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남용 무섭다고 돈 푸는 정책 반대해서야

    • 아데어 터너(전 영국금융감독청장)

입력 2016.05.14 03:06

정치적 이용 당할까봐… '헬리콥터 머니' 반대?
日, 부양책 피하다가 국가 부채 폭증 사태

아데어 터너(전 영국금융감독청장)
아데어 터너(전 영국금융감독청장)
글로벌 경제가 저(低)성장에 직면하자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전(前) 의장과 브래드 드롱 미 버클리대 경제학과 교수(전 재무부 차관보)는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 화폐를 발행해 민간에 직접 공급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을 민간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하는 정책이라 '헬리콥터 머니'라고 불렀다.

이런 주장은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미하엘 하이세 독일 알리안츠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경제 자문이자 아베노믹스의 설계자로 알려진 하마다 고이치(浜田宏一) 예일대 명예교수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나는 하이세 이코노미스트와 하마다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한 정책이 남용으로 이어질 위험성이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그런 위험을 방지할 규칙과 책임을 고안할 수 있는가이다. 나는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 필자가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발권력을 이용한 정책의 효과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정책은 채권 발행을 통한 재정 확대나 마이너스 금리와 같은 다른 정책이 효과가 없을 때에도 명목 수요를 진작시킬 수 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이러한 효과는 적절하게 조절될 수 있다. 지나친 확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만, 적절한 선에서는 산출량이나 물가에 효과적인 자극을 줄 수 있다.

만일 이와 같이 창출된 통화가 재정 지출 확대보다 감세를 위해 사용된다면 정책 효과는 민간이 얼마나 소비하고 저축하는지에 좌우된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마이너스 금리는 시중 은행의 경영을 압박하고, 대출을 빠르게 증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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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머니를 반대하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논리는 정치인들이 이 정책을 남용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환심을 사거나 선거에 앞서 경기를 과도하게 부양하기 위해 정책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당연히 우려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많은 개발도상국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중앙은행에 압력을 넣어서 거대한 규모의 재정 적자를 만든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피할 수 없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발권력을 이용한 재정 확대가 어떤 경우에는 최선일지라도, 이 정책의 남용으로 인한 위험이 크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타당성 있는 주장이 반드시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수요를 진작시키기 위한 정책들이 실행되지 않아서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 역시 인플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의 당선으로 무너진 1932년은 (인플레이션 시기가 아닌) 갑작스럽게 물가가 하락하던 시기였다. 또 2008년 금융 위기가 발생한 근본 원인은 민간 부문의 과도한 신용 확대였다.

만약 우리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마이너스 금리라면, 앞으로 2008년 같은 과거의 실수가 반복될 수도 있다.

통화 정책의 정치적 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예를 들어, 벤 버냉키 전 의장은 중앙은행이 명시적으로 설정된 물가 목표치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경우, 정책의 최대 규모를 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 반대론자들은 브라질의 거대한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 사례들을 예로 들며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을 버틸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파멸에 이르는 길'이며, 오직 해당 정책의 전면적인 금지만이 더 느슨한 규칙을 적용하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중앙은행(ECB)이나 영란은행, 연준 등에 독자적인 화폐 공급 승인권을 줄 경우, 그 독립성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정책이 실행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치적인 시스템이 믿을 수 있고, 절제력이 적절하게 유지되느냐는 점이다.

하마다 교수는 1930년대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일본 재무상 암살 사건을 언급하며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카하시 재무상은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헬리콥터 머니와 비슷한) 재정 지출 확대 정책을 실행했다. 그의 정책은 일본 경제의 디플레이션을 종식시키고 수요를 늘리는 데 성공해 경제성장률이 높아졌다.

하지만 산출량과 인플레이션이 적절한 수준으로 돌아온 후에 다카하시가 긴축을 시도하자 당시 일본 제국의 확장을 위해 무제한적인 재정 확대를 원했던 군국주의자들이 다카하시를 암살했다.

만약 다카하시가 (정책을 쓰지 않고) 디플레이션을 그대로 뒀다면, 독일 사례와 같이 일본의 입헌 시스템 자체가 무너졌을 것이다. 또한 다카하시가 (화폐 공급 정책이 아닌) 마이너스 금리를 사용해 경제를 살리려 했고, 그 정책에 제한을 뒀어도, (군국주의자의 반발이라는) 결과는 동일했을 것이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한 재정 확대를 금지할 경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 앞에서 민주주의, 혹은 법에 의한 통치를 지켜낼 수 없다. 반면, 원칙에 입각한 적절한 수준의 정책 수행은 디플레이션 압력을 이겨냄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책을 무조건 금지할 게 아니라, 그 정책을 책임감 있게 쓸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다짐해야 한다. 말만 그럴싸한 대체 정책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통화 완화 정책이 아니다. 심지어 이러한 (대체) 정책들도 너무 늦게 실행되고 있다.

일본이 대표적이다. 일본처럼 너무 오랫동안 통화 완화 정책을 피한다면 공공 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50%나 된다. 만약 일본이 2003년 벤 버냉키의 조언대로 재정 경기 부양책을 실행했다면, 오늘날 일본은 물가는 조금씩 상승하면서 부채는 줄어드는 효과를 봤을 것이다.

일본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정치적인 위험을 완화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든 후, 기술적으로 효과가 있는 통화 정책을 실행시키는 편이 정책을 전면 금지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위험이 존재한다고 통화 정책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것은 미래에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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