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취업 기회 독점으로 중산층도 세습… 상위 10%의 세금 늘려야

입력 2020.02.21 03:00 | 수정 2020.02.21 18:56

韓·美 '세습 중산층' 논쟁

2012년 9월 뉴욕에서 벌어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전문가들은 미국 금융 위기의 장본인인 월스트리트가 정부의 전폭적 금융 지원을 받아 위기 이후에 더 크고 강력해졌다고 경고한다.
2012년 9월 뉴욕에서 벌어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전문가들은 미국 금융 위기의 장본인인 월스트리트가 정부의 전폭적 금융 지원을 받아 위기 이후에 더 크고 강력해졌다고 경고한다. /블룸버그
리처드 리브스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이 쓴 '20 vs 80의 사회(Dream Hoarders)'는 미국 중상류층(upper middle class)의 이기심을 고발한다. 영어 원제대로 꿈(미래)을 비축(투기)하면서 세습(독점)하는 집단이라는 비판이다. 그 책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 중상류층은 나머지 대중으로부터 확연하게 분리되고 있다. (중상류층과 대중 사이) 불평등은 어린 시절 시작하며, 세대를 거쳐 전승한다. 이런 계급 분리는 노동시장에 가치가 인정되는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가 중상류층에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발생한다. 더구나 중상류층은 이런 기회를 불공정하게 사재기한다."

한국 역시 미국과 다르지 않다. 서강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는 조귀동은 저서 '세습 중산층 사회'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20대 문제 핵심은 '1등 시민'인 중상위층과 나머지 '2등 시민' 간 격차가 더 메울 수 없는 초(超)격차가 되었다는 데 있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달궜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과 관련한 온갖 논란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때 '1대99 사회'라는 담론이 유행했지만 알고 보면 정말 본질은 20대80, 조금 범위를 좁히면 10대90 비율로 벌어지는 중상류층(중산층)과 나머지 사이 갈등이라는 것이다. 1% 10% 또는 20%는 진폭이 다르다. 1% 극소수가 아닌 훨씬 더 많은 중산층이 사회 곳곳에서 공고하게 성벽을 쌓고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는 의미다.

교육·노동시장 통해 중산층 세습

'세습 중산층 사회'는 "세습 중산층과 나머지 사람들 간 메울 수 없는 격차가 발생하는 핵심 원인은 노동시장에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으로 특징짓는 '내부자(insider)'와 중소기업 재직자·기타 비정규직이 주류인 '외부자(outsider)'로 이뤄진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임금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세습 중산층 사회'에 따르면 근속 25년 차 기준 '내부자'는 '외부자'보다 월급을 74% 많이 받는다. '번듯한' '괜찮은(decent)' 일자리 기준을 초임 월 300만원 이상으로 잡았을 때 20대에서는 연 7만2000명이 '내부자'로 편입되는데 동일 연령에서 고졸 이상 학력자의 11.4%가량에 해당한다. 한국은 '10대90 사회'라는 얘기다.

'내부자'가 되려면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한국고용정보원 자료를 통해 조사한 대졸 월평균 초임(조사 시점 2011년)은 상위 대학 10곳이 269만원, 수도권 4년제 208만원, 지방 4년제 196만원이었다. 전문직이나 고부가가치 수출 대기업에서 일하는 대졸 화이트칼라 일자리와 나머지 일자리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산업구조 변화와 기술 발전으로 2010년 이후 두 집단 사이의 균열이 커지고, 이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2019년 9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 입시 특혜 의혹 진상 규명 촉구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죽었다고 외쳤다.
2019년 9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 입시 특혜 의혹 진상 규명 촉구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죽었다고 외쳤다. /조선일보 DB
내·외부자가 갈리는 그 첫째 정리 단계는 명문대라 불리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일에서 이뤄진다. 이를 '1차적 선별(first screening)'로 부른다. 이후 노동시장 진입 단계에서 2차적 선별(second screening)이 이뤄지면서 계층 분리는 완성된다. 내부자가 되기 위한 첫째 관문인 좋은 대학 합격증은 어떻게 손에 쥘 수 있을까.
'세습 중산층 사회'는 김영미 연세대 교수 연구를 활용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 대학 진학에 미치는 영향을 점수로 환산하니 부모가 대졸이고 사무직에 종사할수록 자녀가 서울 4년제 대학에 합격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 격차는 30대(1977~1986년생)보다 20대(1987~1996년생)가 더 심했다. 그러니까 지금 20대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높은 부모를 만날수록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은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이란 얘기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모두 소득 상위 20%에 속할 확률은 1980~1988년생(자녀 기준)이 일자리를 얻을 때 급격히 커졌다.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본질은 부모 세대인 50대 중산층이 학력(학벌)과 노동시장 지위를 바탕으로 자녀에게 비슷한 학력과 노동시장 지위를 물려주는 데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헤크먼 시카고대 교수는 부모 잘못 만나는 것을 "가장 큰 시장 실패"라고 불렀다. 

자녀 학벌에 올인하는 중산층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부의 위계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던 사회는 이제 노동과 인적 자본 위계에 따라 구조화된 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자녀를 명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중상류층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주인공인 '586'으로 불리는 1960년대생들은 대학 정원 확대와 경제 호황, 수출 성장에 따른 노동소득 증가·자산 가격 급등에 힘입어 세습 중산층 1세대를 일궜다. 
이들은 자녀(1990년대생)들에게 세습 중산층 2세대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교육 투자에 전념한다. 학벌이 고소득 일자리와 계급 사다리의 높은 위치를 보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육 투자는 단순히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잘 조율된 계획을 세우는 '경영자적 능력' 때문에 성공한다. 경제력, 학력, 직업, 사회적 네트워크, 문화적 소양 등 복합적 불평등이 세습을 공고하게 한다.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플로렌시아 토치 교수 등 연구에 따르면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동질적으로 가난한 정도보다 부유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동질적으로 부유한 정도가 더 컸다. 그러니까 부(富)가 점점 더 강하게 대물림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에서 중상류층 지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효과적으로 세습되고 있다. 이들은 비슷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배우자를 만나 잘 계획한 출산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 이 아이들 역시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중상류층에 자연스레 안착할 가능성이 크다. 노력은 실력이 아니다. 계층이다.
韓·美 '세습 중산층' 논쟁
이런 계층 분리·고착화가 심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상류층이 불공정하게 기회를 사재기하기 때문이다. 중상류층 부모는 자녀가 계층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유리 바닥'을 깔아 주려 하며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해 자녀를 지원한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인턴 제도다. 인턴 제도는 노동시장 규제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기 때문에 연줄을 통해 서로 혜택을 주는 식으로 알음알음 분배된다. 많은 회사가 직원을 채용할 때 인턴 경험을 높이 사는데 부유한 학생들이 인턴 기회를 잡기 더 유리한 현실은 불공정하다.

상위 10%에 과세 강화 필요

리비스는 이런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7가지 조치를 제안했다. 더 나은 피임법을 통해 의도치 않은 임신을 줄이고, 가정 방문 복지 프로그램을 확충해 양육 격차를 좁혀야 한다. 훌륭한 교사들이 가난한 학교에서 일할 수 있도록 교사 임금 체계를 개선하며, 대학 학비 조달 기회를 더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회 사재기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는 더 공정한 토지 규제를 도입해 배타적인 택지 구획을 없애고, 동문 자녀 우대제 폐지를 포함해 고등 교육 기회를 넓히며, 인턴 기회를 개혁하는 방안도 들어 있다.

'세습 중산층 사회'는 "지금 한국에 필요한 건 양보와 공정이 아니라 의무와 공평이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공평과 그것을 위한 세습 중산층의 의무와 부담"이라고 말한다. 분명하게 요구할 건 기회의 평등이다. 단지 공정한 입시제도를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위 90%도 상위 10% 수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아울러 사회가 보장할 최소 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고, 이를 위한 세원을 적극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상위 10%에 대한 과세 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경쟁에서 패한 이에게도 패자부활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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