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죽여 人肉 맛보게한 신하를 중용한 임금, 훗날…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입력 2020.07.10 03:00

[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9) 임금이 도리를 잃으면

일러스트=김영석
일러스트=김영석
먼저 사마천의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가 전하는 이야기부터 보자. 제(齊)나라 환공(桓公) 말년에 관중(管仲)이 병들자 환공이 병문안을 가서 물었다. "여러 신하 중에 누가 재상을 맡을 만한가?" 관중이 말했다. "신하가 어떤지 아는 것은 임금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역아(易牙)는 어떤가?" 관중이 답했다. "자기 아들을 죽여 임금의 비위를 맞췄으니 사람의 인정상 안 된다고 봅니다[不可]." 환공이 말했다. "개방(開方)은 어떤가?" 관중이 답했다. "아버지를 배반하여 임금의 비위를 맞췄으니 사람의 인정상 가까이 하기에는 어렵다[難近]고 봅니다." 환공이 말했다. "수조(竪刁)는 어떤가?" 관중이 답했다. "스스로 거세하여 임금의 비위를 맞췄으니 친하게 하기에는 어렵다[難親]고 봅니다."

관중이 죽고 나서 환공은 이 세 사람을 썼고 이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는데 역아가 수조와 함께 (궁중에) 들어가 내총(內寵·권세가 있는 환관들)의 도움으로 여러 대부를 죽이고 공자 무휴(無虧)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때 효공(孝公)이 송나라로 도망갔다. 송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자 제나라 사람들은 무휴를 죽이고 효공을 임금으로 세웠다. 효공이 죽자 그 동생 반[潘·소공(昭公)]이 개방의 도움을 받아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인간 도리 못한 사람 중용했던 제환공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제나라 환공은 한때의 적이었던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패권(覇權)을 장악한 걸출한 임금이다. 관중은 춘추시대의 명재상이다. 그는 역아·개방·수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서 딱 한마디로 그 사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불가함을 밝히고 있다. 역아는 환공이 온갖 진미(珍味)를 다 맛보았지만 인육만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하자 자신의 첫아이를 쪄서 환공에게 바쳤다. 개방은 환공을 섬긴다는 핑계로 15년 동안 부모를 돌보지 않았다. 수조는 권력을 얻기 위해 스스로 거세한 인물이다.

관중은 이미 이런 행위는 사람의 인정상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제환공은 반대로 생각했다. "제 아이를 죽이면서까지 나에게 충성하니 얼마나 대단한가? 제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나에게 충성하니 얼마나 지극한가? 자기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까지 나에게 충성하니 얼마나 충성스러운가?"

도리에 어긋남을 살피지 않고 사람을 쓴 결과는 참혹했다. 제환공은 결국 말년에는 소인형 임금의 길을 걸어 관중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들을 중용했다가 제나라는 그 후 30년 이상 혼란의 늪에 빠져야 했다.

신하의 충언 왜곡한 광해군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인 1608년 5월 2일 대구부사 정경세(鄭經世)가 장문의 상소를 올려 당시 시사를 곡진하게 아뢰었다. 그런데 그중에 "변방의 장수와 수령은 모두 정해진 값이 있는데 선왕 말년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는 표현이 문제가 됐다. 이는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에 광해군은 발끈했다. 사실은 상소에는 광해군이 인사를 마음대로 한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그 점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는 어려우니 아버지 선조를 비방한 문제를 들어 정경세를 몰아세운 것이다. 정경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남인의 큰 정치인이다. 결국 광해군 정권의 핵심인 북인 정인홍의 견제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복직해 이조판서와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광해군은 정경세를 죽이려 했다. 5월 10일 그를 두둔하는 신하들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정경세의 소장 가운데에서는 이제까지 들어보지도 못했던 선조(先朝)의 실덕(失德)과 잘못된 정사를 주워 모아 있는 힘을 다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패만(悖慢)한 말을 하였다. 내가 그 소장을 그대로 안에 두려고 하다가 다시 조정의 신하들이 그의 죄악을 알지 못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하달하고 나의 뜻을 간략하게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간들은 임금을 업신여기는 부도한 그의 말을 보고도 성토할 것을 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릇되이 감싸주려고 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금을 버리고 간사한 자와 한 패거리가 되어 버렸으니, 경세의 권세가 중하다고 이를 만하다."

광해군 편든 신하들도 책임

광해군은 이미 집권 초부터 마음이 열려 있지 못했다. 실록 사관은 당시 정경세의 상소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경세의 상소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잘못된 정사를 그대로 말했을 뿐 별로 패만한 말을 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왕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건드린 것 때문에 화를 내고는 소장 가운데에 있는 '변장(邊將)과 수령(守令)은 모두 정해진 값이 있는데, 선왕 말년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는 말을 죄안으로 삼아 반드시 끝까지 추궁하여 스스로 마음을 시원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간 중에 어떤 이는 왕의 뜻에 영합하고 어떤 이는 왕의 위엄에 겁을 먹어 모두 패만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대신이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경세는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이 간하는 것을 막고 스스로 성인(聖人)인 체하다가 결국 전복되는 데까지 이른 것은 왕의 죄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신하들도 임금의 악을 조장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도리를 잃은 임금이 나라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다.

[논어 암호풀이]

도리를 벗어나면 나라를 잃는다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말이다.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기쁘게 하기를 도리로써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그 그릇에 맞게 부린다[器之].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 기쁘게 하기를 비록 도리로써 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사람을 부리면서도 한 사람에게 모든 능력이 완비되기를 요구한다[求備]."

이때 군자란 군자형 임금이고 소인이란 소인형 임금이다. 군자는 편당하지 않고 두루 받아주니 섬기기는 쉬운 것이며 도리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으니 기쁘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소인은 그와 정반대다.

그릇에 맞게 부린다는 것은 그 사람됨을 정확히 알아보고서 적재적소에 쓴다는 말이다. 관(寬)과 같은 뜻이다.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점이 군자의 섬기기 쉬움과 기쁘게 하기 어려움, 그리고 소인의 섬기기 어려움과 기쁘게 하기 쉬움에 있다.

어째서일까? 여기에 흥망(興亡)의 갈림길이 있다. 지난번에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잘 써서 흥하는 경우를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사람을 잘못 써서 망하는 경우이다. 그 흥망의 갈림길은 다름 아닌 임금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임금이 도리를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도리를 따르는 신하들이 나아올 것이고 임금이 사욕을 좋아하면 그것을 이용해 사욕을 챙기려는 신하들이 나아온다. 이 점에 관한 한 동서고금 어디에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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