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월스트리트의 전설' 펠릭스 로하틴이 던진 마지막 경고_"돈놀음에만 빠져있는 한 세계 경제는 절대 못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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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1.09.10 03:05

      "데이터·숫자나 만지는 투기는 그만… 월가여, 자본을 모아 생산현장에 쏟아부어라"

      펠릭스 로하틴

      9·11테러 10주년 추모식을 앞둔 월가에는 우울한 뉴스뿐이었다. 8월 초 S&P가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한 데 이어 18일에는 모건스탠리가 '미국경제의 더블딥(Double Dip·이중침체) 가능성'을 경고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2년이 지났지만, 경제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무 살 때 주급 37.5달러를 받고 월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팔십에 월가의 아이콘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소식을 접했다. 60년간 월가에 몸담으면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가 미국의 위기(American Crisis)로 바뀌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난달 22일 만난 펠릭스 로하틴(Felix Rohatyn·84)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월가의 살아있는 전설' '월가에 마지막 남은 현인'. 뉴욕타임스 등 미국언론은 그를 이렇게 표현한다.

      1949년 투자은행 라자드 프레레스(Lazard Freres)에 입사한 그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RCA(전기·방송 회사) 인수(1986), 미국 담배·과자회사인 RJR나비스코 인수(1988), 소니의 미국 컬럼비아 영화사 인수(1989) 등을 주도했다. 뉴욕증권거래소 위기위원회 위원장(1968 ~1972)을 거쳐 1975년 파산 위기에 처한 뉴욕 시의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주프랑스 미국대사(1997~2000)와 리먼브러더스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장(2006~2008) 역임 후, 그는 라자드 회장으로 복귀했다.

      "잘못된 정부 정책과 월가의 탐욕. 이 두 가지가 극도의 투기를 촉발해 나라 경제를 갉아먹었다. 나도 그 흐름에 일조한 적이 있었고, 늘 후회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시장이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이제라도 자본을 투기가 아닌 실제 산업현장에 투입해야 한다."

      로하틴과 월가

      그는 지난해 자서전인 '딜링스'(Dealings)를 펴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월가의 전쟁'이다. 월가의 전쟁에서 승리는 무엇일까?

      "지금 월가에서 승리는 수익뿐이다. 온갖 비밀스런 금융상품을 고안하고, 회계조작이나 하는 기업에 막대한 자본을 쏟고 있다. (투기로) 한순간에 대박이 나고 세상은 이를 승리로 포장했다. 내가 아는 월가는 자본을 모아 기업을 구해내는 일을 승리라고 믿던 곳이었다. 경제에 진정한 빅붐(Big boom)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 말이다. 그 믿음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 지금 월가는 기로에 섰다."

      인터뷰는 맨해튼의 부촌(富村) 파크 애비뉴에 있는 로하틴의 자택 응접실에서 진행됐다. 3년 전인 2008년 9월 15일, 그는 이곳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소식을 접했다. 뉴욕타임스 1면 헤드라인을 보고서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신청'. 세계 금융위기의 시작을 알린 1보였다.

      당시 그는 리먼의 국제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월가의 원로 대부분이 은퇴 후 소규모 자산운용사인 부티크(boutique)로 흡수됐지만, 주(駐)프랑스 미국 대사였던 로하틴의 유럽 인맥을 눈여겨본 리먼 덕에 로하틴은 팔십 가까운 나이에 현직에 복귀했다.

      뉴욕타임스가 있던 테이블 위에는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가 놓여 있었다. 매주 5개의 시사주간지를 정독한다고 했다. "그러면 뭐 해. 늘 똑같은 얘기인걸."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거대 투자은행의 줄도산, 세계 금융위기 가능성을 경고했었다. 2005년 열린 하버드 케네디스쿨 강연에서는 "탐욕이 미국 시장자본주의의 주(主) 동력이 돼버렸다. 현재 미국이 가진 금융정책으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도 했다.

      누구보다 빨리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간파한 그의 서재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월가에서 가장 큰 변화는 컴퓨터와 정보기술의 등장이다. 데이터와 숫자를 만지면서 비교적 쉽게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게 됐다. 난 그런 방식이 효과적인지 잘 모르겠다. 뭔가 사람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구석이 있거든. 투자금융은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금융 전문가들이 고객들과 얼굴을 맞대고 협력하는 면대면 서비스다."

      뉴욕증권거래소는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거래 전자화를 실시했다. 현재 거래의 대부분은 거래소 밖의 인터넷을 사용해 이뤄진다. 세계 최대 증권 트레이드 회사인 '나이트 캐피털 그룹'에서는 2002년부터 컴퓨터가 거래 결정을 내린다. 트레이더(주식중개인)들의 거래 내역이 담긴 데이터를 기반으로 거래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월가에는 유능한 트레이더 대신 퀀트(Quant)들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퀀트란 고도의 수학 지식을 사용해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 속에 숨은 투자법칙(알고리즘)을 찾아내고, 컴퓨터로 투자 프로그램을 구축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월가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로하틴도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리먼브러더스가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2000년 프랑스 대사직을 마치고 월가로 돌아왔을 때, 재난의 신호가 특정 조직이 아닌 월가 곳곳에서 감지됐기 때문이다.

      "소수의 월가 스타들에게 수백만달러의 보상이 돌아갔다. IT에 대한 과대 선전이 천문학적인 주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부(富)는 그런 곳에 머물 뿐 산업 전반에 돌지 못했다. 성장은 멈추는데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는 느슨해 누구도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월가 놈들은 다 사기꾼(rogue)이야' 그렇게 말하긴 쉽다. 그러나 경고음은 정치권, 기업, 도시 전체에 울리고 있었다."

      리먼브러더스에서 나온 후, 그는 자서전을 준비하며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되짚어봤다고 한다. 인수·합병의 귀재였던 그가 성사시켜놓고도 후회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1988년 거대 식품회사인 RJR나비스코의 인수 작업이었다. 로하틴은 "1980년대의 금융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월가의 탐욕을 상징하는 악명 높은 거래였다"고 말했다.

      세계 3대 사모펀드 중 하나인 KKR(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은 LBO(Leveraged Buy-Out·차입매수)를 통해 RJR나비스코를 인수했다. 인수가가 260억달러로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LBO였다. LBO란 인수 대상인 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회사를 사들인 뒤, 재무상황을 개선해 되팔아 차익을 올리는 방법이다. KKR의 창립멤버인 핸리 크래비스(Kravis·67)에게 전화를 걸어 입찰을 제안해 입찰 경쟁을 붙인 이가 당시 자문역이던 로하틴이었다.

      "주주들이 최대한 높은 가격을 받게 하는 것이 내 임무였으니까. 그러나 그 과정에서 RJR나비스코 경영진이 지나친 지분을 요구했다. 본인들이 먼저 LBO를 하고 싶어한 이유다. 입찰에 참여한 투자그룹들은 당황했고 RJR 직원들은 분노했다. LBO를 통해 몇 명의 경영진만 벼락부자가 됐고 직원들은 거리에 나앉게 됐거든(LBO 이후 인수된 기업은 감원 등 비용절감을 단행한다). 그때 정신이 확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월가에 돈(국내외 개인 저축, 기업의 잉여 자금)은 넘쳤고 거대 딜(deal)에 대한 경쟁은 너무 치열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비즈니스에 '사람'(고객·직원·공동체)이 빠져버렸다. 오늘날 경제위기를 일으킨 투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투기의 시대에 가장 빠르게 성장한 것은 라자드 같은 투자은행들이었다. 투자은행은 원래 기업이 주식을 발행해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돕고 수수료를 받는 곳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주식시장이 커지자 직접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돈을 직접 굴리면서 미국 증권시장, 상품·선물시장, 부동산시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철학이 있었다"

      로하틴은 미국 버몬트주의 미들베리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를 월가로 끌어들인 것은 자본의 힘이었다. 1949년 라자드에 입사해 돈을 세는 일을 하면서, 그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기업을 세우고 사람들을 먹이는 '돈의 힘'에 매료됐다. 1957년부터는 인수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투자금융 전문가로 나섰다.

      "당시만 해도 월가에서 인수·합병은 고상한 일이 아니었다. JP모건 같은 유서깊은 은행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요는 늘어났고, 나 같은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은 기꺼이 그 시장에 뛰어들었다. 초창기 우리는 철학이 있었다. 인수·합병이 기업을 키우고 산업을 혁신해 결국엔 고객에게 이득을 돌려준다는 것 말이다."

      그는 1962년 렌터카 업체인 에이비스(Avis) 인수를 이끌었다. 당시 에이비스는 1위였던 허츠(Hertz)의 마케팅·서비스 전략을 따라 하기 급급했다. 라자드는 무능한 경영진을 갈아 치우고 서비스망을 정비한 뒤 허츠와 분명히 구별되는 광고전략을 내세웠다. 서비스가 좋아지자 영업이익도 늘고 직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2년 후 에이비스는 사상 첫 흑자를 기록했다.

      구원투수에서 세계 경제의 위협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많은 주와 도시들이 안고 있던 재정위기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재정수입도 줄어든 것이다. 이를 두고 로하틴은 "지금 미국 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라고 했다.

      30년 전만 해도 월가는 공동체의 몰락을 막는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로하틴이 있었다. 1970년대, 그는 뉴욕주 시정위원회장을 맡아 재정위기에 몰린 뉴욕시의 파산을 막았다.

      "당시 세금은 높고 이래저래 비용이 많이 드니까 기업들이 뉴욕을 떠났다. 수십 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상태였다. 시 소속 공무원만 1960년 10만명에서 10년 후 30만명으로 늘었다. 정치권이 이들 눈치를 보느라 후한 계약 조건을 제공했고 재정 압박은 더 심해졌다. 단기대출 액수가 늘어나면서 시가 파산 직전에 몰린 것이다."

      그는 월가의 동료들과 함께 뉴욕시의 재정상태를 조사해 알리고, 30억달러에 달하는 시 어음을 상환하기 위해 은행·보험사들과 연방정부를 찾아가 자금을 조달했다. 시 소속 공무원들의 임금 동결과 공공요금 인상안도 이끌어냈다. 방만하던 시 재정구조도 재편됐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맨해튼의 부자들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실업과 가난, 범죄를 견뎌야 했다. 그런데도 정치권에서는 '뉴욕은 헤로인에 중독된 말 안 듣는 딸 같다. 뉴욕은 자기가 저지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한가한 얘기가 나왔다. 월가 사람들은 알았다. 뉴욕시의 파산이 나라와 세계 경제에 즉각적인 영향을 줄 거란 걸. 시와 주정부의 부채를 합치면 미국 전체 금융자본의 20%에 달했다. 시가 파산하면 월가 은행들이 흔들리고 경제가 붕괴할 것은 뻔했다."

      담배 한 개비의 기적

      로하틴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이다. 1940년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당시 열두 살이던 로하틴은 어머니·할머니와 함께 파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스페인 국경을 넘기 위해 독일군 검문소를 통과하던 순간을 얘기해줬다.

      "신분증명서에는 우리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표시돼 있었다. 걸리면 바로 포로수용소행! 그런데 한 개비의 담배, 그 담배 한 개비가 나를 살렸다. 우리 차가 검문소를 통과할 때, 독일군 병사가 마침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던 거다. 어머니가 내민 신분증을 보지도 않고 지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금융은 결국 사람 사이의 협력이다

      그가 젊은 시절 월가에서 배워 성공의 밑천으로 삼은 것은 인간관계다. 라자드뿐 아니라 리먼브러더스, 골드만삭스 같은 유대계 투자은행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가족중심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로하틴은 "직원과 고객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깊숙하게 알았고 신뢰를 기반으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로하틴은 새아버지의 친구인 안드레 메이어의 추천으로 라자드에 입사했다. 입사 2개월 만에 그의 주급이 50달러로 올랐다.

      "주급이 오르고 메이어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첫 마디는 '왜 감사 편지를 쓰지 않았지?'였다. 나는 그 질문을 즉각 이해했다. 그런 배은망덕과 무례함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1985년 겨울 그는 GE 회장 잭 웰치(Welch)와 RCA의 CEO 손턴 브래드쇼(Bradshaw)를 맨해튼 5번가 자신의 아파트로 불렀다.

      "고객들을 집으로 부르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서로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니까. 브래드쇼는 턱시도까지 차려입었고, 웰치는 '이 만남을 위해 그렇게까지 입은 거냐'며 놀렸다. 긴장이 풀리자 다양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들이 거기 모인 이유만 빼고. 그러는 동안 두 기업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두 기업은 인수·합병에 성공한다)

      그는 "금융서비스는 고객과 협력해 그들을 돕는 개인적인 서비스, 딜의 성패는 그다음"이라고 했다. 인간미와 조정 능력을 인정받은 로하틴은 이후 뉴욕증권거래소 위기위원장과 뉴욕 시의 파산을 막는 역할을 맡게 된다. 2008년 그가 라자드의 회장을 맡게 됐을 때, 뉴욕타임스 등은 '월가의 전설이 돌아왔다'고 썼다.

      "내가 처음 일을 배웠던 회사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난 새로운 금융기술의 전문가인 척하기에 너무 늙었다. 당장 내일 숨이 붙어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허허허. 하지만 나는 다음 세대 금융인들에게 말해줄 수 있다. 소수 10%에게 나라 전체 소득의 90%를 안기는 딜을 만드는 질주는 미친 짓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