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일본전산을 맡아주게"… 76세 회장의 승부수

입력 2020.03.06 03:00

나가모리 시게노부 일본전산 회장의 후계 실험

세계적인 전자부품 기업이 즐비한 일본에서 일본전산은 '탄광 속 카나리아'로 통한다. 위험의 전조를 알려주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일본전산의 실적 발표일이 교세라와 무라타 등 다른 일본 전자부품 7인방보다 1주일 앞서 일본 제조업의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1월 23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실적발표 기자회견에선 4월 취임 예정인 신임 사장에 이목이 집중됐다. 일본전산의 사장직은 지난 47년간 일본전산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끌어온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의 후계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자리다. 일본전산은 PC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용 모터를 생산하는 작은 벤처기업에서 출발해 창업 40주년인 지난 2014년 매출 1조엔대(약 10조원)의 글로벌 모터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전산은 자동차 브레이크용 모터 부문에서 세계 점유율 50%(2017년 기준)로 1위다.

닛산자동차 제품 최고책임자를 발탁

지난달 나가모리 회장은 일본전산의 2인자 자리인 사장직에 세키준(關潤) 닛산자동차 생산·제품 최고책임자를 발탁했다. 이미 지난 2018년 6월 닛산자동차 태국법인 사장 출신 요시모토 히로유키 사장이 취임했지만 같은 닛산 출신 사장으로 다시 교체한 것이다.

2년도 채 안 돼 사장이 교체되자 회사 안팎에선 나가모리 회장이 아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요시모토 현 사장이 뜻을 마음대로 펴기 어려웠다는 동정론도 나왔다. 그러나 나가모리 회장은 일본전산 2인자인 사장의 능력을 자신의 경영원칙에 비추어 엄격하고 까다롭게 검증했다.

지난 2018년은 일본전산에 분수령이 된 해였다. 나가모리 회장은 현재 전체 매출의 21% 정도인 차량용 모터 부문을 주력사업으로 키우겠다며 전기자동차(EV) 구동형 모터 부문에 5000억엔(약 5조원) 규모의 대형 투자를 계획하는 등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시모토 사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가모리 회장은 지난달 4일 기자회견에서 "요시모토 현 사장의 가장 큰 허점은 문과 계열로 판매 역량은 뛰어났지만 제조에는 정통하지 못했다는 점"이라며 "경험이 부족한 요시모토 현 사장 체제로는 조직을 휘어잡기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기술 전문가의 역량이 필요했던 나가모리 회장은 제조 부문에 정통한 세키준 신임 사장을 낙점했다. 그는 닛산에서 생산 부문에 30년 넘게 몸담으며 자동차 기술 분야에 정통해 적임자로 평가받았다. 중국 사업을 총괄한 경험도 있어 일본전산의 주요 공략 시장인 중국 시장에서 경영수완을 발휘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가모리 일본전산 회장이 지난해 1월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결산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 블룸버그
집단 경영 실험도 1년 만에 실패

나가모리 회장은 "매출 1조엔을 달성한 2015년 즈음부터 경영 후계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지난 2018년에는 "일본전산을 이끌어갈 경영 후계자를 양성하는 게 나의 최대 책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아들에게 경영을 세습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후계자 논의 배경에는 일본전산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거대해진 그룹경영을 쪼개 분담할 필요가 있다는 회사 안팎의 지적이 있다. 중소기업으로 성장궤도를 달리던 시절 일본전산의 주특기이던 민첩함이 그룹 구석구석에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전산은 현재 세계 43개국으로 생산·영업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신흥시장을 개척하려면 해외 사정에 밝은 젊고 유능한 전문경영인도 필요했다.

나가모리 회장은 2018년부터 경영권한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자신은 인수·합병(M&A)과 일본전산의 신사업 모색 등 중요한 경영 현안에 집중하고 각 사업부와 글로벌 자회사 실적개선 등 전체 경영 권한의 30% 정도를 사장에게 위임했다. 지난해 1월엔 집단경영체제도 운용하기 시작했다. 요시모토 현 사장을 필두로 샤프 사장 출신인 가타야마 미키오 부회장 등 5명의 최고 임원이 매주 최고회의를 열어 토론하고 CEO인 나가모리 회장이 최종 결재하는 합의형 경영체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1년 만에 한계에 봉착했다. 일본전산이 나가모리 회장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기반한 1인 지배체제를 탈피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나가모리 회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지금의 집단경영 체제는 일본전산 창업 이후 최대 착오였다"면서 공동경영 체제가 시기상조임을 언급했다. 의사결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누구보다 일본전산을 꿰뚫고 있어 '1인 경영체제' 관성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다.

일본전산의 주력 제품인 소형 정밀 모터. /블룸버그
카리스마 1인 경영 관성 여전

나가모리 회장은 76세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일본전산의 강력한 리더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안전한 분야에 안주하기보다 일본전산이 살아남을 영역을 스스로 개척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직진형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1월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한 나가모리 회장은 "이렇게 매출이 추락한 건 46년간 기업을 경영하면서 처음 경험한 일"이라면서 강한 위기감을 드러냈다. 미·중 무역 마찰로 중국 수주가 급감하자 실적 악화에 직면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전산 전체 매출의 약 25%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 승부하기 위해 전기자동차(EV) 부문에 총 1조엔 규모의 단호한 투자를 결정했다. 일본전산의 자동차용 모터 부문 매출은 2010년 692억엔에서 2018년에는 2973억엔으로 3배 이상 증가한 상황이었다. 지난해 1~9월 이 부문 매출도 2430억엔으로 예상을 웃돌며 선방했다.

일본업계에선 나가모리 회장을 타고난 기술자이자 장사꾼이면서 투자가로 평가하곤 한다. 일본전산의 도약은 창업자인 그가 강력한 구조조정과 투자를 단행한 덕분에 가능했다. 흔히 일본의 인수·합병(M&A) 천재라 불리는 일본경영자 2인방에 소프트뱅크그룹의 손정의 회장과 나가모리 회장이 꼽히곤 한다. 일본전산은 지난해까지 총 66건의 M&A를 달성했다. 나가모리 회장은 일본전산이 갖고 있는 노하우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술력을 지닌 회사를 인수·합병하며 앞으로 일본전산을 먹여 살릴 신사업을 찾았다. 지난 2018년에는 프랑스 자동차 대기업인 PSA(푸조시트로앵)와 차량용 모터 합병회사를 설립하는 등 굵직한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기업평가 전문 컨설턴트인 가야 게이이치는 "나가모리 회장의 대담한 전략은 타사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일본전산만의 기업역량"이라고 평가했다.

'47년 1인 경영자' 명예로운 퇴진할까

나가모리 회장의 후계 실험이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요즘 일본 경영계는 자동차기업 혼다의 창업자인 고(故) 혼다 소이치로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가 지난 1983년 77세의 나이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명예로운 은퇴에 주목하고 있다. 경영자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를 결단하고 떠날 수 있는 용기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글로벌 모터 제조 기업을 일군 나가모리 회장의 퇴장이 명예롭게 이뤄질지 일본 경영계가 주목하고 있다.

"기술 교육이 기업 강국의 원천"… 나가모리 회장, 교토학원大를 교토첨단과학대로 바꿔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경영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전수하는 학교를 설립해 차세대 리더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교세라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가 운영하는 경영스쿨 세이와주쿠(盛和塾)와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설립한 정치학교 마쓰시타정경숙이 대표적이다.

일본전산의 창업 공신인 나가모리 회장은 일본의 기술 교육 굴기에 나섰다. 그는 지난 2018년 3월 일본전산의 발상지 교토에 위치한 교토학원대(현 교토첨단과학대) 이사장에 취임해 후진 양성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이 대학은 나가모리 회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교토학원대에서 교토첨단과학대로 간판을 바꿨다. ‘기술 교육이 기업 강국의 원천’이라는 그의 교육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약 100억엔(약 1000억원)의 사재까지 출연해 공학부를 신설했다. 공학부는 모터와 IoT(사물인터넷), 데이터 사이언스 등 첨단 기술 과정을 총망라했다.

나가모리 회장은 지난해 4월 입학식 축사에서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보다 사회에 나와 전문 기술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인재 육성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 경제가 다시 일어서려면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술 혁신의 풍향계가 변하고 있다”면서 부상하는 중국 테크 기업과 구글 등 글로벌 기술 기업들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교토첨단과학대가 기술 교육의 전당이 되겠다고 자처했다. 기계·전기·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한 기술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것이다.

교토첨단과학대는 실용 기술과 제조 현장 위주로 교육과정을 재편했다. 90분의 비즈니스 영어 회화 수업을 매주 10회 진행하고, 수학·물리 수업도 기존 대학 공학부보다 1.5배 늘렸다. 지난해부터는 미국·네덜란드 등 일본전산의 해외 거점에서 현장 실습을 시작했다. 졸업연구논문 대신 졸업 예비생들이 기업에서 제공한 과제를 받아 해결책을 찾는 ‘캠프스톤(camp stone)’ 프로젝트도 도입했다.

나가모리 회장은 미국 기업처럼 창업자와 최고경영자(CEO)가 이공계·기술직 출신인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기술직 종사자들을 위한 비즈니스스쿨 설립도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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