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좀 봐요, 지옥에서 살아왔어요

입력 2020.02.21 03:00

소니에서 쫓겨났다가 화려하게 부활한 노트북 '바이오(VAIO)'

소니의 PC 브랜드였던 바이오(VAIO)는 지난해 7월 독립회사 설립 5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본사인 나가노현 아즈미노 공장에 사원들이 모였다.
소니의 PC 브랜드였던 바이오(VAIO)는 지난해 7월 독립회사 설립 5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본사인 나가노현 아즈미노 공장에 사원들이 모였다. / 바이오
소니(SONY) 브랜드 노트북 'VAIO(바이오)'는 2000년대 젊은 층 사이에서 가볍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워너비(꼭 갖고 싶은) 아이템으로 통했다. 하지만 소니는 2010년대 최대 경영 위기에 직면하면서 2014년 적자에 허덕이던 PC 부문을 방출했다. 당시 히라이 가즈오 소니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가장 소니다운 브랜드이지만 더 이상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해 고심 끝에 매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2012년부터 3년간 소니의 PC 부문 누적 적자는 2100억엔에 달했다.

2014년 7월 바이오는 독립회사로 새롭게 출발했다. 소니도 바이오의 일부(4.9%)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바이오와는 일부 판매 위탁에 협력하는 정도다.

업계에선 뚜렷한 경쟁 요소가 없는 바이오가 포화 상태인 PC 시장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신생 바이오 출범 이듬해인 2015년 바이오의 연간 출하 대수는 35만대에 불과했다. 2010년 전성기 870만대와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그러나 바이오는 세상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실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228억5500만엔(약 2453억원), 영업이익 9억엔(약 96억원)을 기록, 독립회사로 출범한 이듬해인 2015년보다 매출은 3배 늘어났고, 영업이익은 19억8300만엔 적자에서 흑자로 반전에 성공했다.

지난 2013년 소니와 함께 바이오 브랜드가 인도의 한 매장에 걸려 있는 모습.
지난 2013년 소니와 함께 바이오 브랜드가 인도의 한 매장에 걸려 있는 모습. / 블룸버그
①법인용 PC 시장 공략

바이오는 법인용(업무용) 시장을 지렛대 삼아 회사 성장의 새 발판을 마련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장의 원천이다. 2013년 당시 일본 PC 시장 전체에서 B2B(법인용) 비율은 60%에 달했지만 바이오의 전체 제품에서 법인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비율이 2018년엔 법인용 72%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2014년 당시만 해도 바이오의 주력 제품은 고가·고성능 PC였다. 하지만 PC 시장도 급변하고 있었다. 애플은 맥북으로 노트북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가성비 노트북으로 승부한 대만 에이수스, 저렴한 업무용 PC로 법인 시장을 선점한 HP나 델, 레노보 등의 쟁쟁한 브랜드 사이에서 바이오가 박리다매식 경쟁으로 승부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바이오는 10만엔(약 110만원) 전후 고성능 법인용 PC로 과감히 주력 종목을 변경해 승부수를 띄웠다. 법인용은 일반 소비자용 PC보다 경기 상황에 덜 민감하고 고정 구매층 확보가 쉽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바이오가 일본 내 주력 공장이 한 곳뿐이어서 소량 생산에 특화돼 있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요시다 히데토시 전 사장은 "바이오는 고정팬을 지닌 작은 요리 전문점이라는 점에서 (다른 대형 업체와) 뚜렷한 차별화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인용 시장은 만만치 않은 분야다. 고객들의 요구 수준뿐 아니라 이용 빈도도 높아 그만큼 까다로운 품질기준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특유의 치밀한 설계에 대한 집착이 바이오의 법인용 부문 성장을 견인했다. 바이오는 소니 마케팅의 협력을 받아 2014년부터 법인용 PC의 최신 동향과 기업이 원하는 사양 등을 학습하는 사내 스터디팀도 꾸렸다. 이를 통해 키보드 기판을 비스듬하게 눕힐 수 있게 설계하거나 회의 발표용 프로젝터를 컴퓨터에 연결하는 단자도 늘렸다.

바이오는 이렇게 차근차근 약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해 11월 IT 전문지 BCN은 델과 HP 등 주요 7개 PC 브랜드 만족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바이오는 액정과 키보드 등 주요 만족도 항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 높은 보안 성능 등 극한의 품질로 작지만 강한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소니가 지난 1999년 처음으로 선보인 가정용 로봇 아이보(aibo). 아이보의 개발 전담 부서였던 바이오는 로봇 사업에도 진출했다.
소니가 지난 1999년 처음으로 선보인 가정용 로봇 아이보(aibo). 아이보의 개발 전담 부서였던 바이오는 로봇 사업에도 진출했다. / 블룸버그
②공장 활용해 전자기기 위탁 생산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오는 소니 출신 CEO(최고경영자)가 아닌 외부 출신 CEO가 등판하면서 안정된 성장궤도로 진입했다. 소니 출신으로 바이오를 이끌었던 1대 사장 세키토리 다카유키 사장은 이듬해인 2015년 약 20억엔 영업적자로 불명예 퇴진했다. 뒤이어 취임한 선텔레콤·야미코 화학 출신의 2대 오타 요시미 사장은 통신과 화학기업의 경영 재건 경험을 활용했다. 그는 바이오의 고정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는 길을 모색했다. 나가노현의 아즈미노 주력 공장은 첨단 전파 정밀측정 시설을 갖춰 외부 기업들의 이용 문의가 쇄도할 정도였다. 오타 전 사장은 공장을 활용해 외부 기업들의 전자기기 제조를 위탁받는 EMS(전자기기 위탁생산)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바이오는 소니 시절 로봇 아이보(AIBO)의 개발 전담부서였는데 이 때문에 로봇 벤처기업에서도 제조 위탁 주문이 쏟아졌다.

오타 전 사장의 과감한 경영 수완을 발판으로 신산업인 EMS 부문도 급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도요타자동차는 소형 로봇 생산을 바이오에 위탁했고 중국 IT 기업인 바이두 그룹은 최근 바이오에 조명기구 제조 위탁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오는 해외시장에 진출하면서 무리한 점포 확장은 경계했다. 그보다 브랜드 인지도 끌어올리기에 주력했다. 바이오는 지난 2017년 중국의 대형 인터넷 판매 사이트인 징둥닷컴의 러브콜을 받고 중국 시장 재진출에 성공했다. 징둥닷컴에 따르면 중국에는 미국 사이트를 통해 바이오 PC를 구매하는 사용자가 100만명에 이를 정도로 바이오 고정팬이 많았다. 바이오는 젊은 층 소비자가 많은 징둥닷컴 단 한 곳으로 중국 판매망을 제한했다.

해외시장 진출의 원칙을 세운 건 2017년 3대 사장으로 취임한 일본빅터(현 JVC) 출신 요시다 히데토시 전 사장이다. 바이오는 현재 17국으로 해외 판매망을 확대했다. 오타 전 사장과 요시다 전 사장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이오의 장점을 최대한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이오 매출·영업이익 추이 / 바이오 타임라인
③소수 정예 조직으로 똘똘 뭉쳐

바이오의 직원은 250여명에 불과하다. 소니 브랜드 시절(1100여 명)의 30%도 되지 않는다. 바이오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소수 정예 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제품의 기획과 설계, 생산과 제조, 판매와 고객 대응까지 전담 엔지니어 한 명이 총책임자로 전담 제품군을 관리하도록 조직을 재정비했다. 가령, 제품 설계 기술자가 조립 담당 직원의 의견을 수렴해 PC 조립에 필요한 나사못의 수량과 종류를 줄이기도 했다.

일본 나가노현 공장에서 최종 제품을 전수 검사하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 중 불량품이 많아지면서 불만이 쏟아지자 내린 해결책이다. 검품 항목만 50여개에 이른다. 90cm 낙하 실험과 본체 비틀기 실험, 펜을 넣은 채로 노트북을 포개는 액정 내구성 실험까지 다양하다. 전담 엔지니어가 검품을 마쳐야만 비로소 시장에 출하할 수 있다. 비용 절감에 집착하다 불량품이 많아지면 바이오 브랜드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고 결국 회사 성장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는 판단에서다. 2017년 9월부터는 아예 일부 기종을 제외하고 대부분 주력 제품 생산도 일본 공장으로 옮겼다.

바이오의 품질에 대한 고집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오래 써도 키보드 자판 문자가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특수 도색 재료를 쓰거나 PC 본체에 소재 기업인 도레이와 공동 개발한 탄소섬유 소재를 사용해 더 가벼운 PC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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