마음대로 유용한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 등장하는 바르톨로에게서도 의사로서 사회적 책무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는 오직 자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려고 동분서주한다. 그것도 사랑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지참금에 눈이 어두워서다. 게다가 이 인물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다시 나타나 남의 행복을 방해하고 복수를 꾀하는 치졸한 인물로 그려진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자기밖에 모르고 속 좁은 의사밖에 없을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의사를 오페라에서 찾기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한다.

18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지성인이라고 대우받는 몇 개 되지 않는 직업군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자, 시인(예술가), 성직자 그리고 의사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진정한 학자, 예술가, 성직자보다는 명예와 돈과 권력을 탐하는 교수, 예술로 장사하는 사람, 생업으로 종교를 선택한 자가 더 많이 눈에 띄지 않는가? 지금 주변에서 존경할 만한 의사를 만나면 반가울 정도다.

지난 400년 동안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표해 온 오페라가 의사들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에 의사들은 눈살을 찌푸릴 것이 아니다. 우리와 선배들이 저질러온 행동에 대한 외면할 수 없는 묘사인 것이다. 의사들은 그런 오페라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그런 묘사를 직시하고 오페라를 자신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유럽 사회는 의사란 직업에 경외심을 보내고 있다. 이름 앞에 '미스터(Mr.)' 대신에 '닥터(Doctor)'라고 붙이면, 오페라하우스의 예약이 더욱 용이한 아이러니를 본다. 왜일까? 비록 그런 의사들이지만 언젠가는 그들이 가진 의술과 지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헌신할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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