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거북선은 없었다

    •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 회장

입력 2020.02.21 03:00

[거북선의 진실] (3)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몇 척 건조했나

부산포대첩 때 이순신 장군의 전투 모습을 담은 기록화.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5척의 거북선을 건조해 돌격선으로 사용했다.
부산포대첩 때 이순신 장군의 전투 모습을 담은 기록화.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5척의 거북선을 건조해 돌격선으로 사용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선조 임금에게 전과 보고서인 장계(狀啓)를 올렸다. 그는 제2차 출전 때의 장계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음을 보고하고 있다. 거북선은 이순신 함대의 제2차 출전 때 공식적으로 전투에 처음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을 치르기까지 모든 해전에 출전하였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모두 몇 척 건조했을까.

거북선의 건조 척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방법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분석해 보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끝날 때마다 임금인 선조에게 전과를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장계에는 각각의 출전 때마다 참전한 돌격장의 수와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돌격장은 거북선의 지휘관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장계에 기록된 돌격장의 수는 바로 거북선의 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방법으로는 장계 이외의 여러 가지 기록을 조사해 보는 것이다.

민계식 前현대중공업 회장
민계식 前현대중공업 회장
장계에 귀선돌격장(龜船突擊將) 나와

먼저 첫째 방법으로 이순신 장군이 장계에 기록한 바에 따라 거북선의 건조 척수를 추정해 보자.

① 제2차 출전(1592년 5월 29일~6월 10일) :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귀선돌격장 급제 이기남(龜船突擊將 及第 李奇男), 귀선돌격장 신 군관 이언량(龜船突擊將 臣 軍官 李彦良).

② 제3차 출전(1592년 7월 5일~7월 13일) :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영돌격귀선장 보인 이언량(營突擊龜船將 保人 李彦良), 좌돌격귀선장 급제 이기남(左突擊龜船將 及第 李奇男), 우돌격귀선장 급제 박이량(右突擊龜船將 及第 朴以良).

③ 제4차 출전(1592년 8월 29일~9월 2일) : 부산포파왜병장(釜山浦破倭兵狀). 본영귀선은 영돌격장 군관 이언량(本營龜船, 營突擊將 軍官 李彦良), 순천귀선은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順天龜船, 左突擊將 及第 李奇男), 방답귀선은 우돌격장 급제 박이량(防踏龜船, 右突擊將 及第 朴以良).

④ 제5차 출전(1593년 2월 1일~3월 8일) : 웅포해전(熊浦海戰).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左突擊龜船將 主簿 李彦良).

1594년 초 이순신 장군은 좌·우돌격도장(左·右突擊都將)이라는 거북선의 새로운 전투편성을 도입하면서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분석하여 새로 임명된 거북선의 지휘관들을 정리하여 보면 중앙돌격장은 훈련주부 이언량(中央突擊將訓練主簿 李彦良)이, 좌돌격장은 평산포만호 김축(左突擊將 平山浦萬戶 金軸)이, 우돌격장은 군기시부정겸고성현령 조의도(右突擊將 軍器寺副正兼固城縣令 趙疑道)가 각각 맡았다. 또 신설된 우돌격도장에는 훈련정겸사량만호 이여념(右突擊都將訓練正兼蛇梁萬戶 李如恬)이 임명됐다. 좌돌격도장(左突擊都將)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박이량(朴以良)이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진용으로 이순신 장군은 6차 출전을 해 제2의 당항포해전을 치렀다. 전투 전에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제6차 출전을 위하여 영등포·장문포 앞바다로 출동하려고 31명의 장수를 선발하였다. 31명의 장수 가운데 거북선의 지휘관은 귀선돌격장 주부 이언량(龜船突擊將 主簿 李彦良), 좌돌격장 평산포만호 김축(左突擊將 平山浦萬戶 金軸), 우돌격도장 훈련정겸사량만호 이여념(右突擊都將 訓練正兼蛇梁萬戶 李如恬) 등 3명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당항포해전이 끝난 후 올린 전과보고서에 기록된 거북선 관련 지휘관의 이름은 바뀌어 있다. 아마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좌돌격장을 바꾼 것 같다.

⑤ 제6차 출전(1594년 3월 4일) :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우돌격장 훈련주부 이언량(右突擊將 訓練主簿 李彦良), 좌돌격장 군기시부정겸고성현령 조의도(左突擊將 軍器寺副正兼固城縣令 趙疑道), 우돌격도장 훈련정겸사량만호 이여념(右突擊都將 訓練正兼蛇梁萬戶 李如恬).

이 장계를 근거로 분석해 보면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임진년에는 3척의 거북선을 건조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또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윤 11월 17일 장계에서 좌우도에서 전선 150척, 사후선 150척을 가조(加造)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때에 거북선을 2척 더 건조한 듯하다. 거북선이 3척에서 5척으로 증가함에 따라 1594년 초에 새로운 전투편성을 도입하고, 인사 이동을 단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거북선 / 연도별 거북선 지휘관(돌격장)
왜적들 거북선을 '장님배'로 불러

둘째 방법으로 장계 이외의 다른 여러 기록을 살펴 거북선의 건조 척수를 추정해 보자. 왜장(倭將) 도노오카 진사에몬(外岡甚左衛門)은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전황 기록 문서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7월 9일 안골포(安骨浦)해전의 실전 상황이 목격한 대로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다. 도노오카 진사에몬은 안골포해전에서 번갈아 돌격해 오는 3척의 거북선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고려선전기에 적었다.

"…적은 모두 큰 배 오십팔 척과 그 밖의 작은 배 오십 척이며… 큰 배 안에는 삼 척의 눈먼 철선으로 요해(안전하게 방어)를 하고…(…敵大船五十八艘其外小船五十艘計にて… 大船之內三艘目くら鐵船にて要害し…)"

왜군들은 거북선을 장님배(盲船)라고 불렀다. 또한 일본의 군사서인 지마군기(志摩軍記) 임진년 8월 9일(조선력〈朝鮮曆〉 8일)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다. 한편 나주(羅州)의 역사서인 나주목지(羅州牧志)에는 "나대용은 임진년 난리를 당하자 충무공 이순신에게 종사하여 거북선 세 척을 꾸몄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의 세 가지 기록에 의하면 1592년 임진년에 거북선이 3척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1594년 3월 4일 제6차 출전 중 제2차 당항포해전 후 장계에서 당항포해전 때 거북선 5척이 전투에 참가하였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1592년(선조 25년)부터 1608년(광해군 원년)까지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문서집인 사대문궤(事大文軌·1619년 광해군 11년 편찬)를 보면 1595년 조선의 임금인 선조가 명나라에 다음과 같이 전투 상황을 통보하는 기록이 있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 65척을 거느리고…."

'정유재란 때 5척 있었다' 기록

이처럼 두 가지 방법에 따른 분석 결과를 비교하면 거북선의 건조 척수는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거북선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임진년에 3척이 건조되었고, 그다음 해인 1593년 계사년에 2척이 추가로 제작되어 총 5척이 건조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정유재란 때 5척의 거북선이 있었다는 기록도 위의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파직된 상태에서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이끌고 칠천량해전을 벌였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거북선 5척 모두 격침되고 말았다. 칠천량해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 수군에는 거북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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