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간의 변신… 화학기업 1위 '바스프 제국'의 비밀

입력 2015.05.16 03:03

화학비료도 청바지 염료도 비디오 테이프도 세계 최초, 그러나 센 경쟁자가 나타나자 과감히 손 뗐다… 그러곤 전혀 새로운 사업 발굴하고 스스로를 재창조했다 끊임없이…

지난 7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의 회관 16층 한국바스프(BASF) 서울 사무소. 쿠르트 복(Bock·57) 바스프그룹 운영이사회 의장 겸 CEO(최고경영자)가 회의실 문앞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의 장신인 그가 출입구를 다 가리는 듯했다. 짙은색 양복 상의 옷깃에 단 빨간색 회사 배지가 선명했다.

"먼저 들어가세요(After you please)." 복 회장은 시종일관 공손했다. 인터뷰 초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그는 기자가 정자세인 걸 본 후로는 끝날 때까지 긴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엘리베이터에 마지막에 탄 것도 복 회장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겸손한 그의 태도와 달리 바스프는 세계 화학 업계의 절대 강자다. 바스프는 지난해 매출이 743억유로(약 90조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화학 기업이다. 2014년 '포천 500대 기업' 리스트에서 전체 기업 중 75위, 화학 업종에선 1위였다. 영업이익은 71억9000만유로(약 8조8000억원)로 영업이익률이 9.6%에 이른다.

1865년 독일에서 설립된 바스프는 화학 업계의 혁신을 주도해왔다. 스티로폼, 자외선 차단제의 피부 보호 필터, 배기가스 정화 촉매, 기저귀에 들어가는 수분 흡수재 등이 이 회사의 실험실에서 발명됐다. 작년 한 해 연구·개발(R&D)비로 18억8000만유로(약 2조3000억원)를 투입했고, 같은 해 유럽 특허 출원 순위에서 전체 6위(화학업종 1위)였다. 올해로 창사 150주년을 맞는 장수(長壽) 기업 바스프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독일 루드비히스하펜에 위치한 바스프의 공장 단지는 200여개의 화학공장을 거미줄처럼 연결해 놓았다. 이를 통해 바스프는 한 공장에서 나온 부산물을 다른 공장의 원료로 사용하며 생산원가를 낮추고 있다.
독일 루드비히스하펜에 위치한 바스프의 공장 단지는 200여개의 화학공장을 거미줄처럼 연결해 놓았다. 이를 통해 바스프는 한 공장에서 나온 부산물을 다른 공장의 원료로 사용하며 생산원가를 낮추고 있다. / 바스프 제공

1등의 비결?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라

―오랜 시간 동안 성공적일 수 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스프는 긴 역사를 가진 조금은 늙은 회사지만, 아직도 가슴은 젊습니다. 우리는 창사 이래 비즈니스 방식을 계속 바꾸며 스스로를 재창조해왔습니다. 오늘날의 바스프는 1865년의 바스프와는 전혀 다른 회사입니다. 창사 당시엔 단지 하나의 제품만 생산했죠. 폐기물 취급을 받던 콜타르에서 가치 있는 화학제품인 염료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이후 회사는 지속적 혁신을 통해 변모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1885년엔 인디고를 처음으로 상용화했습니다. 인디고는 청바지의 파란색을 내는 염료입니다. 당시 바스프는 인디고 개발에 13년을 매달렸고 이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저는 현재 그런 짓은 안 하고 있습니다(웃음)."

―성공의 비결은 부단한 재창조란 말씀인가요?

"그렇죠. 재창조란 '우리가 여전히 경쟁력이 있나?' '우리가 하는 일을 시장이 원하는가?' '적용 가능한 더 좋은 기술은 없나?'란 질문을 계속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선 적정 수준의 위기감을 갖고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끊임없이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창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바스프는 세계 80여개국에 진출해 있지만 본거지인 유럽에서 매출의 절반을 올리고 있다. 생산 원가가 높고 성장세가 미약한 유럽 시장 의존 비중이 높은 것. 게다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빅(SABIC)이나 중국의 시노펙 등 신흥 시장에 기반을 둔 화학 기업들이 급격히 성장하며 바스프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이름들이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대처 방안은 무엇입니까?

"화학산업은 본래 경쟁이 치열한 곳입니다. 바스프는 늘 스스로를 재창조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장기적으로 경쟁자에 비해 경쟁력이 뒤처질 것으로 보이는 제품들에선 과감히 손을 뗐습니다. 102년 전 바스프는 세계 최초로 화학비료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2012년 화학비료 사업을 러시아 회사에 매각했습니다. 인디고 등 염료 제품 역시 더 이상 생산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더 잘 만들어낼 수 있는 경쟁자가 있는 제품은 비록 수익성이 있다 하더라도 미련 없이 빠져나온 겁니다.

화학산업에서 우리 회사가 가진 유일한 장기적 경쟁력은 혁신뿐입니다. 범용 상품이 돼버린 제품군에서 빠져나온 대신 우리는 전기차용 2차전지 산업, 화장품·기저귀의 기초 원료 등 새로운 산업에 진출했고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세계적 소비재 기업들이 만드는 기저귀에 우리가 개발한 초강력 흡수물질이 쓰이는 식이죠."

바스프가 스스로를 재창조해온 또 다른 예는 소비재 시장 철수다. 바스프는 오디오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를 발명한 회사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CD나 디지털 기기들이 등장하자 바스프는 1990년대 관련 산업에서 발을 뺐다. 이후 바스프는 소비재는 만들지 않는 순수 B2B(기업 간 거래) 기업으로 전환했다. 복 회장은 "미국 공항 입국 심사관에게 '바스프에서 일한다'고 했더니 '아! 테이프 회사에서 일하시는군요'라고 하더라"며 "소비재에서 손 뗀 지 2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테이프 회사로 각인돼 있더라"며 껄껄 웃었다.

―어떻게 하면 혁신적이 될 수 있습니까?

"바스프는 창립 당시부터 혁신 기반 기업이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창사 당시부터 우리가 대학 및 연구소와 협업을 통해 R&D를 했다는 점입니다. 창사 때부터 우리는 대학을 찾아가서 대학 실험실에서 발명된 것을 어떻게 하면 상용화할지 고민했습니다. 이는 우리뿐 아니라 19세기 독일 화학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하던 일이었고, 그 때문에 산업혁명의 후진국이던 독일이 19세기 말 화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회사 밖의 사람들과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사 내에 1만여명의 R&D 인력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회사 외 기관들과도 많은 R&D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올해 창사 150주년을 맞아 우리는 본사에서 회사 외부의 젊은 전문가들을 초청, 에너지에 대한 과학 심포지엄을 열 예정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아이디어 대부분은 전혀 새로운 것들입니다. 그 아이디어들을 상용화하는 데는 10년 이상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또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매우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그린 바이오 기술 프로젝트는 15년 전에 시작됐지만 상용화하는 데까진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회사는 한국의 대기업들과 비슷합니다. 장기적 관점을 갖고 있고 R&D에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만약 처음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시도하고, 그래도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노력합니다."

―요즘 모든 기업이 '차세대 먹거리'를 찾습니다만 과연 무엇이 미래의 '빅 히트' 상품이 될지 고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상용화 과정에 고객사와의 협업을 중시합니다. 고객사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 두 가지 분야의 R&D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첫째 식물을 원료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화이트 바이오 기술'입니다. 석유·가스를 원료로 하지 않고, 식물 등 재생 가능 자원을 원료로 화학제품을 만들어내는 분야로 바스프가 선정한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또 다른 것은 2차전지 분야입니다. 전기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2차전지의 기초 물질들은 모두 화학제품입니다. 우리는 이 분야에 5~6년 전부터 주력해왔고, 한국에도 관련 R&D센터를 세웠습니다. 어느 것이 5년이나 10년 후 미래의 '빅 싱(big thing)'이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산업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내 미래의 핵심 화학제품을 만들기 위해 투자하고 있습니다."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많은 사람과의 연결, 둘째 끈기, 셋째 조기(早期) 상용화입니다. 개발 과제를 선정하고 나면 정말 열심히 그 분야 개발에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선 혁신의 성과를 최대한 빨리 상품화해야 합니다. 조기 상용화를 위해선 개발 초기 단계부터 시제품을 만들어서 테스트를 해야 하며, 이때부터 고객사들과 협업해야 합니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혁신은 점진적인 과정이란 점입니다.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어보죠. 우리 고객사 중 자동차 회사들은 차체 경량화를 위해 무거운 강철 대신 플라스틱을 쓰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50년 전에 개발된 폴리아마이드의 강도를 높여 자동차 회사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혁신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기존의 것을 점진적으로 개선해서 나오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점진적 혁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혁신보다 훨씬 더 수익성이 크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쿠르트 복 바스프그룹 운영이사회 의장 겸 CEO
김지호 기자

화학 업체는 보수적이 아니라 현대적인 곳

―바스프의 근거지인 독일은 고(高)에너지 비용 등으로 인해 생산 단가가 높은 국가로 꼽힙니다. 고비용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생산 비용 때문에 유럽에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건 경쟁력이 없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학산업은 유럽에서 가장 큰 산업 중 하나입니다. 화학제품은 유럽의 주력 산업인 자동차·기계산업에 원재료를 공급합니다. 물론 유럽의 생산비가 높고 규제가 심하지만 유럽 화학 회사들은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실제 유럽은 역외 국가들과의 화학제품 교역에서 수입보다 수출이 더 많습니다.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는 겁니다. 이는 유럽 못지않게 임금 수준이 높고 화학산업 규제가 심한 한국 화학업체들 역시 마찬가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스프가 고비용 국가인 독일에서 화학 공장을 운영하면서 경쟁력을 유지하는 원천으로 업계에선 '페어분트(Verbund)'로 불리는 바스프식 생산 시스템을 든다. 페어분트는 고도로 집적화된 제조 방식으로 화학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인근 공장의 원료로 사용하는 형태로 생산비를 낮추는 시스템을 말한다. 복 회장은 "본사 소재지인 독일 루드비히스하펜에는 200개가 넘는 공장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요즘은 세계의 모든 화학 공장들이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 원조는 바스프의 루드비히스하펜 공장"이라고 말했다.

원칙에 충실한 독일 기업의 이미지에 보수적인 화학 업체의 기업 문화를 더해 보면 바스프가 보인다. 그런데 복 회장은 이런 완고한 기업 문화에 변화를 주고 있다. 그는 2011년 CEO 취임 후 직원들에게 자신을 '회장님' 대신 '쿠르트'라고 부르라고 지시해서 화제가 됐다.

―화학산업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바꾸려는 겁니까?

"화학산업이라고 하면 보수적이고 전통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화학산업은 과학에 기반한 산업으로 그만큼 현대적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세계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글로벌화된 세상이고, 바스프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저는 바스프가 내부 의사소통에 있어서 좀 더 개방적인 회사가 돼서 직원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말하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더 많이 얻고,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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