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를 바꾸면 제품 운명이 바뀐다

    • 김근배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

입력 2014.12.06 03:04

언어의 힘
각질 관리 기능성 제품 '팩처럼 쓰는 비누'로 선전했더니 잘 안팔려
'비누처럼 쓰는 팩'으로 콘셉트 바꿨더니 대박
품질 개선만으론 부족
제품 성능 높이더라도 소비자들의 머리에 인식 못시키면 허사···키워드로 콕 찍어줘야

김근배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
김근배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
최근에 제주도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올레길 걸어보셨나요? 올레길을 걸으면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내가 올레길이라고 불러주기 전에는 바다 풍경과 나무 숲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올레길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에 내게로 다가와 걷고 싶은 길이 되었다." 도대체 언어가 뭐길래 같은 길도 이름이 없었던 바닷길을 걸을 때와 올레라고 명명된 길을 걸을 때의 느낌이 다를까요?

팩처럼 쓸 수 있는 비누 : 비누처럼 쓸 수 있는 팩

2007년 수입돼 한 홈쇼핑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비누 제품이 있습니다. 스웨덴 왕실에 공식 납품하는 인증 제품인데, 모공 수축, 피지, 각질 관리 같은 효능이 있다고 하는군요. 사진에서처럼 생긴 것도 비누 모양이고, 스웨덴에서도 'Egg Soap(달걀 비누)'라고 해서 비누(soap)라는 이름을 달고 판매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팩처럼 쓸 수 있는 비누'라는 콘셉트로 판매를 시작했죠. 하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비누치고는 너무 비싸다." "아니, 비누를 어떻게 팩으로 써?" "너무 자극적인 거 아니야?" 대체로 이런 반응이었죠. 생각보다 매출이 저조하자 홈쇼핑 상품기획자와 수입업체는 미팅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콘셉트를 바꾸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변경된 콘셉트는 이렇습니다. '비누처럼 쓸 수 있는 팩'. 식약청에도 화장품으로 수입 허가를 받았고, 스웨덴 본사를 설득해 'Egg Soap'로 표기되어 있던 포장에서 'Soap'란 단어를 삭제한 후 'Egg Facial Care'로 바꿨습니다. 홈쇼핑 방송에서도 "매일 팩으로 세수하세요!"라면서 제품이 팩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죠.
'Egg Soap(비누)'(왼쪽)에서 'Egg Facial Care(팩)'로 이름을 바꾸자 죽었던 판매가 살아났다.
'Egg Soap(비누)'(왼쪽)에서 'Egg Facial Care(팩)'로 이름을 바꾸자 죽었던 판매가 살아났다. / 김근배 교수 제공
결과는 어땠을까요? 소비자 반응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팩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 "매일 아침 간편하게 세안할 수 있어 정말 좋다." 스웨덴 에그팩은 비누처럼 손쉽게 사용하면서도 모공 관리와 보습 효과가 뛰어난 스킨케어 브랜드로 완벽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매출도 크게 늘어 2010년 가격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홈쇼핑 히트 상품 1위에 선정될 수 있었죠. 2007년 출시 이후 현재까지 4000만 개 이상 팔렸고, 누적 매출은 1000억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생리대 코텍스 : 화이트

1971년 출시 이후 줄곧 업계 1위를 고수해온 유한킴벌리의 생리대 코텍스는 1987년쯤 경쟁사 P&G가 '위스퍼'라는 브랜드를 출시하며 1위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에 유한킴벌리는 1위 탈환을 위해 제품 혁신에 박차를 가해 흡수력이나 부착력 같은 제품의 성능을 크게 개선했습니다.

출시 전, 상표명을 감추고 제품 테스트를 진행했더니 60% 이상이 경쟁 제품보다 신제품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한킴벌리는 결국 깨끗함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화이트'를 신제품의 새로운 브랜드명으로 확정했습니다. 본사인 미국 킴벌리는 100년 이상 사용해온 글로벌 브랜드명 '코텍스'를 한국에서만 '화이트'로 바꾸는 걸 굉장히 반대했습니다. 유한킴벌리는 6개월에 걸친 설득 끝에 조건부 허락을 받았습니다. 조건이란, 코텍스를 병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한킴벌리는 '코텍스'는 포장 윗면에 영어로 아주 작게 쓰고, '화이트'는 포장 한복판에 한글로 커다랗게 표시해 소비자들이 코텍스보다 화이트로 신제품을 인식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출시한 화이트는 1995년 20%의 시장점유율에서 시작해 1999년에는 43%를 기록하며 위스퍼를 누르고 선두 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뭐길래 안 팔리던 Egg Soap가 이름을 바꾸자 팔리고, 유한킴벌리는 새로운 브랜드명 화이트를 사용하기 위해 본사와 6개월이나 줄다리기를 했을까요? 우리는 언어 속에 살고 있지만,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습니다.

언어철학자 훔볼트(Humbolt)는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케터가 이해해야 할 언어의 힘이고, 콘셉트의 힘이기도 합니다. 소비자가 품질이 좋아졌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제품의 개선만으론 불충분합니다. 소비자가 품질 개선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줄 언어, 하나의 키워드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단언컨대, 언어가 바뀌지 않으면 소비자는 바뀐 품질력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키워드로 콕 찍어주기 전까진, 아무리 제품의 성능을 개선해도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의 키워드로 콕 찍어줄 때 비로소 '소비자에게 다가가 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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