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중앙은행들의 초저금리 고민

입력 2020.02.07 03:00

[Cover Story]

제로 금리에도 물가 내려 日, 부동산 가격만 뛰어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위키미디어

일본 경제는 1999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금리를 0.15%까지 내리는 저금리 정책을 시행한 후 20년 가까이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경험했다. '제로(0)%'까지 금리를 내렸지만 풍부한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지 못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진 탓이다. 2000년부터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경기 부양책)가 시작되기 전인 2012년까지 일본의 연평균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마이너스 0.24%로 디플레이션이 이어졌다. 이처럼 소비와 투자가 전혀 반응을 하지 않자 일본은행은 2001년 3월부터 세계 최초로 양적 완화 정책을 단행했다. 국채 매입 등을 통해 시중에 돈을 푸는 이 경기 부양책으로 일본 경제는 엔화 약세 등 반짝 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디플레이션이 다시 심해지면서 일본은행은 2013년 더 강력한 이차원 양적 완화(양적·질적 금융 완화)를 시작했다. 양적 완화 조치에 장기 금리를 제로로 만드는 질적 조치를 추가한 것이다. 단기 정책금리를 마이너스 0.1%, 장기 금리(10년 만기 국채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유도하는 것이 이 초저금리 정책의 핵심이다.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일본 부동산경제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수도권 전체의 신축 맨션(한국의 아파트) 평균 가격은 5980만엔으로 일본 부동산 시장 버블(거품)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0년(6123만엔) 수준에 거의 근접했다. 일본의 신축 맨션 평당 단가 상승률도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약 30%, 2013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약 40% 상승했다. 일본은행의 대규모 금융 완화 조치로 낮은 금리로 주택 구매 자금을 빌릴 수 있게 되면서 주택 가격이 상승했다.

일본 중앙은행 기준금리 추이
금융시장에서는 국내외 자금 흐름이 엇갈리게 나타났다. 해외 투자자들은 낮은 금리의 엔화를 차입해 해외의 고금리·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엔캐리트레이드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일본 내부의 경우 지난해 12월 기준 가계와 기업, 금융회사에 잠자고 있는 시중 현금이 112조7418억엔(약 1236조원)을 기록, 10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저금리 시대가 길어지면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현금을 내부에 쌓아두는 '장롱 예금'이 늘어난 탓이다.

이 때문에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저금리 장기화로 주택 가격 상승, 시중은행의 수익성 악화 등 경제 활력이 떨어지는 고질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해 12월 금융정책결정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금리 하락과 생명보험 등의 운용 수익률 저하가 전반적인 소비 심리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일본은 앞으로 5~10년간 초저금리 정책을 탈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EU 금리 5차례 낮춰도 경기 회복 안돼 고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블룸버그
유럽중앙은행(ECB)은 2014년부터 중앙은행 예금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추는 초유의 정책 실험을 벌이고 있다. 중세 금 세공업자들이 개인의 금을 맡아 주면서 보관료를 받던 것처럼,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길 때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수수료’를 내도록 한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의 핵심 목표는 경기 부양이다.

ECB의 예치금리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통화정책 수단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할 때 받는 금리가 시중금리에 비해 크게 낮아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ECB의 요구 기준을 넘어 예치하는 자금의 규모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준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시중금리가 크게 하락한 데다, 시중은행들이 대출 위험을 회피하기 시작하면서 ECB 기준 초과 예치 규모가 시장에 영향을 줄 정도로 불어났다. 이에 ECB는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돈을 쌓아두기보다는 민간 대출을 확대해 소비와 투자를 진작하기 위해 중앙은행 예금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추었다.

ECB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예금금리를 연 마이너스 0.4%까지 내렸다. 그러나 지난해에도 유럽 경기 침체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3년 6개월 만에 또다시 이 금리를 연 마이너스 0.5%로 낮췄다. ECB 보고서는 마이너스 금리가 채권 구입, 저금리 장기 대출 등 여러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보고서는 우선 금리가 마이너스로 계속 내려갈 수 있음을 확인하면서 금리가 ‘제로(0)%’에 이르면 중앙은행이 활동할 여지가 없다는 시장의 불안을 없앴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이너스 금리에서 추가적인 금리 인하는 투자가들이 국채에 많이 투자하도록 해 국채 금리를 더 낮춘다고 강조한다. ECB는 지난해 11월 발간한 내부 보고서에서 예금 금리를 현 연 마이너스 0.5%에서 연 마이너스 1.0%까지 인하해도 긍정적인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럼에도 유럽의 경기 회복 징후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유럽 중앙은행 기준금리 추이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직을 맡다 지난해 말 ECB 수장이 된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 역시 부작용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지금으로선 전임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도입한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라가르드 총재는 최근에도 “미국과 중국의 1차 무역 합의에도 불구하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기는 여전히 하향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며 “유럽 경기 회복을 위해 마이너스 정책금리는 한동안 유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앞두고 영국과 유럽연합의 연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는 점도 ECB의 현 금리 유지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트럼프 인하 압박 맞서 파월 "현재 금리 적정"

제롬 파월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제롬 파월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블룸버그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지난해 11월 미국 의회 합동경제위원회에서 미국 경제 침체 가능성을 두고 날 선 질문이 오가던 도중 “저금리, 저물가, 저성장은 전 세계적인 뉴노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앙은행들이 저금리 상황에서도 경기 침체에 대응할 새로운 정책 도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통화정책만으로는 앞으로 닥쳐올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니 다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연준은 경기 침체 때 기준금리를 수개월에 걸쳐 4~5%포인트씩 과감하게 깎아 대응해왔다. 그런데 이제 더는 그런 방식을 쓸 여건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한때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며 글로벌 경기를 좌지우지하던 미 연준 의장조차 저금리 현상엔 속수무책이라는 속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준은 지난해 7월 약 10년 만에 금리를 내려 통화정책 방향을 돌렸다. 이어 지난해 말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더 내려 연 1.75~2.0%로 운용하기로 했다. 예상을 깨고 금리 인하에 나섰지만 추가적인 금리 인하에는 매우 신중한 모습이다. 파월 의장은 “경제 전망이 바뀌지 않는 한 현재의 금리가 적절하다. 금리를 다시 바꾸려면 우리의 전망에 대한 중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제조업·무역·투자·수출 부문이 약세를 보이지만 소비를 포함해 경제는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경기 진작을 위한 추가적인 금리 인하는 현재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중앙은행 기준금리 추이
연준의 향후 행보에서 최대 변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해서도 연준이 지난해 금리를 올린 것은 실수이며, 올리지 않았다면 다우존스 주가지수가 지금보다 5000~1만 포인트 더 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춰야 한다고 압박했다.

파월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끊임없는 요구에도 제로 혹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그는 “연준은 위기의 시기에도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쓰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사용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고(故) 폴 볼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 등 전 연준 의장 ‘4인방’도 거들고 있다. 이들 ‘4인방’은 최근 기고문에서 “연준의 의사 결정이 중요한 것은 특정 정권 내 소수 정치인을 위한 이익이 아니라 미국 전체 이익을 최대한 고려하기 때문”이라며 “연준이 정치적으로 행동하고 정치가에게 위협받는 것이야말로 연준에 대한 시민들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사상 최저 1.25% 금리 한은 총재 "더 낮출수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조인원 기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올해 신년사에서 “2020년에도 통화 완화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연 1.25%까지 내렸는데 올해 추가 인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이 총재는 “한국 경제의 성장세가 잠재성장률보다 낮고 물가상승률 또한 목표치를 밑돌 것으로 예상돼 통화 완화 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를 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달 열린 올해 첫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일단 동결했다. 지난해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미·중 무역 갈등이 완화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우한 폐렴 사태가 터지는 등 경제 곳곳에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KB증권은 지난달 29일 “우한 폐렴으로 관광업 등 서비스업이 위축되고 제조업 생산이 차질을 빚으며 수출까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태가 3분기까지 이어지면 경제성장률이 0.2~0.6%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2일 이주열 총재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고 우한 폐렴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 대응 방안 등을 논의했다. 한국은행은 2003년 사스 사태와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소비가 감소하는 등 경기가 얼어붙자 금리 인하 카드를 쓴 적이 있다.

계속되는 저물가도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역대 최저인 0.4%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의 중기 물가 목표인 연 2.0%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 중앙은행 기준금리 추이
박석길 JP모건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이 계속 낮을 것으로 예상돼 한 차례 정도 금리를 추가 인하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한 폐렴 사태까지 겹쳐 2월 중 금리 인하를 단행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여기에 세계 경제를 이끌어온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리스크(위험) 요인이다. 지난해 한국은 정부 곳간을 풀고 두 차례 금리를 인하하는 등 총력전을 벌여 겨우 2% 성장률에 턱걸이했었는데 연초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금리 인하에 대해 신중론도 있다. 부동산 시장 과열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면 시장의 자금이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으로 몰린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작년 7월 기준금리를 연 1.75%에서 1.50%로 내리자 전국 주택 매매 거래량이 6월 5만4893건에서 7월 6만7349건으로 뛰었다.

집값을 잡기 위해 정부가 작년 12월 12·16 부동산 대책을 내놓은 상황에서 바로 금리를 인하하는 것도 부담이다. 박춘성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저금리가 계속되면 집값 상승과 가계 부채 리스크를 확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최초 마이너스 금리 스웨덴, 작년말에 포기

스테판 잉베스 스웨덴 중앙은행총재
스테판 잉베스 스웨덴 중앙은행총재 /블룸버그
2015년 초 세계 최초로 마이너스 기준 금리를 도입했던 스웨덴 중앙은행(릭스방크)은 지난해 말 기준금리를 마이너스에서 제로(0)로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주요 국가에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포기한 건 스웨덴 중앙은행이 처음이다. 릭스방크의 예상 밖 결단에 금융계 전문가들은 경기침체가 가속화할 것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스테판 잉베스 릭스방크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마이너스 기준금리에도 경기 회복이 기대에 못 미치는 데다, 마이너스 금리의 부작용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당분간 마이너스 금리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잉베스 총재가 마이너스 금리를 포기한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부동산 가격 급등이다. 스웨덴 통계청에 따르면 마이너스 기준 금리가 도입된 2015년 이후 스웨덴의 주택가격은 매년 10% 안팎 올랐다. 주택시장이 과열되면서 가계 부채도 치솟았다. 2017년 말 기준 스웨덴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89%에 이른다(OECD).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덴마크, 스위스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잉베스 총재는 “과열된 주택시장이 경제에 리스크(위험)를 높이고 있다”며 “금리 인상을 통해 정상적인 경제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스웨덴 중앙은행 기준금리 추이
잉베스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 좀비 기업(한계 기업)이 늘어나는 현상도 부작용이라고 보고 있다. 재무 상태가 부실하지만 낮은 금리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은 채 간신히 생명만 연명하는 기업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 좀비기업이 늘어날수록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여기에 국채 금리가 제로 이하에 머물면서, 안전자산인 국채를 일정량 사둬야 하는 연·기금과 보험사들이 국채 보유에 따른 이자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위험성이 높은 자산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이너스 금리 실험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마이너스 금리의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스웨덴의 경제성장률은 2015년 4.4%에서 2016년과 2017년 각각 2.4%로 떨어졌다. 2018년엔 2.2%까지 하락했다. 지난해에도 성장률이 1% 초반대로 내려앉은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너스 금리로 돈을 확 풀었음에도 물가 부양 효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지난해 스웨덴의 물가상승률은 1.7%로 목표치(2%)에 미달했다. 잉베스 총재는 ‘이 정도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굳이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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