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평평하고 육중했던 거북선이 날렵한 왜선보다 빨랐던 이유

    •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회장

입력 2020.03.20 03:00

[거북선의 진실] (4) 몇 명이 전투하고 몇 명이 노저었나

경상남도가 '이순신 프로젝트'의 하나로 제작한 3층 구조의 거북선 모형 측면도.
경상남도가 '이순신 프로젝트'의 하나로 제작한 3층 구조의 거북선 모형 측면도. / 경상남도
거북선은 지휘선이다, 아니다 하는 논란이 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거북선은 지휘선이 아닌 돌격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순신 장군 자신이 "거북선의 역할은 돌격선(突擊船)"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 바 있고 거북선의 지휘관을 돌격장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1592년) 4월 30일에 선조 임금에게 '경상도를 구원하러 가는 일을 아뢰는 계본' 즉,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이라는 장계를 올렸다. 여기에는 전라좌도수군의 함대 편성에서 '돌격장 본영군관 이언량(突擊將 本營軍官 李彦良)'을 배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돌격장은 거북선(龜船)의 선장(船將)을 이르는 말이고, 이후로 "영귀선의 돌격장은 이언량"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침입 후, 첫 해전(제1차 출전)에서 대승(大勝)을 한 후 임금에게 전과(戰果) 보고서인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이라는 장계를 올렸다. 여기에 거북선이 출전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돌격장이며 신의 군관인 이언량은 왜적의 대선 1척을 충돌해 파괴했습니다(突擊將臣軍官李彦良 撞破倭大船一隻)"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제2차, 제3차 등 계속되는 출전보고서에는 이언량(李彦良), 이기남(李奇男), 박이량(朴以良) 등이 돌격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순신 장군 자신이 거북선의 지휘관을 돌격장이라고 불렀으며, 거북선을 돌격선으로 활용하였다.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회장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회장
왜군 접근전에 대비한 전선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화약과 화포를 개발하여 화기로 무장한 고려의 전함이 왜구 상대 해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우왕 6년(1380년)의 진포해전과 우왕 9년(1383년)의 관음포해전이다. 특히 진포해전은 세계 최초 함포해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중세의 해전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육상전투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양측이 전선을 조종하며 활을 쏘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서로의 배에 뛰어올라 창칼을 겨누며 육박전을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왜군의 전술도 전통적 등선 육박전, 즉 적선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배를 타고 있을 뿐이지 육전과 동일한 전술이었으며 왜군은 이러한 접근전에 익숙하였다.

조선 수군의 전술은 판옥선의 우수한 화력으로 적선이 접근하기 전에 먼 거리에서 당파분멸(撞破焚滅)하는 전술이었으며 왜의 수군에게는 전혀 익숙하지도 않고 대응책도 전무하였다. 구체적인 예로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戰船)인 판옥선과 왜군의 주력 군선(軍船)인 안택선의 승무원 구성을 살펴보자. 안택선은 노수 90명에 전투원 200명 정도로 전투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투원 구성도 대부분 근접 전투원으로 근접 전투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 판옥선은 대략 노젓는 격군(格軍) 100여 명에 포격수 36명과 사부(射夫·궁수) 20~30명 정도로 포격전과 원거리 공격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의 승선 인원
왜군에게 돌진하며 공포심 유발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해전에서 왜의 수군이 그들의 장기이며 전통적 전술인 등선 육박전을 수행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왜의 수군이 조선 전선에 뛰어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조선 전선의 갑판 위에서 조선 수군과 왜군이 육박전을 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접근전을 걱정했고 왜군의 접근전에 대비하여 개발한 새로운 전선이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적진을 종횡무진 출입하여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전투 초기에 적의 함대 안을 돌파하고 들어가 적장이 타고 있는 기선(旗船), 또는 장군선(將軍船)에 바짝 접근하여 함포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진을 혼란스럽게 하고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임진왜란 초기 연전연승하는 육군에 반하여 연전연패하던 일본의 수군은 조선의 수군에 대한 열등감과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바다의 괴물처럼 나타난 거북선을 보고 더욱 큰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돌격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기동력이다. 돌격선으로서 거북선은 실제 전투 시 방포(放砲·함포사격)와 같은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기동력이 더욱 중요하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의 특성과 구성원 각각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으며, 전투 시 전투원보다도 노 젓는 군인(격군)들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속히 적선에 접근하여 함포와 불화살 등으로 적선을 파괴하고 다음 목표를 향하여 신속히 이동하도록 하는 것이 격군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격군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잘 기술되어 있다.

판옥선은 노 젓는 격군의 수가 100여 명 된다고 하였는데, 거북선의 격군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전라좌수영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운영 상황을 기록하여 왔는데 이것을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즉 전라좌수영의 영지(營誌)라고 한다. 호좌수영지 필사본에는 경주이씨익제공파(慶州李氏益齊公派)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과 충민사 필사본(忠愍祠 筆寫本)의 두 가지 필사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두 가지 필사본 모두에 거북선에 대한 약간의 사료와 함께 승선 인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호좌수영지의 두 가지 필사본에 기록되어 있는 거북선의 승선 인원은 표에 정리되어 있다. 표를 보면 호좌수영지의 경주이씨 소장 필사본의 내용과 충민사 필사본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부와 능로군(能櫓軍·격군)의 군병 수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필요에 따라 사부와 능로군의 사람 수를 증감한 것으로 보인다. 능로군은 예비 인력을 고려한 것 같다.

이순신 장군 일러스트
기동력 위해 노 젓는 군인이 3분의 2

이상의 사료와 기록을 종합하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승선 인원은 150~160명 정도 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판옥선의 승선 인원과 거의 동일하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모체(母體)로 개발된 전선임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의 승선 인원을 보면 노를 젓는 능로군(격군)의 수가 총 승선 인원의 3분의 2 정도가 된다. 이처럼 노를 젓는 격군의 수가 전투 요원의 수보다 훨씬 많은 이유는 해전의 승패는 전선의 기동력에 좌우되며 전선의 기동력은 격군들의 역할에 좌우된다고 이순신 장군이 봤기 때문이다.

올림픽 조정경기를 보면 몇백미터 노를 젓고도 선수들이 기진맥진 지쳐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전력으로 노를 젓는 일은 매우 힘들고 오래 지속할 수 없는 일이다. 전투 중 격군들은 전력으로 노를 저어야 하므로 평소에는 체력을 낭비하지 말고 아껴두어야 한다.


이순신, 노 젓는 능로군을 전투병보다 더 잘 보살펴… 전투 없을땐 집에서 가사 돌보게

이순신 장군은 노 젓는 격군(格軍·능로군)을 잘 보살폈다. 능로군을 전투병보다도 더 중요시했으며 잘 보살폈다. 이순신 장군은 출전을 끝내고 다음 출전을 준비하는 동안 될수록 격군을 고향 집으로 보내서 농사도 짓고 가사를 돌보도록 했으며 출전이 임박하면 소집하였다. 출전 중에도 전투하지 않을 때는 돛으로 운항하거나 2교대, 3교대로 노를 젓게 하여 격군이 가능한 한 많은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전투가 치열할 때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격군을 돌보았다. 물론 출전 시에는 반드시 예비 격군을 승선시켰다.

많은 사람이 조선의 전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고 왜의 군선은 바닥이 V자 형인 첨저선이라 왜의 군선이 조선의 전선보다 속도 면에서 더 우수하다고, 즉 더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공학을 잘 모르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선박의 속도는 선체 저항과 추진력에 의하여 결정되며 선체 저항이 적고 추진력이 클수록 속도가 빠르다.

평저선인 판옥선의 선형은 선체 저항 면에서 첨저선인 왜의 군선보다 불리한 선형이다. 즉 선체 저항이 더 큰 편이다. 그러나 노와 노를 젓는 격군의 배치가 왜의 군선에 비하여 월등히 우수하므로 같은 수의 격군이 노를 젓는 경우 훨씬 더 큰 추진력을 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노갑판과 전투갑판이 분리되어 있어 공간이 넓기 때문에 필요시 왜군의 주력 군선인 안택선의 격군 수보다도 많은 100명 이상의 격군을 투입할 수가 있었다. 또 격군은 판옥(板屋)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노 젓는 임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므로 속도 면에서도 왜의 군선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 증거로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는 도피하는 왜의 군선들을 추격하여 격침시켰다는 보고가 여러 번 나온다.

또한 판옥선은 왜의 군선보다 선회반경(旋回半徑)이 작기 때문에 우현이나 좌현의 함포를 다 쏘고 재장전할 시간이 부족할 때는 급히 선회하여 반대쪽의 함포로 공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수한 성능으로 인하여 한산도대첩 때 길지 않은 시간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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