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아 새겨 들어라 내가 거북선을 만든 뜻은 왜구에 겁먹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는 것이다

    •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 회장

입력 2020.05.15 03:00

거북선의 진실 <5·끝> 역사적 의미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 회장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 회장
1792년 정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를 기하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또 규장각의 문신인 윤행임(편찬 담당)과 유득공(감수 담당)에게 “이순신 장군의 삶과 업적과 장군이 남긴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윤행임과 유득공이 충무공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는 작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795년(정조 19년)에 14권 8책에 이르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발간됐다.

이충무공전서 책머리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과 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의 귀선도 두 장이 수록되어 있다. 도화서(圖畫署) 화원이 45도 측면 투시도법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충무공전서 책머리에 있는 귀선지제(龜船之制)는 694글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통제영귀선과 전라좌수영귀선에 대한 주요 치수, 구조, 전투 성능에 대한 설명과 이순신 수사(水使)의 조카 이분(李芬)의 충무공행장(忠武公行狀)의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충무공전서 거북선, 실제와 달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거북선(1795년식 거북선이라고 함)은 기록이 전해 내려오는 분명한 사료인 데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수사로 있던 전라좌수영의 선소(船所·배 대는 곳)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였으므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1795년식 '전라좌수영귀선'을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귀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대부분이다. 또한 전국에 산재해 있는 거북선 모형도 대부분 그런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거북선이 크게 다르다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실제 기록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거북선에 대한 설명문을 비교하여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학자가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을 임진왜란 당시 실제로 전투를 한 거북선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두 가지 거북선 그림이나 설명문(귀선지제)은 실제 전투를 위하여 건조된 전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전투를 할 수 있는 전선도 아니다. 다만 왕권 강화 정책의 하나로 준비된 상징적인 거북선이라고 생각된다.

거북선의 진실
게티이미지
고려의 세계 일류 기술을 승계

임진왜란 당시 실제로 전투를 한 거북선의 역사적 탄생 배경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고려는 원래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개경(개성)의 호족 출신이 건국한 나라이므로 해상 활동이 활발하였고 건국 초기부터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선박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선박, 즉 한선(韓船)에 대한 선형과 건조법은 고려 초기에 이미 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병선으로는 전기의 과선(戈船)과 조선 초의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으로 개량 정비된 맹선(猛船)을 들 수 있다. 과선은 고려의 건국 초기라고 할 수 있는 제8대 현종 원년(1009년)부터 제15대 숙종 3년(1098년)까지 근 100년 동안 고려의 주력 전선으로 여진 해적과 왜구 섬멸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과선은 배의 좌우에 창과 칼을 꽂아 적들이 배에 뛰어오르는 것을 막고 선두에는 쇠로 만든 뿔을 달아 적선을 충파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는 맹선이 개발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맹선의 상갑판을 거북이 등처럼 복개하고 상갑판 위 군사들을 적의 공격에서 보호하는 전선을 개발하였으며, 특별한 맹선이라는 뜻에서 '별맹선(別猛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별맹선은 용머리 및 덮개 위 칼과 송곳만 없을 뿐이지 형태와 개념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매우 흡사한 듯하나 구전으로만 전해 올 뿐 남아 있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건조 후 공 세울 때까지 보고 늦춘 듯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 귀선(거북선)이라는 분명한 배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 때의 조선왕조실록, 즉 태종실록에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3년 2월 갑인조(甲寅條)에는 태종 13년(1413년) 2월 5일 임진강에서 대마도 정벌을 위한 진법 훈련을 할 때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관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건조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80년 전인 조선 초기에 거북선이라는 전선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다. 필자는 이 거북선이 고려 말 창왕 원년(1388년)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 장군과 최무선 장군이 전선 100여 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할 때 건조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한다.

조선 중종 때부터 명종 때에는 왜구의 침탈이 몹시 심했다. 특히 평선(平船)을 사용하던 왜구가 누각을 탑재한 옥선(屋船)으로 침범하자 더 이상 맹선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전선 개발이 절실히 요망되었다. 드디어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 10년(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난 바로 그해에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었다. 이 판옥선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직감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접근전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모체로 하고 고려 시대 왜구와의 수많은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과선과 별맹선의 장점을 결합하여 왜군들이 배에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상갑판을 거북이 등처럼 덮고 그 위에 철첨(鐵尖)을 꽂아 개발한 조선 수군의 신형 전선이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이순신 함대의 2차 출전 중 첫 해전인 사천해전(泗川海戰·1592년 5월 29일)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사천해전'에 의하면 그렇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처음 해전부터 참가한 것 같다. 임금의 윤허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건조한 전선이므로 조정의 문책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공을 세울 때까지 거북선의 참전을 의도적으로 늦게 보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난극복의 상징 거북선 겁먹은 왜군이 신비화

임진왜란 하면 거북선이 너무 강조되고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마치 거북선 때문에 승전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접근전을 염려하여 거북선의 건조를 승인하였으며 거북선이 초기 해전에서 돌격선으로서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고, 거북선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도 아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선은 판옥선이었다. 당시 해전에서 거북선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원균 장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할 때 거북선은 별로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칠천량해전에서 거북선은 모두 격침되고 말았다. 이후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 함대에 거북선이라는 전선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명량해전에서 거북선 없는 13척(나중에 전선 한 척이 추가로 합류)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함을 상대하여 31척을 격침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도 거북선 없이 연달아 대승을 거두었다. 거북선은 지나치게 신비화되어 있다. 거북선을 신비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본 측이다.

그러면 거북선의 가치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 수군의 신무기로서 돌격전을 감행하여 적진을 혼란스럽게 하고 왜 수군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가치가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의 역할과 전공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국난을 타개한 민족의 자긍심으로서 여러 가지 상징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국난극복의 상징으로 영원히 가슴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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