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의 무를 여러 명이 뽑았다면 각자의 기여도 평가는 사실상 불가능

입력 2015.08.29 03:05

애들러 美 컬럼비아대 교수 '생산물 가치만큼 받는다는 임금이론'에 반론

임금격차 문제있다
데이비드 리카도·애덤 스미스 "임금은 관습·협상력에 좌우"

미국 정책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2005년 미국 기업 경영진의 평균 연봉과 일반 생산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 간 격차는 400대 1이 넘었다. 1990년보다 격차가 4배 이상 벌어졌다.

작년엔 최고경영자(CEO) 연봉이 직원 임금의 2000배에 육박하는 기업까지 등장했다. 기업 정보 사이트 글래스도어는 이달 28일 미 S&P500 기업의 CEO 보수와 일반 직원들의 연봉 중간값 비율을 집계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CEO와 직원의 임금 격차 비율이 가장 높은 회사는 1951대 1을 기록한 미디어 업체 디스커버리 커뮤니케이션즈였다. 작년 이 회사의 직원 연봉(중간값)은 8만달러였으나, 데이비드 차슬라브(Zaslav) CEO의 보수는 1억5600만달러(약 1850억원)에 달했다.

모셰 애들러 컬럼비아대 교수
모셰 애들러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저 임금을 올린다고 해도 일자리가 꼭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CEO와 직원의 임금 격차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이달 초 2017년부터 상장사가 CEO와 직원의 임금 격차 비율을 공개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CEO가 일반 근로자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걸까? 현대 경제학에서는 누구나 각자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만큼 보상(임금)을 받는다. CEO가 한 해 수천만달러의 연봉을 받는 것은 CEO가 회사를 위해 수천만달러의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이고 일반 노동자가 수만달러를 받는 것은 그가 생산한 부가가치가 그만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CEO와 일반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임금 격차 문제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모셰 애들러(Adler·67)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는 저서 '경제학은 어떻게 내 삶을 움직이는가'에서 "개인이 각자 생산해낸 생산물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는 기존 임금이론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단언했다. 그의 책은 2010년 미국 독립출판 북 어워드에서 경제학 부문 금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직접 들어본 그의 이야기에는 '사회 통념을 고쳐야 한다' '기존 경제학은 잘못됐다' 등 다소 일방적인 부분도 있었다.

러시아 민담 ‘무 이야기’
러시아 민담 ‘무 이야기’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생산하는 팀 생산에서는 구성원이 각각 얼마나 생산에 기여했는지 측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들러 교수는 만나자마자 영문판 책에 들어 있는 작은 삽화를 가리켰다. 그는 느릿느릿한 말투로 러시아 민담을 들려줬다. "한 농부가 밭에 심었던 무를 뽑으려다가 실패했어요. 농부의 아내가 뒤에서 함께 당겼는데도 무가 뽑히지 않았어요. 아들딸, 다른 농장 사람들, 농장 동물들까지 모두 달라붙었지만 무는 꿈쩍도 안 했지요. 그러다 마지막에 생쥐가 와서 함께 당기니 무가 쑥 뽑혔죠."

―여러 사람이 협력해야 일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보입니다만.

"임금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를 뽑은 건 누구일까요? 모두 다겠죠. 그럼 각자 생산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는 이론을 적용하면 각각 얼마씩의 보상을 받아야 할까요? 여럿이 무 한 개를 생산해낸 과정에서 각 참여자가 얼마나 생산했는지를 수치로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령, 생쥐가 없었으면 무를 얻지 못했을 테니 생쥐가 생산한 것은 무 한 개입니다. 생쥐가 무 한 개를 생산했으니 생쥐가 무를 가져가야죠. 이는 농부를 포함한 다른 참여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무는 딱 한 개뿐이에요. 생쥐에게도 무 한 개를 통째로 주고 농부에게도 무 한 개를 주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팀 생산에서 개인이 생산한 것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면, 보상은 어떻게 결정돼야 하나요?

"고전파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Ricardo)는 임금이 '사람들의 습관과 관습(habits and customs of the people)'에 따라 정해진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 시대에 장시간 일하고도 금전적 보상을 안 해주는 분위기라면 적절한 임금을 못 받을 겁니다. 경영진이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라면 경영진의 연봉도 아주 높겠죠.

'국부론'을 쓴 또 다른 고전파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Smith)는 임금 수준은 노동자와 고용주(자본가)의 협상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고용주가 협상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현재 임금 격차는 노동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현 교육 시스템과 사회 분위기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리카도가 말한 '사람들의 습관과 관습', 즉 일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통념을 바꿔야 한다면 그건 경제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사회 운동의 영역이 아닌가요?

러시아 민담 ‘무 이야기’
러시아 민담 ‘무 이야기’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생산하는 팀 생산에서는 구성원이 각각 얼마나 생산에 기여했는지 측정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용주의 권력과 경영자의 천문학적 연봉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 경제학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수많은 노동자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빈곤에 시달리는 현실에서 은행 CEO가 하루에 100만달러 넘는 돈을 버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기존 경제 이론은 정부가 시장 자율로 결정된 임금보다 더 높은 최저임금을 강제하면 해고가 늘고 일자리가 줄어든다고 합니다만, 최저임금을 올린다고 해서 반드시 고용이 감소하지는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경영진의 고액 연봉과 최저임금 간 적정 격차 비율을 정하기 위한 논의도 필요합니다. 정부는 합의를 통해 정해진 비율을 법으로 명문화해야 합니다. 법을 강력히 집행해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는 것도 정부의 역할입니다."

―경영자의 연봉을 제한하면 경영 성과가 떨어진다는 지적 역시 있습니다.

"기존 경제학은 경영자의 연봉에 한도를 정해 일정 수준 이상 못 받게 하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합니다. 경영자가 전보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더 편한 자리를 찾아 회사를 떠날 거란 얘기지요.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연봉 수준과 근로 의욕은 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가령 1980년대 레이건 정부는 소득세 최고세율을 대폭 낮췄습니다. 세율이 낮아지면 세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죠. 그렇다고 고액 연봉을 받는 경영자의 근로 의욕이 높아지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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