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2차 해협전투서 중공은 왜 눈엣가시를 빼지 못했나

    • 남도현 DHT AGENCY 대표·군사 저술가

입력 2020.06.26 03:00

남도현의 전쟁과 무기 <3> 중국·대만 관계 고착화한 공중전

남도현 DHT AGENCY 대표·군사 저술가
남도현 DHT AGENCY 대표·군사 저술가
두 달간 이어진 격전 끝에 1950년 5월 1일 중공군(이하 인민해방군을 의미)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최남단의 하이난섬을 점령했다. 이로써 중국(이하 공산당 정부를 의미)은 대륙을 완전히 석권했다. 이제 국민당에 남은 거점은 지난 1949년 12월 7일 단행된 국부천대(國府遷臺)를 통해 자리 잡은 타이완섬뿐이었다. 만일 이곳마저 함락되면 사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국공내전은 중국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될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하이난섬을 평정한 후 곧바로 타이완섬과 마주한 푸젠성으로 이동했다. 타이완 해협은 폭이 150여km에 이르렀지만 지금까지의 전과를 보았을 때 중공군의 상륙은 그다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비록 냉전 중이었지만 미국은 국공내전을 이데올로기 대결이라기보다는 장기간 이어진 군벌들의 헤게모니 다툼 정도로 본 데다 국민당의 부정부패와 무능에 이골이 나서 무관심하게 대했다.

혈투의 장소가 된 작은 섬

이처럼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대만(이하 국민당 정부를 의미)에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소련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정의하고 체제 대결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즉각 참전을 결정했다.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대만 지원에도 나섰다. 반면 중국도 한국전쟁 참전을 염두에 두고 주력 부대를 만주로 이동시켰다. 덕분에 대만은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AIM-9 공대공미사일 장착하고 임무 수행 중인 대만의 F-86 전투기. 1958년 제2차 해협 전투 당시에 중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필살기였다.
AIM-9 공대공미사일 장착하고 임무 수행 중인 대만의 F-86 전투기. 1958년 제2차 해협 전투 당시에 중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필살기였다. /중화민국 공군
1953년 한반도에서의 총성이 멈추자 최대 60만에 이르던 북한 주둔 중공군은 단계적으로 철군에 들어갔다. 그것은 대만에 다시 위기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전력이 확충되고 작전 능력이 향상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미 해군의 저지를 뚫고 타이완을 침공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 참전 대가로 중국은 타이완을 침공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만을 그대로 놔줄 수는 없었다. 마치 신발 속 돌처럼 거추장스러운 이곳을 정리해야 두고두고 후환이 없다고 본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침공이 불가능하니 대신 심리적인 효과를 노려 진먼섬(金門島)을 먼저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울릉도의 두 배 정도 크기인 진먼섬은 타이완에서는 150km 떨어진 반면 본토와의 거리는 4km에 불과해서 마치 중국의 턱밑에 위치한 송곳 같은 존재였다.

1949년 10월에 있던 구닝터우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대만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교전이 이어졌으나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며 잠시 총성이 멈춘 상태였다. 이때 대만은 진지 보강과 더불어 병력을 증파했다.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한 중국은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포격을 개시했다. 이를 제1차 해협 전투라고 하는데, 방금 전에 한국전쟁을 매조진 미국의 입장에서 확전은 곤란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이 진먼섬에 상륙한다면 핵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대만에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서 보호해 주겠다는 당근으로 응전을 자제시켰다. 그래도 중국은 진먼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 1958년 이집트 주도로 반서방 성향의 통일아랍공화국이 성립되고 이라크에서도 혁명으로 왕정이 물러났다. 이 틈을 노려 중동으로 진출을 모색하던 소련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미국의 관심은 중동에 집중되었다.

진먼 섬에 구축된 지하 터널. 국부천대 이후 계속 이어진 중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방어 시설이다.
진먼 섬에 구축된 지하 터널. 국부천대 이후 계속 이어진 중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방어 시설이다. /위키피디아

진먼섬
찰나에 결정된 역사

마침 그해 북한 주둔 중공군도 철군을 완료한 상황이어서 마오쩌둥은 진먼섬을 정복할 기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중국은 대대적인 포격으로 대만의 방어선을 무력화한 후 속전속결로 상륙을 감행해 섬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마침내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포성이 울리며 제2차 해협 전투가 시작되었다. 개전 당일에만 5만 발을 사격했을 만큼 중국의 공격은 거셌지만 대만도 1만2000여발의 포탄을 응사하며 격렬히 저항하고 나섰다.

이번에도 미국은 직접 참전하지 않았지만 외곽에서 엄중하게 엄호에 나섰다. 결국 대만의 끈질긴 저항과 미국의 지원으로 중국은 바다를 건널 수 없었다. 해협은 폭이 4km에 불과했지만 중국에는 커다란 대양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공격을 멈출 수 없었기에 지루한 포격전만 계속되었다. 이런 고착된 상황을 타개하려고 중국은 9월 24일 100여 기의 J-5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대만도 32기의 F-86 전투기를 날려 대응했다.

중국은 전투기의 성능이 우위에 있었고 수적으로도 앞섰기에 자신만만했다. 더구나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경험도 충분했다. 하지만 대만의 F-86은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은 AIM-9 공대공 미사일을 무장하고 있었다. 결국 공중전에서 중국은 17기의 J-5를 포함해 20여 기가 격추됐다. 반면 대만은 3기만 상실한 일방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중전의 여파는 실로 상당했다. 풍전등화의 진먼섬은 물론 대만까지 살린 결정타였던 것이었다. 공대공 미사일이 뭔지도 모르던 상태에서 당한 일방적인 결과에 놀란 중국은 이후 출격을 포기했다.

중국은 기대했던 공군이 넘기 힘든 벽에 부딪히자 더 이상 진먼섬을 목표로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중국은 한 달 동안 47만4000발의 포탄을 날렸음에도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5일 포격을 중단했다. 이후 20년이 넘게 간헐적인 포격이 있었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양측 합쳐 130여 기의 전투기가 벌인 그날의 공중전은 찰나였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양안(兩岸) 관계를 고착화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Insight

더보기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