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2008년에 지은 죗값 이번엔 갚아라"

입력 2020.05.01 03:00

[이철민의 Global Prism] <33> '해결사' 요청 받은 월스트리트 은행들의 고민

이철민 선임기자
지난달 1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대 은행 대표들을 백악관에 한데 모았다. 미국 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1000명을 넘어선 날이었다. 참석자들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최고경영자(CEO)인 브라이언 모이니핸과 시티그룹 CEO 마이클 코뱃, 골드만삭스 CEO 데이비드 솔로몬, 웰스파고 CEO 찰스 샤프, 세계 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CEO 스티븐 슈워츠먼 등 흔히 월스트리트라고 하는 미 은행과 금융권의 대표 선수 10여 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4주 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사회적 봉쇄로 자금난을 겪는 소기업과 미국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돈을 빌려주라고 참석자들에게 주문했다. 은행 대표들은 "은행에 돈이 충분해 이 위기에 대처할 준비가 잘 돼 있다"고 화답했다. 모이니핸은 "우리는 미국 경제의 핵심인 중소기업들이 코로나 사태를 잘 이겨내도록 도우려고 여기 모였다"고 했다. 코뱃도 "이번 사태는 금융 위기가 아니며, 은행과 금융권은 아주 건강하다"고 했다.

트럼프, 은행에 '돈 많이 풀어라'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3월 27일 2조달러를 비롯해 지금까지 약 3조달러의 경기 부양책을 발표했다. 이 중에서 코로나의 직격탄을 받은 항공·여행 업계에 대한 보조금 5000억달러와, 중소기업 직원들의 고용 보장을 위한 약 7000억달러의 급여보호프로그램(PPP) 보조금은 은행이 통로가 돼 기업들에 대출 형태로 지급된다. 미 연방정부가 은행들을 통하지 않고는 이 천문학적 돈을 폐업 위기에 몰린 미 전역 중소기업에 신속하게 전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주범(主犯)'으로 비난받던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졸지에 경기 부양 '해결사' 요청을 받은 것이다. 이 은행들은 당시 비(非)우량주택담보채권(서브프라임모기지)과 관련해 파생 상품을 무분별하게 거래했다가 미 주택 시장이 붕괴하는 바람에 전 세계 금융 위기를 초래했고, 연방정부에서 70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살아났다.

이날 최대 은행 대표들이 트럼프와 미국인들 앞에서 "돈은 넉넉하니 대출은 걱정 말라"고 말할 만도 했다. 이 은행들은 1조3000억달러 규모의 보통주와 2조9000억달러어치의 유동 자산을 보유해 유동성은 충분하다. 금융 위기 이후, 미 연방은행은 시중은행들의 총자산 대비 자본 비율을 더욱 강화했고, 경기 침체와 같은 위기 상황 시 재무 건전성을 평가하는 스트레스 테스트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그 결과 작년 6월엔 "은행들이 자기자본 비율 9%를 확보한 것은 물론이고, 만일의 예금 인출 사태에도 대출 수요를 충족할 자원을 충분히 확보했다"는 판정도 내렸다. 미 은행에 쌓아놓은 기업과 개인의 예금액도 처음으로 1조달러를 넘어섰다. 미 경제 잡지 포브스는 "가장 큰 열네 은행만 따져도 최소 5000억달러의 신용 대출을 미 기업에 제공할 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1일 백악관 캐비닛룸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은행·금융권 인사들과 만나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과 미국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출을 당부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브라이언 모이니핸 뱅크오브아메리카 최고경영자(CEO), 트럼프 대통령, 레베카 레이니 미 지역은행연합회 CEO, 켈리 킹 트루이스트 뱅크 CEO. /게티이미지
속앓이하는 은행들

하지만 지난 14~16일 발표된 BoA와 시티그룹, JP모건체이스,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미 최대 여섯 은행의 1분기 실적을 들여다보면 결코 상황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은행마다 1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에 비해 절반 이상 사라졌다〈그래픽 참조〉. JP모건이 대출 손실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69억달러 책정한 것을 비롯, 여섯 은행이 대손충당금을 254억달러로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350% 늘어난 규모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경제적 봉쇄가 계속되면 기업과 개인의 채무 불이행 사례가 급증하리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미 은행 대표들의 '대출 장담'과는 달리, 은행들이 실제로 신뢰할 만한 경기 부양 파트너가 될 것인지는 실제로 발생하는 대출 손실 규모와, 이미 0.25%로 떨어진 연준의 기준 금리 아래서 은행들이 낼 수 있는 수익 구조에 달렸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경기가 계속 악화되면 대출 손실과 이에 대비한 대손충당금도 계속 불어날 수밖에 없다. 또 은행들은 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인 예대 마진으로 수익을 내는데, 지금과 같은 초(超)저금리 상황에선 이익이 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가계 부채는 이미 코로나 이전인 2월에 사상 최고인 14조1500억달러를 기록했다. 이런 데다가, 코로나가 확산된 3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5주 동안엔 6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잃어, 실업수당 청구자는 2600만명에 달한다(23일 미 노동부 발표). 이 탓에, 미 임대 생활자의 3분의 1이 4월 임대료를 내지 못했다. 앞으로 자동차 구입 할부금과 신용카드 사용료, 주택과 학자금 융자에 따른 상환 연체가 계속 늘어날 것이 뻔하다. BoA는 최근 "소기업 고객의 6분의 1이 채무 상환을 미뤘다"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기업들마다 신용 한도까지 대출해 여섯 은행의 기업 대출 규모만 4조달러가 됐다. 미국의 많은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미 경제가 경기 침체에 들어갔다고 보며, 2분기에는 국내총생산(GDP)이 40% 감소하고 실업률이 20%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따라서 여섯 은행만 따져볼 때 기업 대출 총액의 0.63%에 불과한 현재의 대손충당금은 앞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리라는 것이다.

영업 환경 나빠 제 역할 할지 의문

예금액이 1조달러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현금 확보에 나선 미 기업들이 은행으로부터 대출한 돈을 다시 예금한 탓이다. 시티그룹의 기업 예금액 670억달러 중 3분의 1은 이렇게 신용 대출한 것이다. 미 상장 기업들은 1분기에만 2230억달러를 신용 대출했다. 하지만 스탠다드차타드의 파이낸스 부문 책임자 앤디 핼퍼드는 "초저금리 상태에서 기업들이 언제까지 은행에 현금을 보관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예대 마진에 따른 수익이 줄어드는 대신, 1분기에 증권 거래에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는 변동성이 높은 시장에서 거래량이 많아 번 것이라 지속적일 수 없다. 또 기업 인수·합병(M&A)과 채권 발행, 기업 공개(IPO),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기업 금융도 크게 위축됐다.

이 탓에 올 들어 미 은행 주가는 엄청나게 하락했다. 연초 대비 미 500대 우량 기업의 주가지수인 S&P 500 지수는 10.9% 빠졌지만(4월 27일 기준), 주요 은행 24곳 지수인 KBW 지수는 35.67%나 빠졌다. 미 신용 평가사인 S&P는 미 은행 산업이 2019년 1950억달러 흑자에서, 2분기부터 시작하는 1년 동안 150억달러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했다.

금융 위기 이후 제정된 2010년의 도드-프랭크법이 미 은행들의 적극적인 대출을 막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 법은 은행의 지불 능력을 강화해 금융 위기를 막겠다는 취지에 맞게 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을 높였고 은행이 자기 돈으로 증권 거래를 하거나 고위험·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다 보니 은행들이 정작 미국인과 기업들이 가장 돈을 필요로 할 때에 재무 건전성을 우선시하면서 돈 빌려주기를 꺼리는 문화가 생겼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집에선 밀리초 트레이딩 불가능… '소득이냐 건강이냐' 선택에 몰린 월스트리트맨

뉴욕시가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에 휩싸이면서 뉴욕 맨해튼에 본사를 둔 미국 은행들은 잇달아 재택근무나 분산 배치와 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 언론은 “매출 비중이 큰 주식·채권 트레이더들과 세일즈 인력은 출근 압력을 받고 있다”며 “개인 성과와 고액 보너스가 연계돼 있어 건강과 소득 중 선택해야 한다”고 전했다.

지난달 말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맨해튼 본사의 5층 트레이딩룸에서 글로벌 세일즈 파트 임원은 출근한 직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칭찬했다. 또 한 임원이 직원들과의 통화에서 “집에서는 철저히 자가 격리를 하고, 산책도 안 나가고 수퍼마켓에도 안 가느냐. 어디서든 옮을 수 있는데”라고 말한 것이 CNBC 방송에 공개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정부가 금융 서비스를 필수 경제활동으로 분류하자, 이익을 우선하는 월스트리트 은행들이 넓은 재량권을 행사한다”고 전했다. BoA 본사 트레이딩룸에선 코로나 감염자가 10여 명 발생했다.

JP모건도 지난달 9일부터 증권 트레이더들을 뉴욕시 주변 장소 3곳으로 분산 배치하려다가 기술적 문제로 포기하고, 맨해튼 본사로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바로 그날 감염자가 1명 발생했지만 은행 측은 수일간 쉬쉬했다. 이후 3주간 약 20명이 감염됐고 또 다른 65명이 격리 조치됐다. 하지만 S&P500 지수가 최대 폭락과 반등을 한 3월 12일과 13일 이틀간 옵션거래 부서에서는 시장 변동성을 활용해 15억달러를 벌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이런 사실을 보도하자, JP모건 측은 “트레이더의 80%가 원격 근무하며, 출근한 직원들도 6피트(약 1.8m)씩 떨어져 일한다”고 해명했다.

월스트리트맨들은 종종 밀리초(1000분의 1초)를 다투는 거래를 하기 때문에 집에 설치한 트레이딩 장비가 본사에 수십억달러를 들여 구축한 IT(정보기술) 인프라를 대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골드만삭스의 데이비드 솔로몬 최고경영자(CEO)는 CNBC 인터뷰에서 “앞으로 기술이 더욱 편리해져 근무의 탄력성을 제공하기까지는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적응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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