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휘두르는 대기업 본사는 나쁜 보스와 같아… 알면서도 고치기 힘든 이유는 '자기 통제' 못 해서

입력 2016.02.20 03:05

'경영 혁신가' 줄리언 버킨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의 조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보안 소프트웨어 기업 이데토(Irdeto)는 1997년 중국 베이징에 지사를 세웠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아시아 시장에서의 성과는 미미했다. 2007년 당시 이데토의 최고경영자(CEO) 그레이엄 킬(Kill)은 이유를 분석해 봤다. 지나치게 본사에 권한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사 직원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고, 베이징 지사 직원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본사에 넘겨버렸다. 본사는 멀리 있는 시장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의사 결정을 내렸다. 이데토처럼 본사에 힘이 과도하게 편향돼 회사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현상을 줄리언 버킨쇼(Birkinshaw·52)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본사증후군(Headquarters Knows Best Syndro me)'이라고 불렀다.

줄리언 버킨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줄리언 버킨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경영 혁신가로 불리는 버킨쇼 교수는 30여년간 대기업의 경영 문화를 연구해온 학자다. 그는 2011년 저서 '리인벤팅 매니지먼트(Reinventing Management·국내 미출간)'에선 CEO들이 장기적인 결과는 고려하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경영 시스템 때문에 회사에 위기가 발생한다고 봤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CEO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주는 경영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며 '경영 재창조(reinvent)'를 주장했다.

2013년에는 '더 좋은 보스 되기(Becoming a Better Boss·국내 미출간)'라는 책을 통해 좋은 보스와 나쁜 보스에 대해 다뤘다. 버킨쇼 교수는 이 책에서 팀원들에게 의사 결정 권한을 주지 않고, 본인이 갖고 있는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것을 나쁜 보스의 성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국적 대기업들이 흔히 겪고 있는 본사증후군을 나쁜 보스 성향의 확장판이라고 봤다. 직원들이 나쁜 보스로 꼽는 성향들과 본사증후군을 겪고 있는 지사 직원들이 묘사한 본사의 성향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버킨쇼 교수는 지난 5년간 스위스 IMD경영대학원의 시릴 부케(Bouquet) 교수와 함께 수행한 본사증후군 사례 연구를 올해 초 발표했다.

버킨쇼 교수는 2013년, 2015년에 세계 경영 사상가 목록인 '싱커스(Thinkers) 50'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게리 해멀(Hamel)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와 함께 차세대 기업 구조와 경영 문화를 연구하는 비영리 연구소인 '엠랩(MLab)'을 설립해 제너럴일렉트릭(GE), 리오틴토, 에릭슨, UBS, SAP 등 100곳이 넘는 글로벌 기업 경영진에 조언하고 있다.

본사가 지나치게 힘 세면 장기적 성장 저해

―결국 네덜란드 이데토의 킬 CEO는 본사증후군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방식의 대응이 가능했습니까.

"킬 CEO는 본사에 과도하게 편향된 집권적 경영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본사를 2개 세운 것입니다. 네덜란드 본사는 그대로 두고 베이징 지사를 본사로 격상시킨 후 킬 CEO 스스로가 가족과 함께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킬 CEO가 중국 본사를 만들면서 다른 임원들에게 '당신들 먼저 가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CEO가 가장 먼저 비행기를 탔습니다. 남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CEO부터 희생을 한 것이죠. 다른 임직원들은 몇 개월의 시간을 주고 원하는 사람만 중국 본사로 이동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데토가 베이징 본사를 세운 뒤의 성과는 뛰어났다. 베이징 본사 직원들은 점점 자신감을 갖고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 본사도 회의에서 새 아이디어가 나오면 베이징 본사의 의견을 묻고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회사도 성장했다. 2007년에는 7000만달러였던 매출이 2011년에는 2억1500만달러로 세 배가 됐다. 아시아 시장 매출은 2009년 36%, 2010년 70% 증가했다. 유럽 지역에선 혁신적인 기업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이데토 케이스의 해결책은 다소 과격한 것으로 보이는데, 나타난 성과는 아주 좋아 보입니다. 이 성과는 본사증후군을 없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본사와 지사 간의 수직적 상하 관계는 주로 신흥국 시장에서 발을 넓히려는 지사에 악영향을 줍니다. 지사는 자신감이 떨어집니다. 도전적이 아니라 방어적이 됩니다. 본사 경영진이 해외 순방을 할 때면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지사들끼리 눈치 보고 경쟁하게 됩니다. 독일에 본사를 둔 한 기업의 멕시코 지사 임원은 '지사 사람들은 의존적으로 일하도록 훈련받는다. 안주하게 되고 본사의 눈치를 보느라 스스로의 잠재 능력을 억누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모든 기업이 지사를 본사로 격상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사증후군이 발생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개선하려는 경영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독일 회사 SAP는 연구·개발(R&D) 조직을 아예 분리시켜 인도·중국·이스라엘에 R&D센터를 세웠습니다. 일본 제약회사 다케다는 미국 화이자와 일라이 릴리,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등 해외 제약사 출신의 연구원들을 고문으로 대거 채용했습니다. 기업마다 제각각의 규모와 사업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나쁜 보스에 대해서 연구해 오셨는데, 본사증후군이 나쁜 보스의 연장이란 점은 다소 비약이 아닐까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임원들 500명에게 물어봤더니 90%는 본사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본사증후군이 이렇게 퍼져 있는데도 기업들이 당장 고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본사 경영진이 '나쁜 보스'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본사는 의사 결정을 내리고 지사에 이미 결정된 사항을 통보하고 주문합니다. 지사가 실수를 저지르면 본사가 징벌합니다. 지사가 잘하면 본사 CEO가 좋은 평가를 받지요. 지사의 새로운 의견은 본사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이것은 나쁜 보스의 성향과 유사합니다. 부하 직원에게 의사 결정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고, 팀원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것이지요."
그래픽 나의 보스는 나쁜 보스일까
그래픽=김의균 기자
머리로는 알아도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워

―나쁜 보스의 성향이 회사 차원의 문화가 된 것이 본사증후군이란 견해이십니다. 결국 '나쁜 보스'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나쁜 보스와 좋은 보스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걸출한 CEO였던 스티브 잡스는 직원들에게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일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고집대로 밀어붙이고, 실패를 용납하지 않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애플 창업 초기 시절 잡스와 함께 일했던 데비 콜먼은 '잡스가 회의 때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혼내고 윽박질러도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행복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애플과 일했던 제프 레스킨은 잡스와 일하는 걸 견디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는 '잡스는 생각도 없고 판단력도 흐린 최악의 매니저'라고 평가했어요. 잡스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나쁜 보스의 성향을 갖고 있지만 그의 완벽주의자적 성격,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은 직원들을 자극해 더 동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결국 '좋다' '나쁘다'는 평가는 직원 개개인의 일하는 방식이나 인내심, 회사 분위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에겐 좋은 보스가 다른 사람에겐 나쁜 보스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리더십을 단편적으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절대적으로 나쁘거나 절대적으로 좋은 보스는 없는 것입니까.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팀원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지 혹은 좋은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선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다고 봅니다. 10개 글로벌 대기업의 중간 관리자 이하 직원들 1000여명을 상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직원들이 나쁜 보스로 평가한 사람들은 대체로 중요한 정보가 있어도 공유하지 않고 혼자 알고 있으려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또 목적이나 비전, 계획에 대해 명확히 의사 전달을 못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 재빨리 징벌하는 관리자가 나쁜 보스로 꼽혔습니다. 반대로 팀원들에게 의사 결정 권한을 주고 팀원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 또 팀원들의 장점과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관리자들은 좋은 보스로 꼽혔습니다."

―좋은 보스의 자질이란 게 꽤 뻔한 얘기 같습니다.

"뻔한 얘기 맞습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까요. 좋은 보스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자질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좋은 보스가 되기 위해서 갖춰야 할 자질 혹은 나쁜 보스의 악습관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다 아는데도 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지를 깨닫는 게 중요한 겁니다. 좋은 보스가 되기 위한 행동들은 사람의 본성에 어긋나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행동(unnatural act)'입니다."

―본능에 어긋나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게 장기적으로 가능한 얘기입니까.

"수십 년 일해 높은 위치에 오른 간부급들은 오랫동안 겪은 것을 바탕으로 한 업무 방식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경영학자들이 '좋은 보스가 돼야 한다'고 말을 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2010년 댄·칩 히스 형제가 쓴 '스위치'라는 책이 있었지요. 코끼리를 탄 사람은 이미 저 멀리 가 있는데, 코끼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코끼리를 탄 사람은 우리의 머리고, 움직일 생각 없는 코끼리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감성입니다. 리더들이 자기 통제, 자기 인식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위험을 회피하려는 본능을 통제하고 개개인에 다양하게 맞춘 리더십을 펼쳐가야 합니다."

미래 '좋은 보스'는 감성 지능 길러야

버킨쇼 교수는 올해 '패스트/포워드(Fast/Forward·국내 미출간)'라는 책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이번 책에서는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정보가 주는 혜택과 한계를 이해하고 기업들이 민첩한 경영 구조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킨쇼 교수는 전통적 관료제와 달리 체계가 없어 유연성과 융통성이 높은 특수 임시 조직과 같은 '애드호크라시(adhocracy)'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애드호크라시는 즉석, 임시라는 뜻의 'adhoc'와 체제, 통치라는 뜻의 접미사 '-cracy'가 합쳐진 단어다.

―미래에 관한 책을 쓰고 계십니다. 20년 전 좋은 보스가 미래에도 여전히 좋은 보스로 여겨질까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조직 내 관리자들의 역할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관리자들뿐만 아니라 말단 직원들도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과거 관리자의 역할이 기업 내부의 정보를 팀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팀원들을 잘 관리하는 역할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직원들과 감정적인 관계를 맺고 또 그들에게 동기를 불어넣는 리더의 역할은 앞으로도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미래 사회에서 더 중요해지는 리더로서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감성(感性) 지능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수용하고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죠.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걱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중요한 기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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