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한 오합지졸들을 정예로 키워낸 진짜 장군

    • 남도현 DHT AGENCY 대표·군사 저술가

입력 2020.07.10 03:00

[남도현의 전쟁과 무기] <4> 독일군 재건한 한스 폰 제크트 참모총장

남도현 군사 저술가
지금도 격렬한 토론 주제가 될 정도로 제1차 대전의 발발 원인은 어느 일방의 탓으로 돌리기 어려울 만큼 너무 복잡하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사라예보에서의 총성과 솜 전투를 직접 연결할 만한 고리가 없다. 이처럼 시작이 불분명했지만 종전도 흐지부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상하게 끝났다. 일단 정치적으로 승패가 결정되었으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독일이 과연 패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을 굴복시키고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 중이었고 서부전선에서는 북프랑스, 벨기에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비록 국민의 삶은 어려웠으나 독일 본토의 물리적 피해는 없다시피 했다. 물론 전쟁을 지속했으면 제2차 대전처럼 완벽하게 몰락했겠지만 종전 직후 지도에 그려진 전선의 모습만 보면 독일이 패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1925년 야전 훈련 중인 초급 장교단을 방문한 한스 폰 제크트. 놀라운 리더십으로 해체되다시피 한 군대를 짧은 시간에 강군으로 만든 발판을 놓았다. /위키피디아
1차 대전 패전을 강요받은 독일

사실 처음에 독일도 강화를 맺어 총성이 멈춘 것이므로 결코 패배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합국은 독일이 항복한 것으로 정의하고 철저히 보복에 나섰다. 그렇게 먼저 강화를 요청했다는 이유만으로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그래서 1919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엄청난 굴욕이었다. 전쟁 발발과 관련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신들에게만 묻자 독일은 패한 것이 아니라 패배를 강요받은 것이라고 분노했다.

특히 군부가 몹시 수치스러워했다. 전차나 전투기 같은 무기의 개발 및 보유를 금지당하고 총 병력은 10만명으로 제한받았다. 전쟁 전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독일 육군은 국내 치안 유지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약화되었고, 세계 2위였던 해군은 완벽하게 몰락해서 연안해군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1923년 배상금 문제로 프랑스군이 국경을 넘어 루르를 점령했을 때 그저 지켜만 보고 분노를 삭여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 20년 후인 1939년에 제2차 대전을 시작해 1942년까지 유럽의 지배자처럼 행세했다. 독일이 히틀러가 재군비를 선언한 1935년까지도 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했으니, 독일이 대놓고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기간은 4년밖에 되지 않았다. 경무장한 10만의 독일군이 불과 4년 만에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 만큼 급성장한 것이었다.

물론 독일의 침략 행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바닥까지 떨어졌던 독일군이 세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변신한 것은 연구 대상이다. 아무리 독일이 기본 토대가 갖춰진 강대국이었어도 감시의 눈초리가 극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놀라운 변화였다. 이런 반전의 이면에는 묵묵히 어려운 시절을 이끌어왔던 한스 폰 제크트(Hans von Seeckt· 1866~1936)가 있었다.

한스 폰 제크트 독일 참모총장
군대 재건의 씨를 뿌려 가꾸었으나

제크트는 제1차 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19년 7월 7일 독일군 참모총장에 부임했다. 참모조직은 프랑스에서 처음 탄생했지만 현대식 군사 조직으로 체계를 잡게 된 것은 프로이센에 의해서다. 이후 독일군 총참모본부는 통일 과정에서 있었던 전쟁들을 승리로 이끌었고 제1차 대전도 진두지휘했다. 승전국들이 눈엣가시였던 총참모본부를 전격 폐지시키면서 제크트는 불과 일주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병무국장으로 타이틀을 바꿔 단 제크트는 수송을 관장하던 요원들을 교통 관련 행정부로 보내 예전 업무를 계속 관리하는 식으로 총참모본부를 비밀리에 존속시켰다. 더불어 외압에 의해 실시된 감군을 소수 정예화의 기회로 삼았다. 제2차 대전 당시에 활약한 독일의 많은 명장이 바로 이때 키워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업적은 독일의 재군비에 대비해 신속히 무장할 수 있는 준비를 미리 해 놓았다는 점이다.

제크트는 공군이 향후 전투의 주역이 되리라 확신하여 민항기를 개발할 때 군용기로 개조가 가능하도록 준비시켰다. 제2차 대전 당시에 맹활약한 He 111 폭격기와 Ju 52 수송기가 그렇게 탄생했다. 또한 향후 전차와 기갑부대의 역할이 클 것이라 생각하여 연구와 인력 양성에도 힘썼다. 당장은 개발이나 보유가 불가능하므로 차량에 캔버스로 만든 전차 모형을 씌워 훈련했고 트랙터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개발도 진행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은 전차의 개발부터 부대의 운용까지 기갑과 관련한 모든 부분을 선도했다. 하지만 정작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며 전쟁을 시작했을 때 선두에 내세운 1호, 2호 전차는 어지간한 소화기에도 관통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제크트가 미리 준비를 해왔기에 이 정도라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만일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독일 전차부대의 신화는 출발이 더욱 늦어졌을 것이다.

이 같은 노력으로 바이마르 공화국군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유약한 모습과 달리 차근히 내실을 다져놓아 기회만 되면 크게 팽창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망한 군대가 그처럼 짧은 시간에 다시 거대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기초를 다져놓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남긴 흔적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뿌린 씨앗이 인류사 최대의 비극을 잉태했다는 사실이다.

골수까지 무인이던 제크트는 강력한 독일군의 재건을 원했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의 압박으로부터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 목표였다. 이미 총참모본부에서 제1차 대전을 경험했기에 다시 전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때마침 정권을 잡은 히틀러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만든 보약을 나치는 독약으로 만들었고 결국 독일을 파멸로 이끌었다.

MG34로 전투 중인 모습. 쉽게 이동과 사격이 가능해서 경기관총처럼 보이나 위력과 연사력은 중기관총에 해당된다. /위키피디아
제크트가 개발 지시한 경기관총 MG34, 화력은 重기관총

현대식 기관총의 시작을 1880년대 탄생한 맥심 기관총으로 본다. 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군이 맥심 기관총으로 좋은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열강은 탄 낭비가 심하다며 기관총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1차 대전에서 최고의 살상 무기로 악명을 날리자 기관총은 모두가 원하는 무기로 등극했다. 상대 참호로 달려드는 공격자들이 난사하는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어나가는 것이 전선의 일상이었다. 따라서 종전 후 승전국들이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의 군비를 제한할 때 기관총의 개발과 보유를 금지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탄창을 이용하는 경기관총은 허락했다. 기술력이 부족해 초창기 경기관총의 성능은 좋지 않았다. 프랑스의 쇼샤 경기관총 같은 경우는 병사들이 몰래 버릴 정도로 혹평을 받았다. 그래서 연합국은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기관총의 개발과 보유를 허락한 것이었다. 이때 제크트는 유사시 약간의 개조만으로 탄띠식 급탄도 가능하도록 기관총을 개발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독일의 재무장 선언 직전인 1934년에 제식화하는 데 성공한 기관총이 MG34다. 무게나 외형으로만 본다면 사수·부사수 정도의 적은 인원으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경기관총이었지만 화력과 연사력은 중기관총 수준이었다. 이후 MG34는 후속작인 MG42와 더불어 제2차 대전 끝까지 큰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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