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저금리… 세계 경제 혼돈 속으로

입력 2020.02.07 03:00

[Cover Story] 초저금리 장기화, 일파만파
금리 역사 5000년, 첫 장기 초저금리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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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그래픽=김현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Keynes)는 1936년 주저인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저금리 세상이 오면 채권 이자 등 불로소득에 의지하는 자본소득자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금리가 낮아져야 자본소득자의 수입이 줄어들어 이들이 경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안락사'하는 대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과감한 투자를 하는 기업가들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케인스 학파를 완성한 존 힉스(Hicks)는 케인스의 생각에 단서를 달았다. 금리가 제로 수준까지 떨어지면 중앙은행이 제아무리 돈을 더 찍어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반면, 투기 자산 가격은 급등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힉스의 주장은 요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로치 "마이너스 금리는 악마의 유혹"

케인스 사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장기 초저금리 시대가 열렸다. 이자의 개념은 기원전 1700년경 바빌로니아 왕조 시대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적혀 있을 정도로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풀었다. "마이너스 금리는 악마의 유혹"(스티븐 로치)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무색하게 제로(0) 금리에 이어 마이너스 금리까지 등장했다. 금리 연구의 교과서인 시드니 호머(Homer)의 '금리의 역사'에 따르면 17세기 이탈리아 제노바 상인들이 발행한 채권의 수익률이 잠시나마 연 1%대로 떨어진 적이 있으나 전 세계 주요국이 동시다발로 초저금리 현상을 겪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초저금리가 만든 전 세계 경제 환경은 경제학자들이 상상한 모습이 뒤엉켜 있다. 케인스가 상상한 것처럼 실리콘밸리 등 주요 혁신 기술 기업과 벤처 투자자들은 낮은 금리 덕분에 풍족한 자금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힉스의 예견대로 일본, 유럽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유동성 함정에 빠질 위기에 직면했다. "모든 물가 상승은 언제 어떤 경우에도 화폐적 현상"이라는 밀턴 프리드먼 교수의 말처럼, 전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이 마구 뿌려 댄 돈은 실물 경제 대신 자산 시장으로 흘러갔다. 부동산, 주식, 채권 등 거의 모든 자산이 급등한 탓에 케인스가 안락사할 것이라던 자산가들은 더 부자가 됐고, 자산을 소유한 부유층과 소유하지 못한 빈곤층의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중앙은행의 위기 대응력 소멸 우려

두 얼굴을 가진 사상 최초의 장기 초저금리 시대. 대처법은 무엇일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머튼 MIT 교수는 WEEKLY BIZ와 가진 인터뷰에서 "개인들은 무위험 이자율이 매우 낮아진 지금의 저금리 현상을 현실로 받아들여 사고방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10년 전의 연 3% 수익과 지금의 연 3% 수익이 다르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연금 수입이 줄어드는 은퇴자들이 당장 소비를 줄여야 하는 것처럼, 젊은 층도 원하는 돈을 모으려면 기존 재무 계획을 고수하기보다는 조금 더 높은 위험을 감수하거나 은퇴 시기를 늦추는 등 기존 계획을 재설정하는 유연함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 수장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지난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AEA)에서 경제학자들이 일본화(Japanification)에 대해 경고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저금리는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만의 특이한 현상이었으나, 지금은 유럽, 미국 등 서방 국가들도 일본처럼 저성장·저금리·저물가의 3저(低)를 겪을 수 있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중앙은행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금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진 모습"이라며 세계 경제 최후의 보루인 미국 역시 저금리의 덫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앙은행이 금리 인하 정책을 사용해 경기 침체에 대응할 여력이 사라지는 점을 우려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19세기 말 중앙은행의 역할이 미미했던 미국 경제는 15번이나 경기 침체를 겪었다. 상당수 경제·금융 전문가는 전 세계가 가까운 시일 안에 저금리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경제학 교과서와 경제 상식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초저금리 장기화 시대를 해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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