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누룩 나가신다, 일본 누룩 꿇어"

입력 2020.05.01 03:00

박순욱의 술술기행 <6> 화양(풍정사계) 이한상 대표의 '누룩 경영'

박순욱 선임기자
박순욱 선임기자
"누룩은 단순한 발효제가 아닙니다. 전통술의 전부나 마찬가지죠. 술 맛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원료인 쌀 덕분이기보다는, 다양한 미생물이 들어있는 누룩을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요즘 대부분의 양조장이 누룩 대신 사용하는 입국(개량 누룩)은 과학화, 표준화돼 있어 대량생산이 가능합니다. 한 번에 몇 t도 만듭니다. 하지만 누룩은 기껏해야 100㎏, 200㎏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니 누룩을 쓰는 술은 대량생산 자체가 안 됩니다. 효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보면, 입국을 쓰지 않고 누룩을 쓰는 것은 고속도로를 차로 이동하지 않고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일 겁니다."

한국 전통술의 핵심은 누룩

춘(약주), 하(과하주), 추(탁주), 동(증류식 소주) 계절별 술인 '풍정사계'를 만드는 충북 청주의 양조장 화양의 이한상 대표는 전통술을 빚는 양조인 중 대표적인 '누룩 예찬론자'이다. 제대로 된 누룩을 직접 만들어 약주를 빚는 데 무려 10년이 걸렸다. 그래서 만든 것이 2015년에 나온 풍정사계의 간판 술인 '춘' 약주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만든 덕분일까? 풍정사계 춘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청와대 만찬 행사를 비롯해 정부가 주관하는 주요 행사에 단골 건배주로 불려가고 있다. 인터넷 판매는 수시로 품절돼 지금은 한 달에 한 번만 날짜와 시간을 정해 팔고 있다.

화양 이한상 대표가 누룩을 법제하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화양 이한상 대표가 누룩을 법제하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박순욱 기자

이한상
풍정사계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풍정사계 춘에는 '누룩 술(누룩이 많이 들어간 술)' 맛에 배어 있는 고약한 냄새인 누룩취가 없다. 그뿐 아니라, 오래 숙성시킨 화이트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은 풍미를 갖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럼에도 풍정사계의 연간 매출은 3억~4억원을 넘지 못한다. 풍정사계를 풍정사계답게 만드는 누룩 생산량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만드는 데 3개월 정도 걸리는 데다 자동화가 안 돼 있어 대량생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한상 대표는 "초복과 중복 사이, 양력으로는 7월 즈음에 일 년 동안 사용할 누룩을 한 번에 만든다"며 "한 달 정도면 누룩이 띄워지지만, 두 달 정도 더 말려야 잡내가 제거된다"고 말했다.

풍정사계를 만들 때 사용하는 누룩은 녹두 10%, 밀 90%로 만든다. 이를 '향온곡'이라 한다. 이한상 대표가 옛 문헌상으로만 전해오는 향온곡을 직접 만들어 술 빚기에 처음 성공했다. 그러자 도처에서 '향온곡이 뭐냐? 어떻게 만드냐?'며 전통주 업계에서 한때 향온곡 만들기 붐이 일기도 했다. 누룩은 공기가 잘 통하는 그늘에서 오랫동안 잘 띄우는 것 못지않게 그다음에 잘게 빻아 '법제'를 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일본판 누룩이 판치는 전통주업계

―누룩 법제가 무엇인가?

"법제란 잘 말린 누룩을 술 빚기 2~3일 전쯤에 콩알 크기 정도로 빻아서 햇볕과 밤이슬을 맞혀가며 살균과 냄새 제거, 표백을 거치는 과정을 말한다. 누룩은 아무리 잘 띄워도 누룩 냄새가 남아있기 때문에 햇볕을 쬐어 잡균을 제거하고 탈취 과정을 거쳐야 누룩취 없는 술을 만들 수 있다."

―밤에는 수분 공급 위해 이슬을 맞히나?

"직접 이슬을 맞게 하지는 않는다. 요즘 공기가 옛날처럼 깨끗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천장으로 하늘을 가린 옥상에 널어두면 찬 공기가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수분이 누룩 속으로 스며든다. 밤에 스며든 습기는 낮에 햇볕을 맞아 빠져나가면서 누룩취 같은 나쁜 냄새도 같이 나가게 된다. 법제를 잘해야 누룩취가 날아간다."

풍정사계
화양
―'누룩 만들기'가 너무 까다롭다.

"그래서 개량 누룩인 입국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국은 일본이 원조다.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술 명맥을 끊은 장본인이 일본인데, 전통술 만든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본의 입국 기술을 배워와 술을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입국은 술 발효에 필요한 한 가지 곰팡이만 배양해 만들기 때문에 우선 만들기가 쉽고, 누룩취도 적다고 알려져 있다."

―입국의 단점은 뭔가?

"입국을 쓴다고 해서 누룩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룩취와 비슷하게 나쁜 냄새가 나는 입국취가 있다. 다만, 입국 자체를 적게 넣어 고약한 냄새를 덜 나게 할 뿐이다. 입국의 장점은 다른 데 있다. 자동화, 표준화돼 있어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한 번에 1t, 5t도 만들 수 있다. 한 번에 겨우 몇 백㎏ 만들 수 있는 누룩과는 생산성 측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술맛 깊게 하려면 전통 누룩 써야

―누룩의 대량생산은 불가능한가?

"현재의 기술로는 어렵다.나로서도 안타깝다. 그러나 언젠가는 누룩도 표준화, 자동화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나의 소명은 누룩의 대량생산이 아니다. 그럴 능력이 없다. 다만, 전통주 업계에서조차 외면당하는 누룩을 고수한 술을 계속 만드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그래서 누룩의 존재 가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부가 하든, 대기업이 하든 '누룩의 현대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누룩의 장점은 무엇인가?

"누룩이 입국에 비해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고 기간도 훨씬 길지만, 술맛을 다양하고 깊게 하는 건 입국이 따라올 수 없다. 왜냐면 만드는 과정에서 공기 중에 떠다니는 워낙 다양한 미생물들이 누룩에 달라붙어 술맛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양조인들은 항상 같은 조건, 같은 재료로 술을 만든다고 여긴다. 그러나 양조장의 어제 공기가 다르고 오늘 습도 상태가 다르다. 누룩 만들기가 그렇다. 달라붙는 미생물들이 매번 다르니 누룩 상태가 늘 조금씩 차이가 있다. 남들이 많이 마시는 술, 천편일률적인 술맛이 좋다는 소비자는 입국 술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 다른 나만의 취향'을 존중하는 술이 좋다는 사람이라면, 누룩 술이 더 낫다고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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