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완화 단어 처음 사용한 베르너 "정부·기업에 직접 대출해주자"

입력 2016.04.16 03:06

'양적완화 표본' 버냉키
"美·日 통화정책 내용 달라… 日은 통화 공급 증대 목표, 美는 장기금리 하락 유도"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
1995년. 투자은행 자딘플레밍 일본 지점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경제학자 리하르트 베르너(Werner·현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칼럼을 실었다. 그는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서 부실 채권을 사주고, 정부와 기업에 직접 대출하는 방식으로 신 용을 창출해주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문사에서는 "신용 창출이란 말이 어려우니 쉬운 단어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베르너 교수는 '신용 창출'을 '양적 금융 완화'라고 고쳐 썼다. '양적 완화'란 단어의 탄생이다.

세계 각국이 과거 실시했거나 도입 중인 양적 완화 정책은 내용 면에서 각양각색이다. 전문가들은 좁은 의미의 양적 완화는 제로 금리에 가까운 상황에서 국채를 매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첫 양적 완화는 2001년 일본에서

거품 붕괴 후 10년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은 2001년에 중앙은행인 일본은행(日本銀行)이 장기 국채를 한 달에 4000억엔씩 매입하는 통화 완화 정책을 도입했고, 이것을 양적 완화(量的緩和)라고 표현했다. 기준금리가 거의 0%인 상태에서 안전 자산인 국채를 사 시중은행의 대출 여력을 늘려주자는 것이었다.

다만 일본은행이 실시한 양적 완화 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는 크지 않았다. 일본은행 산하 일본은행금융연구소(IMES)는 2002년 보고서에서 "양적 완화를 시도했지만 명목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에 머물렀다"고 분석했다.

◇'양적 완화' 단어 쓰기 싫었던 버냉키

양적 완화란 단어가 부활한 것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다. 벤 버냉키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버냉키식(式)' 양적 완화를 도입했다.

그러나 막상 버냉키 전 의장은 '양적 완화'란 단어를 쓰기 싫어했다. 일본의 양적 완화가 결국 실패했기 때문. 그는 "일본의 양적 완화는 통화 공급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데 비해 연준은 장기 금리 하락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장기 국채와 주택담보증권(MBS) 매입에 초점을 맞췄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회고록 '행동하는 용기'에서 "나는 양적 완화 대신 신용 완화라는 용어를 쓰도록 유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쓰기도 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베르너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정책이나 국내서 논의된 '한국판 양적 완화'는 서로 가까운 개념"이라며 "다만 버냉키식 양적 완화를 기준으로 삼는 통설에 비춰보면 두 가지 정책은 양적 완화라는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앙은행 채권 매입은 과거에도 존재

머빈 킹 전 영란은행 총재는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하는 건 전통적 정책"이라며 "1980년대 영란은행도 공개 시장 조작을 통해 채권을 매입하거나 팔았다"고 말했다.

다만 특별히 최근의 양적 완화가 사상 초유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 규모와 제로 금리라는 상황 때문이라고 경제학자들은 설명한다.

성 교수는 "금리가 0%대로 낮아져 중앙은행이 더 이상 전통적 수단(금리 정책)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경기 부양을 위해 꺼낸 카드이기 때문에 비전통적 정책으로 묘사된다"며 "금리가 높은 상황에서 중앙은행들이 채권을 사들이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양적 완화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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