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만에 되살린, 안동 밀소주 맛봤소?

입력 2020.06.26 03:00

[박순욱의 술술기행] <8> IT 경영자에서 양조인으로… 박성호 '밀과 노닐다' 대표

안동 맹개마을 밀밭 3만평은 이모작을 한다. 겨울과 봄에는 밀이, 여름과 가을엔 메밀이 자란다. 사진은 맹개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학소대에서 찍었다.
안동 맹개마을 밀밭 3만평은 이모작을 한다. 겨울과 봄에는 밀이, 여름과 가을엔 메밀이 자란다. 사진은 맹개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학소대에서 찍었다. / 밀과노닐다
서울에서 쉬지 않고 3시간을 차로 달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의 농암종택에 도착했다. 1504년 사간원에 근무하다가 연산군의 노염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농암 이현보 선생 종가댁이다. 농암종택을 지나면 곧바로 낙동강이 차 앞을 가로막는다. 상류라 강폭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다리가 없어 차로는 갈 수가 없다. '육지 속 섬'인 맹개마을로 가려면 바퀴 큰 트랙터에 옮겨 타야 한다. 전기가 들어온 지 아직 10년이 되지 않은 청정 오지 산골마을, 통밀로 만든 증류주 '안동 진맥소주'가 익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맹개마을은 '해가 잘 드는 외딴 강마을'이란 의미다.

독일서 IT 유학→농부→양조인

‘밀과노닐다’ 박성호 대표는 “농업의 꽃은 술”이라고 말했다.
‘밀과노닐다’ 박성호 대표는 “농업의 꽃은 술”이라고 말했다. / 박순욱 선임기자
박성호(51)
'안동 진맥소주'는 이곳 맹개마을의 3만평 농장에서 키운 유기농 통밀로 만든 증류주다. 작년 말에 출시된 신상 전통술이다. 진맥은 밀의 옛 이름이다. 안동은 쌀소주의 본고장. 쌀과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들어, 소줏고리로 증류한 술이 안동소주다. 하지만 진맥소주는 쌀이 아닌 밀로 만든다. 밀은 보리와 함께 맥주, 위스키의 주재료다. 진맥소주는 밀과 누룩으로 발효주인 막걸리를 먼저 만든 뒤 상압증류한다.

진맥소주 원료는 위스키와 같지만, 위스키는 맥주를 증류한 술인 데 비해, 진맥소주는 한국식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든 후 증류시켰다. 재료(밀)는 서양 술 위스키와 같고, 제조 방법(막걸리를 만들어 증류)은 전통 쌀소주와 같은 술이 진맥소주다. 진맥소주에는 그래서 위스키 향이 묻어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 향이 난다"는 사람들도 있다. 40도, 53도 제품은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바닐라, 레몬 향이 난다. 재료인 밀에서 우러나는 꽃, 과일 향들이다.

'안동 진맥소주'를 만드는 농업법인 '밀과노닐다' 박성호 대표는 14년째 맹개마을에서 밀농사를 짓고 있다. 독일 유학(컴퓨터 전공) 후 1997년 귀국해 IT 기업을 10년 남짓 경영하다가 2007년 이곳으로 귀농했다. 'IT 전도사'에서 '농부'로 변신한 그가 최근 '양조인'으로 다시 거듭난 이유가 궁금했다. 진맥소주는 유기농 밀로 만든 국내 유일의 증류주다. 특히나 직접 키운 농산물로 술을 만든 사례는 국내 양조장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밀소주 한 병 제조에 2년

―IT 사업을 접고 귀농한 이유는?

"재미있던 기술 개발이 회사의 성장과 경쟁이란 틀 속에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니 지쳤다. 지속가능한 가족의 삶, 생태적인 생활, 가상이 아닌 손발로 하는 현실적인 일을 찾아 귀농했다."

―밀로 소주를 만든 이유는?

"14년 전 안동으로 귀농하면서 3만평 규모 밀농사를 짓고 있다. 친환경 공법으로 유기농 밀 인증까지 받았지만, 빵집에 밀가루 팔아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술이 농업의 꽃'이라고 생각했다.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술을 만들었고, 전 세계 술 시장 관점에서 볼 때 밀도 쌀 이상으로 훌륭한 술 원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옛 문헌에서 밀소주 기록을 찾게 돼 더 확신을 갖게 됐다. 1540년에 쓰인 요리책 '수운잡방'에 밀소주 '진맥소주'에 대한 주방문(레시피)이 자세히 나와 있다."

―술 원료로서 밀의 적합성은?

"여름 곡물인 쌀과 달리 (10월 말에 씨를 뿌려 이듬해 6월 말에 수확해) 겨울을 나는 밀은 따뜻한 본성이 있다. 그래서 술을 만들면 몸이 따뜻해지는 특성이 있다. 진맥소주는 통밀로 술을 빚기 때문에 밀이 갖고 있는 다양한 곡물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직접 키운 농산물로 술을 만든 사례가 드문데?

"농부가 양조인 역할까지 하다 보니, 진맥소주는 만드는 데 최소 2년이 걸린다. 10월에 파종하고 이듬해 6월에 수확, 가을에 술을 담근다. 증류를 하고도 숙성을 1년 이상 거친다(22도 제품은 6개월 숙성). 그래서 우리의 모토는 '씨앗부터 술병까지(Farm to Glass)'다. 진맥소주 한 병에는 2년의 기다림, 5㎡의 밀밭, 그리고 농부의 한 말 땀방울이 담겨 있다. 농부가 만드는 술의 장점도 크다. 오랫동안 직접 밀을 키우다 보니 수확기 밀알 향만 맡아봐도 어떤 성격의 술이 만들어질지 대번 짐작이 간다. 양조용 밀, 빵을 만드는 밀, 누룩을 만드는 밀을 따로 심을 정도로 '밀 박사'가 됐다. 원료를 사다가 술을 빚는 양조인은 짐작도 할 수 없는 노하우다."

'개성 있는 소비' 맞춰 고가격 전략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박순욱 조선비즈 선임기자

진맥소주는 22도·40도·53도 세 가지가 있지만, 간판 상품은 40도 제품이다. 원액 그대로 40도 제품을 마시면 통밀빵의 고소함, 레몬 같은 과일의 단맛이 느껴진다. 53도 제품에는 바닐라향, 약간 매운맛도 풍긴다. 얼음을 타서 53도 제품을 천천히 마시면 다양한 곡물 향이 되살아난다. 박성호 대표는 "술이 약한 분들을 위해 만든 22도 제품은 시원한 여름오이 같은 향이 난다"고 말했다.

―안동은 쌀소주의 본고장인데?

"지역인 안동을 내세우면서도 밀로 만든 소주를 만들었으니 '돌연변이'라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술의 매력은 다양성에 있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획일화된 쌀소주 위주에서 새로 밀소주가 더해져 장기적으로는 안동소주의 외연이 넓어지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한다. 지금은 '개성 있는 소비'를 추구하는 시대가 아닌가?"

―가격이 기존 안동소주의 두 배다.

"신생 양조장 입장에서 가격 결정은 쉽지 않았다. '후발 주자가 가격은 왜 더 비싸?' 이런 반응은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유기농 친환경 인증을 받은 밀을 직접 생산해, 그중에서도 좋은 재료만 농부가 엄선해 빚은 밀소주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Case Study

더보기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