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폐위를 극구 반대한 황희와 주아부, 운명이 갈린 까닭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입력 2020.05.01 03:00

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7> 곧은 신하도 눈 밝은 임금을 만나야 빛난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는 실은 태종 때부터 이미 뛰어난 신하였다. 황희는 공신이 아니면서도 태종의 무한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세자가 계속 음란을 일삼자 태종은 폐세자를 결심하게 되는데 이때 황희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는 태종의 의심을 사는 계기가 됐다. 실록이 전하는 당시 황희의 유배 배경이다.

황희의 명운 가른 태종의 한마디

"태종은 황희가 일찍이 여러 민씨(閔氏)를 제거할 의논을 주장하였으므로 세자에게 붙어서 민씨의 원한을 풀어주고 후일의 터전을 삼으려 한다는 이유로써 크게 성내어 점점 멀리 하여 공조판서에 임명하였다가 다음 해에는 평안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내보내었다. 무술년(1418년)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불러서 돌아왔으나, 세자가 폐위되니 황희도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교하(交河)에 폄출하고는 모자가 함께 거처하도록 허가하였다."

그 후에 태종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황희의 동태를 살폈다. 그때마다 신하들이 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황희가 말하기를 '살가죽과 뼈는 부모가 낳으셨지마는, 의식(衣食)과 복종(僕從)은 모두 성상의 은덕이니, 신이 어찌 감히 은덕을 배반하겠는가? 실상 다른 마음은 없었다' 하면서 마침내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태자 폐위를 극구 반대한 황희와 주아부, 운명이 갈린 까닭은?
일러스트= 김영석

마침내 세종4년(1422년) 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황희를 불러올렸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황희가 달가울 리 없었다. 일단은 한직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강원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다시 실록이다.

"강원도에 기근이 있었는데, 관찰사 이명덕(李明德)이 구황(救荒)의 계책을 잘못 썼으므로 황희로써 이를 대체했더니, 황희가 마음을 다하여 진휼(賑恤)하였다.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숭정대부 판우군 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승진 임명하고 그대로 관찰사로 삼았다." 그리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좌의정에 오르는데, 이때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는다.

"경이 폄소(貶所·유배지)에 있을 적에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漢)나라의 사단(史丹)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셨다."

사단은 중국 한나라 원제 때 시중으로 있던 명신이다.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으로 후사를 삼고자 하니 사단이 극력 간하여 마침내 폐하지 않았다. 태종은 결국 황희가 폐세자를 반대한 것은 사심이 아니라 곧은 마음[直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고 세종 또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당부를 공심(公心)으로 받아들였기에 명정승 황희는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깊은 속마음을 살필 줄 아는 태종이었기에 이런 일도 가능했다.

주아부를 알아본 한나라 문제

한나라 초의 일이다. 주아부(周亞夫)는 장수로 이름을 날렸다. 문제 후원(後元) 6년(기원전 158년)에 흉노가 변경을 대규모로 침입했다. 이에 하내태수 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細柳)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문제가 직접 군대를 위무하기 위해 패상에 도착해 극문에 있는 군영에 이르러 곧장 말을 달려 들어가니 장군 이하 관리들이 말을 탄 채로 영접하러 나왔다. 천자의 선봉대가 그곳에 도착했지만 군영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선봉대가 소리쳐 말했다.

"천자께서 도착하실 것이다." 군문도위(軍門都尉)가 말했다.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천자의 조서(詔書)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문제가 도착했으나 역시 문제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문제는 마침내 사자로 하여금 지절(持節)로써 장군에게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내가 군영으로 들어가 군대를 위무하고자 한다.'

아부는 그때에야 명령을 전하게 해 성벽 문을 열게 했다. 성벽 문을 지키는 관리들이 (황제의) 거기병의 속관에게 청해 말했다.

"장군의 규약에 군영에서는 말을 달릴 수가 없습니다."

이에 천자는 말고삐를 당겨 잡고서 천천히 나아갔고 군영에 이르자 아부가 무기를 소지한 채로 읍(揖)하면서 말했다.

"갑옷을 입은 병사는 절을 하지 않습니다. 청하옵건대 군례(軍禮·갑옷을 입은 병사가 절을 하지 않는 것이 군례다)로써 알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천자는 감동을 받아 용모를 고치고서 수레의 가로 막대를 잡은 채 답례하고 사람을 시켜서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황제인 내가 삼가 장군을 위로하는 것이오." 예를 마치자 군영을 떠나면서 문제가 말했다.

"아! 이 사람이 진정한 장군이도다. 이전에 보았던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마치 아이들 놀이일 뿐이니 그 장군들은 진짜로 습격받는다면 포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랑캐들이) 아부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과연 범할 수 있겠는가?"

문제에 이어 황위에 오른 경제(景帝)는 여러 왕의 권세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조조(晁錯)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가 오초(吳楚) 7국의 난을 불러왔다. 이에 경제는 주아부를 태위로 임명해 장군 36명을 이끌고 가서 오와 초를 공격하게 하니 총 3개월 만에 모두 격파해 궤멸했다.

그가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다시 태위(太尉)라는 관직을 두었다. 5년 뒤인 중원 3년(기원전 147년)에 승진해 승상이 됐고 경제는 그를 더욱 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위하자 주아부는 결연하게 간쟁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경제는 이 일로 말미암아 그를 멀리했다.

이처럼 같은 신하라도 어떤 임금을 만나느냐에 따라 명운이 갈리게 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 서운해하지 않아야 진실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구절의 깊은 뜻을 아는 군주냐 아니냐가 황희나 주아부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논어 암호풀이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얼핏 보면 이 말은 현대사회에 전혀 맞지 않는 말처럼 보일 수 있다. 흔히 자기 PR이 필수라고 하는 오늘날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데도 과연 아무 일 없는 듯이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도덕군자가 되라는 금욕주의적 명제가 아니다. 이 말은 학이(學而) 편 첫 세 문장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흥미롭게도 학이 편을 마무리하는 맨 마지막 문장이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신이 남들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즉 뒷부분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사람을 잘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자 힘쓰라는 말이다. 또 이인(里仁) 편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다.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자리에 갈 준비가 됐는지를 걱정하라.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하게 되려고 노력하라.”

그렇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하나는 다움[德]이고 또 하나는 능력[才]이다. 공자는 이 두 가지를 나란히 중요시했지 능력을 제쳐놓고 다움만을 강조한 적은 없다. 헌문(憲問) 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하지 못함을 걱정하라!”

또 위령공(衛靈公) 편이다.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파하지 않는다.” 자, 자신의 능력과 인품을 키우는 데 온 힘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과연 서운해할 시간조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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