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감자기근은 어떻게 대서양 건너 미국 번영을 낳았는가

    •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입력 2020.03.20 03:00 | 수정 2020.03.23 15:59

[홍춘욱의 경제사 여행] (6) 질병이 경제에 미치는 나비효과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감자 기근 추모 전시관. 당시 이 기근은 유럽 경제에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감자 기근 추모 전시관. 당시 이 기근은 유럽 경제에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위키피디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이하 '코로나 19')로 세계 금융시장이 일대 패닉에 빠졌다. 코로나 19 감염 환자가 아시아 일부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과 북미 대륙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외부 충격이 앞으로 경제에 어떤 '항구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막대한 인명 희생뿐만 아니라 생활 패턴 변화 가능성이 높아질 때, 경제 전체에 예상 못 한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잦다. 그 가장 대표적 예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였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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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감자 기근으로 미국 이민 급증

먼저 아일랜드 감자 기근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1500년 이후 잉글랜드의 임금 대비 지대(地代) 비율을 보면 1900년을 비교 기준으로 삼았을 때 1500년부터 1800년대 말까지 일관되게 토지 지대가 근로자들 임금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상승세를 보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그래프 참조〉. 다시 말해, 토지를 보유한 귀족과 젠트리 계층이 근로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부유해졌다고 볼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500년 이후 400년에 걸쳐 지대가 상승한 것은 인구 압력 때문이었다. 잉글랜드(및 아일랜드) 인구는 1500년경 470만명 전후에 불과했으나, 1700년 1000만명을 돌파한 데 이어 1820년경에는 2800만명 이상 수준에 도달했다. 이 같은 폭발적 인구 증가에도 농지의 면적 확대는 제한적이었기에, 경제에 두 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첫째,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수요 증가로 곡물 가격이 상승했다. 둘째, 노동력이 풍부해진 만큼 토지 가격, 특히 지대(地代)가 임금보다 급등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잉글랜드 귀족과 젠트리 계급에게 아일랜드의 가치, 아니 정확하게는 토지의 가치가 올라갔다.

"아일랜드는 언제나 서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에 복속되어 있던 아일랜드 국민은 주권의 독립과 자치권을 박탈당하였고, 잉글랜드 부재지주(不在地主)가 주도하는 농업 경영 시스템하에서 공납을 바쳐야만 하였다. (중략) 이런 빈곤 속에서도 아일랜드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심지어 이웃 잉글랜드보다 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아일랜드 인구는 200만을 조금 넘는 수준에서 800만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세계인구의 역사' 중에서)

경제적 빈곤이 심화되고 있음에도 아일랜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은 감자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지주들에게 밀을 다 빼앗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감자를 가지고 생계를 이어 나갔다. 감자의 생산성이 아주 높은 데다, 감자의 영양분이 높았기에 이게 가능했다. 그러나 한 작물에만 전적으로 생존을 의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지속적인 인구 증가가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었다. (중략) 감자 마름병(Phytophthora infestans)이 1845년 발병하며 큰 피해를 입힌 데 이어, 1846년에는 감자 농사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 이 때문에 1846~1847년 겨울에는 기근, 빈곤, 절망적인 상황에 쫓긴 대량 이민, 그리고 티푸스 같은 전염병의 유행이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쫓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구원의 땅'은 신대륙이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끝없는 독립 투쟁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이민선을 타기 시작했는데, 이게 잉글랜드의 패권을 끌어내리는 핵심적 기폭제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임금 대비 지대 비율 / 대서양 횡단 선박 운임 지수 추이
선박 운임 하락이 이민자 유입 기폭제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 벌어졌을 때, 북미의 신생 독립국, 미국은 정반대 상황이었다. 토지는 넓은 반면 인구는 적었다. 1790년 첫 번째 인구센서스에서 420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 가운데 6분의 1인 70만명이 흑인 노예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노동력을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서양 횡단 항해는 비쌌을 뿐만 아니라 위험했다. 따라서 미국 인구는 19세기 초까지 급하게 늘지 않았고, 또 인력 부족으로 광대한 토지가 제대로 경작되지 못한 채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1850년을 전후해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는 감자 기근으로 유럽에서 강력한 이민 압력이 발생한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선박 운임의 급격한 하락이었다. 1820년대를 고비로 대서양 운임이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변화 뒤에는 증기선 발명이 있었다. 1820년에 비해 1860년대 운임은 거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고향을 떠나 이주하려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1850년대에만 아일랜드인 약 18만명이 미국에 도착했으며 이후에도 이 숫자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이 덕에 미국은 19세기 후반 강력한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풍부한 토지가 차례대로 경작되고, 증기선을 이용해 곡물과 면화가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산업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20년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257달러에 불과했지만, 1860년에는 2178달러로 늘어나고 1890년에는 3392달러를 기록해 잉글랜드(4009달러)를 바짝 추격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아일랜드 감자 기근이 없었더라도 미국이 세계 패권 국가가 될 잠재력은 충분했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가파른 경제성장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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