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이끈 조스팽 前 프랑스 총리·빔 콕 前 네덜란드 총리의 '반격'
현재 위기는 왜?
복지 중심의 사회민주주의 아닌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문제
유럽의 미래
결코 이빨 빠진 늙은 사자 아니다! 다극화 시대… 균형자 역할 할 것
1993년 11월, 세계인은 인류사에 새 장을 여는 사건을 지켜봤다.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12개국이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을 출범시킨 것이다. 유럽 의회와 정부를 만들고, 공동의 경제·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키로 했다. 그리고 6년 뒤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화를 발행했다. 뒤에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 15개국이 가세하면서 EU는 27개 회원국에 인구 5억명, GDP 16조 5000억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단일 경제권이 됐다.
국제 사회는 경외의 눈으로 유럽을 주목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퍼파워(super power)가 등장했다"는 평가와 함께 미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에 빗대 '유럽 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란 말이 나왔다.
1999년 유로화 탄생 이후 10년간(1999~2008) 유로 지역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1%로 1992~1998년의 1.8%를 웃돌았고, 물가상승률은 2.2%로 안정됐다. 유럽은 이른바 '골디락스(Goldilocks·저물가 속 경기 호황)'를 맛보았다. 유럽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서쪽으로 돌기 시작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심술을 부렸다. 지금 유럽의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됐지만, 충격은 유럽이 더 컸다. 2009년 미국 경제가 -2.6%의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일 때 유로지역은 -4.1%로 한술 더 떴다. 부실 금융기관 처리와 경기 부양 측면에서 유럽이 한결 굼뜨고 소극적이었던 게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0년 들어서도 유럽의 상대적 부진은 계속됐다. 와중에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가 터지면서 유럽 경제는 더욱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근 유럽 은행들의 부실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유럽발 세계 경제 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낳고 있다.

EU의 팀워크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재정 위기 해결과 경기 부양책을 놓고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중지를 모으기는커녕 서로 비난하기에 바쁘고, EU는 이를 중재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이지 못했다.
유럽은 결국 '병들고 늙은 사자'로서 쓸쓸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근대 문명을 태동한 잠재력을 발휘해 또 한 번의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
Weekly BIZ는 그 답을 듣기 위해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 전 프랑스 총리와 빔 콕(Wim Kok) 전 네덜란드 총리를 만났다. 조스팽은 1997~2002년, 빔 콕은 1994~2002년에 각각 총리로 재임했다. 둘 다 EU 통합이 본격 진행되던 시기였다.
두 사람의 대답은 단호했다. "유럽은 결코 이빨 빠진 사자가 아니다. 유럽은 아직 희망이 있다."
두 사람은 유럽의 문제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Social Democracy)의 분배·복지중심 정책과 EU 경제통합의 실패에 있다는 시각을 강하게 반박했다. 조스팽 전 총리는 "유럽에 위기가 온 것은 사민주의 때문이 아니라 지난 30년 동안 지속돼온, 금융의 지나친 지배를 받는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다한 사회복지 때문이 아니라 미국을 휩쓴 서브프라임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덧붙이기도 했다.
유로화에 대한 회의적 시각에 대해 빔 콕 전 총리는 "유로라는 공통의 통화가 없었다면 위기의 여파는 더욱 참담했을 것"이라며 "(유로화 사용국이) 유로화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빔 콕 전 총리는 "이번 위기는 시장이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면서 "시장에 대한 규제와 감독을 통해 시장의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규제가 시장의 진취성(initiative)이나 위험 감수(risk taking) 행위까지 죽여서는 안 된다"면서 "국가와 시장이 서로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 중심으로 세계의 권력이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조스팽 전 총리는 "나는 G1(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도, G2(미국과 중국의 이극 체제)도 믿지 않는다"면서 "세계는 다극화되고 있으며 유럽은 세계 각국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서 역할을 다해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EU의 경제위기 대응 과정엔 문제가 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조스팽 전 총리는 "재정 건전성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향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경제의 동력이 꺼지지 않도록 성장세를 유지해 가는 것이 급하다"면서 보다 과감한 부양책을 촉구했고, 빔 콕 전 총리는 "EU 국가 간 보다 강한 경제정책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스팽 前프랑스 총리가 진단한 유럽
"유로화,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유로존 재정·부채도 통합해야"
"지금은 재정적자 감축보다 성장세 유지하는 게 더 중요 시장 경제엔 찬성하지만 사회가 시장에 지배되는 '시장 사회'에는 반대"

리오넬 조스팽(Jospin) 전 프랑스 총리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쓴 표현은 '현실에선(en fait)'과 '실질적인(pratique)'이라는 두 단어였다. 유럽 사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좌파 정치인이라는 선입견이 무색했다. 그는 G20을 앞두고 국가브랜드 위원회가 주최한 서울 원로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했다.
■세계는 G2가 이끌기엔 너무 복잡해졌다
―유럽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현재 여러 유럽 국가가 재정 적자 문제를 겪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번 경제 위기로 부채가 늘었기 때문입니다. 또 EU 회원국들은 어려움에 빠진 남유럽을 살리는 데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회복에 추가로 돈을 풀면 재정 적자와 부채가 가중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문제는 재정 적자와 부채를 줄이기 위해 긴축을 선택한다면 나중에 경제가 회복하는 데 막대한 리스크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선택이고, 뜻을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제 생각엔 부채를 줄이고 재정 적자를 줄여서 경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장 1~2년의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지금은 경제의 성장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기 회복을 둔화시키고 저성장에 머물게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부채 역시 줄일 수 없게 됩니다. "
―유럽이 성장보다는 분배에만 신경 쓰다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사민주의 모델이 경제적 효율성과 사회적 평등·정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사민주의와 시장경제 둘 중 하나가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경제와, 룰이 지켜지고 정부가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시장경제 사이의 선택입니다. 앞서 런던·워싱턴·피츠버그에서 벌어졌던 G20 회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서 제기됐던 여러 질문은 사민주의자들이 제기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금융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을까에 대해 다양한 국가의 수반들이 스스로 던진 질문입니다."
―G20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G2라는 말도 나오는 마당에 말입니다.
"세계는 이른바 G1이나 G2가 이끌어가기엔 너무나 복잡다단해졌습니다. 지금 G20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경제문제가 G7이나 G8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G8의 멤버가 아니면서 G20의 멤버로 처음 참여했던 한국이 G20 정상회의를 주관하는 것은 이를 상징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G20조차도 어쩌면 과도기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처방이지요. 세계 경제를 어떤 식으로 조직화할 것인지 지속적인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유럽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유럽의 리더십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유럽은 '파트너'입니다. 유럽은 전 세계의 모든 국가와 수백년에 걸친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저는 유럽이 오늘날의 세계에서 다자주의(多者主義)를 실천하는 소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은 무역이나 경제면에선 강국이지만, 지배적이지 않습니다. 유럽은 다양한 국제관계 안에서 신뢰할 만한 파트너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태도 아닌가요? 역사는 결국 강자가 좌우해 온 것 같습니다.
"세상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한국인들이 입증하고 있지 않나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성공을 거뒀지 않습니까? 어쩌면 다자주의 자체는 하나의 이상이고 희망일지 모르지만, 지금 전 세계의 양상은 다자주의 이전에 이미 '다자적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엇갈리기 마련입니다. 강대국들은 서로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다른 국가와 문명들에 자신의 자리를 내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강대국의 일방주의보다 다자주의가 훨씬 더 현실적인 태도입니다. 저는 실용적 이상주의를 지지합니다."
■중국의 이성과 신중함을 믿는다
중국은 요즘 유럽에 '병 주고 약 주는' 대상이다. 중국의 외교적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유럽은 점점 세계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아프리카가 단적인 예다. 오랜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유럽의 앞마당으로 여겨졌던 아프리카가 자원 외교를 앞세운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유럽인들의 기득권은 점차 쇠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미국을 대신할 새로운 시장이기도 하다. 최근 독일 경제의 놀라운 회복세는 중국의 수요에 힘입은 것이다.
이에 대해 조스팽 전 총리는 "유럽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엔 약간의 호기심과 경탄, 그리고 우려가 섞여 있지만, 두려움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중국 지도자들의 정책은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중국이 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는 얘깁니다. 물론 중국의 인구 수나 경제 규모, 원자재 시장에서의 영향력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과거의 중국은 중화주의(中華主義)에 갇혀 있었죠. 하지만 중국은 여러 면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중해졌습니다. 오늘날은 중국이 외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으니까요. 중국을 바라볼 때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그들의 이성과 신중함을 믿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로화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유럽 단일 통화인 유로화는 예전에도 좋은 아이디어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유로화는 유로존 국가들이 손을 놓고 있어도 각 회원국의 재정 적자나 부채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 주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유로화는 오히려 유럽 각국 간에 거대한 정치·경제적 조율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유럽을 계속 단일통화 구역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국가 재정과 부채도 통합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까요?
"저는 시장 경제에는 찬성하지만, '시장 사회'에는 반대합니다. 시장은 현재까지 자원과 부(富)를 분배하는 가장 효율적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효율적으로 작동하면서도 사회가 시장에 지배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으려면 통제와 규율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국가란 공무원들의 관료주의가 절대 아닙니다. 사회가 가진 다양한 의견을 총체적으로 시장에 반영하는 민주적 정부입니다. 현재 세계가 겪는 경제 위기는 대공황 이후 또다시 시장을 통제 불능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실용적 차원에서, 각 국가의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감안해 시장과 사회, 국가 간에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 ● 조스팽 前총리는 누구인가
프랑스 사회당 대표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한, 유럽 좌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뒤 외무부에서 일하다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했다.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Mitterrand) 당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뒤를 이어 당 대표가 됐다.
교육부 장관 시절 잇단 소신 발언으로 미테랑 대통령의 미움을 사 1993년 정계를 은퇴했다가, 95년 사회당 지도부의 부패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97년 대선에서 우파의 자크 시라크(Chirac)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같은 해 벌어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좌파연합의 대표로 총리가 됐다.
그의 총리 재임기간 프랑스는 실업률이 10년 만에 9%대로 떨어지고 경제성장률이 독일을 추월하는 호황을 맞았다. 근로시간 단축(주 35시간 근무제)을 통한 청년 일자리 창출 등 좌파적 정책에 공기업 민영화 등 우파적 실용주의 정책을 가미한 것이 주효했다.
빔 콕 前네덜란드 총리가 진단한 유럽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실패? 약자 보호하는 질적 성장 추구"
"社民주의는 분배뿐 아니라 경제 발전에도 관심 많아 '西에서 東으로' 힘의 이동"
"유럽엔 새로운 성장 동력 EU 힘 아닌 영향력을 원해"

■케이크를 만드는 일에도 관심 있는 사민주의를 지향한다
―유럽이 총체적 위기에 빠졌다는 시각이 많은데,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보십니까?
"지금 상황이 그렇게 부정적이진 않습니다. 금융위기는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유럽으로 번져 특히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 유럽에서 충격이 컸습니다. 이 나라들이 부채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다른 유로존(Euro Zone) 국가들과의 갈등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지금 유럽의 문제는 EU 내에서 강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와 약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 간의 긴장과 갈등입니다. 약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들은 다른 EU 국가들과 더 강한 경제정책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 통화(유로)가 필요합니다. 공통 통화가 없었더라면 정책 협력은 약해졌을 것이고, 상황은 더 나빠졌을 겁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U 국가 간 보다 강력한 정책 공조가 필요합니다. 각국이 예산에 대해 굳게 협력, 재정지출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해야 합니다. 모든 EU 국가가 은행과 금융기관에 재정 지원을 해야 합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은 경제 개혁을 통해 효율성을 높여야 합니다. "
―최근 위기에 대해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실패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민주의는 케이크를 나누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케이크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사민주의는 소득 분배만이 아니라 효율성과 순조로운 경제 발전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사민주의자로서 저는 우리의 복지 시스템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스스로를 부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모두의 도덕적 사명입니다. 이번 위기는 사민주의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물론 사회적 약자 보호와 개인의 책임 사이에는 균형이 이뤄져야 합니다. 사회적 (복지) 혜택이 너무 관대해서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막아선 안 됩니다."
■EU는 힘이 아니라 영향력을 원한다
―EU 출범 당시 미국에 버금가는 수퍼파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지금은 중국의 그늘에 가려지는 분위기입니다.
"우선 지금은 수퍼파워에 대해 이야기할 시대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상호 의존적인 다원적 세계경제(multi global economy)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EU는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이 여러 개의 의견보다 하나의 목소리를 내면 힘이 아니라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럽은 서(西)에서 동(東)으로의 힘의 이동(power shift)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것은 유럽에 해(害)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동력입니다. 중국과 한국이 성장하면 유럽도 수출증가를 통해 혜택을 받습니다."
―EU가 진정한 경제·정치 공동체로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EU 국가들은 정치적 노선이나 재정적, 경제적 여건이 저마다 다릅니다. 정치·경제적 통합 과정에서 이런 개별적 특성을 과소평가해선 안 되고, 개별 국가들의 주권도 존중해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통합이라는 목표와 개별적 특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목할 것은 유럽이 전에 비해 점점 동질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유럽의 성장 동력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성장을 위해선 공정한 자유무역 체제가 확대돼야 합니다. 유럽이 저비용 국가들과 가격 경쟁을 계속할 순 없기 때문에 품질과 서비스 지향적인 생산력을 갖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식과 교육, 과학·기술, 연구개발(R&D)이 미래 성장 전략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성장의 질과 구조에 더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기후 변화 대응과 에너지 효율성, 그린 기술 개발을 통한 녹색성장이 그것입니다. 소외 계층을 위한 포용적 성장도 중요합니다. "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요?
"정치인은 민간부문, 시민사회와의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국가 간 파트너십을 맺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지향적인 리더십보다 외부 지향적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때론 다수 의견을 거스르는 용기 가져라
―네덜란드는 유럽의 무역과 첨단기술, IT의 허브로 자리 잡고, 노사정 대타협 등 개혁을 이뤄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요?
"네덜란드는 실용적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큰 나라들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이고, 천연자원도 별로 없습니다. 개방된 경제체제를 가지고 수출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국제 사회의 현실에 빠르게 발맞춰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도 협력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노동시장 유연성이 네덜란드에 비교적 일찍 도입된 것도 한 예가 되겠지요. 노동 시장 내부자(이미 직장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보호에 치중하면 외부 사람들이 노동 시장에 진입할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을 여론에 환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네덜란드 노동계는 널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 서로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노동운동가에서 정치가, 경제 관료, 다국적 기업의 고문역까지 정말 폭넓은 삶을 사셨는데, 국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인기를 얻으려 하지는 마십시오. 포퓰리즘(populism)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그들을 설득하고, 존중해야 하겠지만, 때로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좋아요. 그런 의견이 아마 지금 다수의 생각일 테지만, 제 생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음엔 당신을 뽑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더라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결정을 철회하고 다른 것을 할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리더는 다음 선거보다 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려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 삶이 제게 준 중요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독립적이고, 진지하고, 확고한 생각을 갖고, 설득력 있는 사람이 되어라. 대다수의 사람을 만족하게 하려 하지 말고 너 자신을 믿어라.'"
>> ● 빔 콕 前총리는 누구인가
빔 콕 전 총리는 199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 기적을 이끈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대표적 정치인이자 경제통이다.
1982년 네덜란드 노조단체 회장이었던 그는 크리스 반 빈(Van Veen) 산업경영연맹(한국의 전경련 비슷한 단체) 회장의 집에서 수시로 모임을 가진 끝에 노사정 대타협인 '바세나르(Wassenaar)협약'을 이끌어냈다. 사회보장과 임금 삭감, 일자리 나누기가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이었기에 노조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협약은 파업과 노사 간 반목으로 파탄 상태였던 네덜란드 경제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1986년 정계로 진출해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재정부 장관과 노동당 대표를 거쳐 94년 총리에 올랐다. 사회민주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지출과 세금 삭감, 규제 완화와 민영화, 사회복지제도 수정 등 시장의 활력을 되살리는 정책을 폈다. 그의 재임 시절 네덜란드의 GDP 성장률은 4%에 육박했고 재정적자와 세금 부담은 크게 줄었다.
[전문가가 본 유럽] 문우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유럽 경제 활력 상실… 신성장동력 통합서 찾아"

유럽은 그동안 미국에 비해 항상 비효율적이고 경직적인 경제의 대명사로 인식돼 왔다.
특히 지나친 사회보장 비용으로 인한 재정 취약성은 최근 경제위기의 원인으로까지 지적되고 있다. 분배와 복지를 중시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실패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민주의식 복지 정책에 들어가는 사회적, 경제적 비용은 막대하다. 반대로 이를 뒷받침할 수준의 경제성장은 뒤따르지 못했다. 이것은 유럽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사민주의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유럽 전체로 보았을 때 공공부채의 비율은 미국보다 낮다. 더구나 유럽은 미국에 대해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유럽 기업이 미국 기업보다 높은 효율성을 보이고, 국제화에 더 적극적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물론 유럽이 미국에 비해 경직된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복이나 사회적 형평성 면에서 유럽은 미국을 앞선다.
유럽의 사회보장 지출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회계층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지출이라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따른 것이다. 예컨대 빈곤은 게으름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에 비해 유럽인들은 빈곤을 사회문제로 인식한다.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개입을 당연시하는 사민주의적 전통이 강하다.
유럽 통합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밀턴 프리드먼이나 마틴 펠트스타인 등 미국의 저명한 학자들은 유럽 통합과 유로화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지나칠 만큼 강조해 왔다.
그러나 많은 유럽인은 유럽 통합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단일 정책과 단일 시장, 단일 화폐 등 끊임없이 통합 과정을 통해 경제가 성장하고 평화가 정착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부상에 따라 G2를 전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국과 유럽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G20을 계기로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유럽을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럽 경제는 분명 활력을 잃고 있다. 유럽은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한 상황이며, 통합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적절한 개입과 사회보장, 사회적 연대, 공통의 규범 마련을 통해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면, 이것이 경제성장을 위한 새로운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