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기업 9200곳에 1.5%씩 분산 투자 투명 경영·정치로부터의 독립이 힘의 원천"

입력 2020.06.12 03:00

'노르웨이 국부펀드' 윙베 슬링스타드 CEO

'노르웨이 국부펀드' 윙베 슬링스타드 CEO
블룸버그
세계 1위 국부펀드인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윙베 슬링스타드(Slyngstad·58) 대표는 노르웨이 재무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학·경제학·경영학·정치학 등 석사 학위만 넷이다. 학위를 딴 나라도 노르웨이·미국·프랑스로 다양하다. 일본에서도 공부해 동아시아 경제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금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금융이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무게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업을 마친 뒤 그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노르웨이 오두막에서 6개월간 혼자 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산 90조원의 노르웨이 최대 자산 운용사인 스토레브란에셋에서 아시아 주식시장 CIO(최고투자책임자)까지 지냈다. 당시 그는 타고난 주식 투자가로 이름을 날렸다. 1400조원을 굴리며 전 세계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그이지만 연봉은 9억원으로 글로벌 투자은행의 중간 임원 수준이다.

투자 성공 비결은 장기·분산 투자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성공 비결을 묻자 슬링스타드 대표는 장기·분산 투자 원칙을 강조했다. 전 세계 9200여 기업에 1.5% 안팎씩 분산 투자해 리스크(위험)를 줄이는 방식이다. "투자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해 우리가 아는 단 한 가지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일단 투자를 최대한 다양화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는 "올해는 투자를 더 글로벌하게 할 것"이라며 "특히 태양광, 풍력 등 재생 가능 에너지에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에너지 전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투자를 할 때 미·중 무역 갈등이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지정학적 리스크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영국 기업에 대한 투자 비율이 높은데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더라도 투자를 줄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기업 가치만 봅니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저금리 추세가 고착되자 주식 투자 비율을 늘리며 공격적으로 체질을 바꿨다. 이젠 주식 투자 비율이 70%가 넘는다. 이는 다른 국부펀드들의 2배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상황에선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기도 한다. 글로벌 증시 폭락으로 올 1분기 수익률은 -14.6%를 찍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수익을 낼 것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슬링스타드 대표는 "저금리 시대에 부동산이나 인프라는 이미 너무 비쌌고 주식 비율을 높이는 것이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노르웨이 국부펀드의 강점으로 튼튼하고 투명한 거버넌스(지배 구조), 뛰어난 전문가 팀, 정치로부터 독립 등을 꼽는다. 슬링스타드 대표는 2008년부터 13년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올여름 자리에서 내려올 예정이지만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장기 집권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그 때문에 긴 안목에서 분산 투자도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다른 국부펀드도 비슷하다. 반면 한국의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임기가 3년이다. 그마저도 임기를 못 채우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긴 안목의 책임 경영이 어렵고 채권 등 안전 자산에만 돈을 묻게 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로부터 독립성도 중요한 요소다. 슬링스타드 대표도 "독립성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라고 강조했다. 노르웨이는 국가 위기 상황을 제외하고는 국부펀드 자금을 정부가 함부로 쓰지 못한다. 최대 3% 상한선이 있다. 자금은 금융 전문가들이 철저히 금융 관점에서 투자한다. 조직도 중앙은행 아래에 둬 독립적으로 운영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시장 전반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지 않는다. 개별 전문가들에게 투자 전략을 상당히 위임하는 구조다. 많은 바퀴가 각자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셈이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투자 내용을 놓고 질타하는 한국과 대비된다.

노르웨이 국부펀드 CEO(최고경영자) 집무실에서 만난 윙베 슬링스타드 대표.
노르웨이 국부펀드 CEO(최고경영자) 집무실에서 만난 윙베 슬링스타드 대표. /최종석 기자
디지털화·자동화가 새 수익원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기업은 미국의 애플이다. 16조2000억원을 투자해 지분 1.02%(작년 말 기준)를 확보하고 있다.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와 알파벳(구글) 등의 순으로 투자하고 있다. 슬링스타드 대표는 "디지털화, 자동화를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아마존의 시가총액이 브라질 전체 시가총액보다 큽니다. 페이스북은 러시아보다 크죠. 세상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보다 이런 거대 트렌드가 더 중요합니다. 앞으로 디지털화가 새로운 수익원이 될 겁니다." 디지털 유통 혁명을 이끌고 있는 아마존, 알리바바에 거액을 투자한 반면, 월마트는 톱20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전통적 금융사인 JP모건체이스, 비자, 마스터카드 비율도 시가총액에 비해 낮은 편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많이 투자한 기업 중에선 제약, 식품 쪽 경쟁력이 강한 스위스 기업들이 눈에 띈다. 네슬레, 로슈, 노바티스 등이다. 이들은 코로나 사태에도 주목받는 기업이다. 또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대만의 반도체 회사 TSMC의 지분 1.52%(5조3000억원)도 갖고 있다.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톱20에 이름을 올린 삼성전자(5조원)보다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한 것. TSMC는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다. 텐센트, 중국공상은행 등 중국 기업 비율이 3% 정도로 작은 것도 특징이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인데 국가별 투자 규모 순위도 7위에 그쳤다. 슬링스타드 대표는 "우리도 중국에 대한 투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항상 고민"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금융 전문가들은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중국 기업의 투명성, 거버넌스 문제 때문에 투자를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가별로 보면 미국 투자가 40% 수준으로 가장 많다. 미국엔 부동산도 334건(142억달러) 보유하고 있다. 2등과 3등은 일본, 영국. 한국은 10위 수준이다. 슬링스타드 대표는 "앞으로 유럽 비율을 더 줄이는 대신, 미국과 신흥국 비율을 늘릴 것"이라고 했다.

투자기업 경영에도 목소리 낸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지분을 갖고 있는 기업의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끔 투자 제외 대상 기업의 명단을 발표하기도 한다. 특히 강조하는 것은 기업의 지배 구조다. "우린 단순한 투자자가 아닙니다. 전 세계 9200여 기업 주식을 보유한 '유니버설 주주'입니다. 오너로서 배당금을 받을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도 있다고 봅니다. 주요 주주로서 어떻게 하면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책임 경영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게 장기적으로 수익성 있는 회사, 지속 가능한 회사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노르웨이 국부펀드가 이른바 '착한 투자'를 한다는 평가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우린 세상을 개선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장기적인 수익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한 회사가 열대 우림을 없애 당장 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투자자들에게 이익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럼 반대 목소리를 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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