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4.03 03:00
[남도현의 전쟁과 무기] (2) 히틀러의 떡밥 받은 스탈린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때까지 전 세계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정의한다. 각각의 전쟁들은 프랑스 전역과 곧이어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처럼 직접 연계된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성격을 달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의 전쟁과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교전국들의 동맹 관계 등을 제외한다면 완전히 별개였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은 같은 시기에 벌어진 독자적 성격을 가진 여러 전쟁의 집합이다. 이러한 여러 전역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장은 단연코 독소(獨蘇)전쟁이다. 1941년 6월 22일부터 1945년 5월 4일 사이에 독일과 소련이 주도한 이 전쟁은 한마디로 강철과 강철이 격렬하게 충돌한 사변이었다. 인류사에서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아니 재현되어서는 곤란한 비극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일단 4년 동안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어간 이가 최소 추산으로도 3000여만명에 이른다. 독소전쟁을 제외하고 이 정도 짧은 시간 동안 인위적으로 많은 사람이 사라져간 사례는 인류사에 없다. 전쟁 규모가 커지면 불가피하게 전투 공간 내에 위치한 민간의 희생도 늘어난다. 독소전쟁은 여기에 더해 편협한 인종주의와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야만적 학살이 자행되면서 희생이 더욱 컸다.
이런 무서운 결과를 낳은 독소전쟁은 독일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소련도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먼저 공격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서로를 가장 적대시하던 사이였기에 이런 준비는 당연했다. 소련은 1939년 초에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폴란드에 다자간 동맹을 제안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스탈린이 속은 이유
그러던 8월 23일, 이 견원지간이 불가침조약을 맺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때 독일이 동부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베사라비아에 대한 소련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이는 양면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히틀러는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 노골적으로 쓴 것처럼 소련 정복에 대한 야욕을 한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1940년 11월 베를린을 방문한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게 영국을 처단한 후 연합국의 식민지를 소련에도 나누어 주겠다는 거짓 제안을 하며 스탈린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아무리 독일이 본심을 속였다 하더라도 동맹국을 포함해서 350여만에 이르는 거대한 군대의 움직임을 감출 수는 없었다. 1941년 봄부터 일선에서 독일군 행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올라왔고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간첩들도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타전했다. 특히 도쿄에서 암약하던 이중 첩자 조르게는 6월 22일 새벽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된다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위기감을 느낀 총참모장 주코프가 전쟁이 확실하니 선제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은 그런 정보는 소련과 독일 사이를 이간하기 위한 영국의 책략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독일을 자극하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오히려 스탈린은 한술 더 떠 독일로부터 언제쯤 후속 연락을 받을 수 있는지 수시로 몰로토프를 채근했다. 그 정도로 히틀러가 던진 떡밥의 효과는 대단했다.
결국 이런 오판은 소련에 최악의 결과가 되었다. 비록 4년간의 끈질긴 저항 끝에 승리했으나 그 대가로 독일보다 훨씬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전쟁 개시 3개월 동안 점령당한 땅을 탈환하는 데 3년이 걸렸다는 점만으로도 구조적으로 소련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전쟁 초기에 그 정도로 밀리지 않았다면 결과가 상당히 달랐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판이 불러온 비극
히틀러에게 철저히 속은 스탈린의 오판과 별개로 만일 소련군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독소전쟁 초기에 굴욕은 면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군부의 선제공격 요청을 받아들였어도 정작 당시 소련군은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의 가동률도 형편없어 공격에 나설 상황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선공을 주장했던 주코프가 시찰을 나갔다가 경악했을 정도였다.
1937년에 있었던 대숙청 여파로 소련군의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결과였다. 원수 5명 중 3명이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을 정도였으니 그 이하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결과가 1939년 겨울에 핀란드를 침략했을 때 당한 엄청난 망신이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독일에 대한 선공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어 준비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했는데 놀랍게도 이 또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참호, 진지 같은 방어 시설 구축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당시 소련은 군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숙청의 피바람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다른 일은 관심 밖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반면 독일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연전연승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고 소련은 개전 6개월 만에 병력 무려 500만명이 전사, 실종, 포로가 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패전을 기정사실화했을 정도였다. 당시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처럼 항전을 펼친 곳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2000㎞에 이르는 전선 전체로 본다면 극히 예외적 사례였고 전쟁 판도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스탈린은 수많은 이를 형장의 이슬로 보내며 권력 강화에 골몰했을 만큼 의심이 많았다. 그런 그가 그토록 미워했던 히틀러에게 쉽게 속아 전쟁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만일 보고를 신뢰하고 대비를 했다면 인류사 최악의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지도자의 오판과 이를 끝까지 믿는 잘못된 신념이 불러온 참혹한 결과는 두고두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서운 결과를 낳은 독소전쟁은 독일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소련도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먼저 공격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서로를 가장 적대시하던 사이였기에 이런 준비는 당연했다. 소련은 1939년 초에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폴란드에 다자간 동맹을 제안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스탈린이 속은 이유
그러던 8월 23일, 이 견원지간이 불가침조약을 맺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때 독일이 동부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베사라비아에 대한 소련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이는 양면 전쟁을 피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히틀러는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 노골적으로 쓴 것처럼 소련 정복에 대한 야욕을 한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1940년 11월 베를린을 방문한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게 영국을 처단한 후 연합국의 식민지를 소련에도 나누어 주겠다는 거짓 제안을 하며 스탈린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아무리 독일이 본심을 속였다 하더라도 동맹국을 포함해서 350여만에 이르는 거대한 군대의 움직임을 감출 수는 없었다. 1941년 봄부터 일선에서 독일군 행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올라왔고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간첩들도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타전했다. 특히 도쿄에서 암약하던 이중 첩자 조르게는 6월 22일 새벽에 독일의 침공이 개시된다고 정확하게 보고했다.
위기감을 느낀 총참모장 주코프가 전쟁이 확실하니 선제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은 그런 정보는 소련과 독일 사이를 이간하기 위한 영국의 책략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독일을 자극하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오히려 스탈린은 한술 더 떠 독일로부터 언제쯤 후속 연락을 받을 수 있는지 수시로 몰로토프를 채근했다. 그 정도로 히틀러가 던진 떡밥의 효과는 대단했다.
결국 이런 오판은 소련에 최악의 결과가 되었다. 비록 4년간의 끈질긴 저항 끝에 승리했으나 그 대가로 독일보다 훨씬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전쟁 개시 3개월 동안 점령당한 땅을 탈환하는 데 3년이 걸렸다는 점만으로도 구조적으로 소련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전쟁 초기에 그 정도로 밀리지 않았다면 결과가 상당히 달랐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판이 불러온 비극
히틀러에게 철저히 속은 스탈린의 오판과 별개로 만일 소련군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독소전쟁 초기에 굴욕은 면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군부의 선제공격 요청을 받아들였어도 정작 당시 소련군은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병사들의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의 가동률도 형편없어 공격에 나설 상황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선공을 주장했던 주코프가 시찰을 나갔다가 경악했을 정도였다.
1937년에 있었던 대숙청 여파로 소련군의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결과였다. 원수 5명 중 3명이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을 정도였으니 그 이하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결과가 1939년 겨울에 핀란드를 침략했을 때 당한 엄청난 망신이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독일에 대한 선공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방어 준비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했는데 놀랍게도 이 또한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참호, 진지 같은 방어 시설 구축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당시 소련은 군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숙청의 피바람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다른 일은 관심 밖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반면 독일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연전연승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고 소련은 개전 6개월 만에 병력 무려 500만명이 전사, 실종, 포로가 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패전을 기정사실화했을 정도였다. 당시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처럼 항전을 펼친 곳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2000㎞에 이르는 전선 전체로 본다면 극히 예외적 사례였고 전쟁 판도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스탈린은 수많은 이를 형장의 이슬로 보내며 권력 강화에 골몰했을 만큼 의심이 많았다. 그런 그가 그토록 미워했던 히틀러에게 쉽게 속아 전쟁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만일 보고를 신뢰하고 대비를 했다면 인류사 최악의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지도자의 오판과 이를 끝까지 믿는 잘못된 신념이 불러온 참혹한 결과는 두고두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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