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거액 투자, 일본은 기술 제공… '반도체 연합군' 결성했다

입력 2020.01.17 03:00

한국 반도체 타도 위해 손잡은 중국·일본

"기왕 삽을 떴으니 삼성·SK하이닉스와 함께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톱3'가 되는 게 목표다." 지난해 11월 중국 국유 전자·반도체기업 칭화유니그룹 수석부사장으로 취임한 사카모토 유키오(坂本幸雄·73) 전 일본 엘피다메모리 CEO(최고경영자)가 밝힌 포부다.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은 칭화유니그룹 일본자회사 CEO도 겸임한다. 엘피다메모리는 2000년대 일본에서 유일한 D램 반도체 제조업체로 세계시장 점유율 3위까지 전성기를 누리다 지난 2012년 파산, 미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에 넘어갔다. 사명도 마이크론메모리재팬으로 바뀐 상태다.

칭화유니그룹은 주로 네트워크 장비와 무선통신칩을 만드는 회사. 메모리 반도체에도 뛰어들어 한국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장악하고 있는 D램 시장을 넘보겠다고 선언하면서 일본 반도체 명가(名家)의 노장(老將)을 전격 영입한 것이다. '타도 한국'을 위해 중·일(中日) 연합군이 출범하는 희귀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메모리반도체에 굶주린 중국

중국 칭화유니그룹 사카모토 유키오 수석부사장. 일본 엘피다메모리 전 CEO 출신이다. 사진은 엘피다 시절인 지난 2003년 직경300㎜ D램 웨이퍼를 들고 있는 모습.
중국 칭화유니그룹 사카모토 유키오 수석부사장. 일본 엘피다메모리 전 CEO 출신이다. 사진은 엘피다 시절인 지난 2003년 직경300㎜ D램 웨이퍼를 들고 있는 모습. / 블룸버그
칭화유니그룹은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모교인 칭화대학이 야심 차게 설립한 중국 국유 전자·반도체기업이다. 이미 지난 2016년 낸드플래시 메모리반도체 전문 자회사인 창장메모리(YMTC)를 설립했다. 설립 3년 만에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차세대 반도체 '64단 적층 3D 낸드플래시' 생산에 성공해 반도체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칭화유니그룹은 D램 진출을 통해 완벽한 메모리반도체 업체로 도약할 계획이다.

반도체 산업 육성은 중국 정부의 숙원 사업이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반도체산업 경쟁력 향상을 내걸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의 하이테크(첨단산업) 육성정책인 '중국제조2025' 프로젝트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높이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었다. 이미 D램 양산에도 성공했다. 중국 국유 반도체기업인 CXMT는 지난해 12월 한 달에 2만개 수준의 D램 생산을 시작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칭화유니그룹의 자오웨이궈 회장은 '중국의 굶주린 호랑이'라 불릴 만큼 메모리반도체에 총력을 쏟고 있다. 그는 지난해 8월 충칭시 정부와 D램 공장 건설계약 체결을 주도했다. 칭화유니그룹의 향후 10년간 설비투자 규모는 110조원에 이른다. 미국 인텔과 맞먹는 규모다.

하지만 D램 시장 신규 진입은 쉽지 않다. 영국 시장조사기관인 IHS마크잇에 따르면 2018년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등 '빅3' 점유율은 95%로 압도적이다. D램은 기술장벽도 높다.

日 사카모토 주도로 100여명 채용

칭화유니그룹
칭화유니그룹은 3년 전부터 삼고초려하며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의 영입에 공을 들였다. 엘피다의 D램 기술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엘피다메모리는 경쟁사에 앞서 미국 애플 등과 스마트폰용 '모바일 D램'을 공동 개발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이 오랫동안 반도체업계에 몸담아온 베테랑인 만큼 풍부한 글로벌 인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자오 회장은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의 합류는 칭화유니그룹의 글로벌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칭화유니그룹은 이미 3년 전에도 낸드플래시 부문 총책임자를 맡아달라고 그에게 제안한 적이 있다.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은 숙고 끝에 D램 부문을 총괄하게 됐다. 그의 가장 큰 임무는 D램 설계의 운용과 지휘다. '중·일 D램 연합'은 설계 개발은 일본 가와사키에서, 생산은 중국 충칭에서 이뤄지는 양국 간 역할 분담이 특징이다. 이를 위해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은 올해 봄까지 최대 약 100명의 엔지니어 군단을 꾸린다는 계획이다. 그는 지난 11월 일본 주간경제지 다이아몬드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크론이나 대만 업체, 일본의 자동차용 반도체 전문기업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 출신 D램 설계자들이 집중적인 모집 대상"이라고 밝혔다. 또 경쟁업체의 인력 빼가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자사의 엔지니어들이 주도해 기술을 개발하고 필요하다면 특허 라이선스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화웨이·레노버 등 中 기업에 공급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은 중·일 D램 연합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빠르면 3년 늦어도 5년 이내에 독자적인 D램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자신감의 근거로 차세대 D램 기술 기준인 회로선폭 미세화 속도를 꼽았다. 그는 "D램 반도체의 제조프로세스 변화 주기가 1년에서 3년으로 다소 길어졌다"고 말했다. 변화 속도가 주춤한 만큼 그 틈새를 파고들어 D램 분야 선도기업들을 따라잡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차세대 메모리반도체의 회로선폭 13~14nm(나노미터)은 기술장벽이 높아 먼저 17nm 세대의 기술을 확보해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카모토 수석부사장은 "중국 기업 사양에 맞춘 D램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반도체기술협회(JEDEC)가 지정한 국제표준 제품이 아니라 중국 고객기업이 원하는 사양 개발에 집중하는 '중국 표준' 전략이다. 후발주자가 갖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그는 D램을 대량 구매하는 정보통신업체인 화웨이와 PC업체인 레노버 등 중국 큰손들을 집중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대형 거래처가 원하는 사양의 제품을 한꺼번에 대량 수주해 경쟁업체보다 우위에 서는 전략이다. 스마트폰 등 모바일 분야보다 서버를 포함한 PC 시장에 집중하는 우회전략도 핵심이다. PC나 서버 등 정보처리기의 대용량화·고속화로 이와 관련된 D램 시장이 커진 것도 이유다.

"첨단 D램 생산은 어려울 것" 지적도

'중·일 D램 연합'이 야심 차게 출발하면서 전문가들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예상한다. 철강과 액정 분야처럼 국가의 자본과 정책을 총동원하는 중국식 혁신이 전략 부품인 반도체 부문에도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Allison)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의 국가 주도 자본주의가 새로운 산업 경쟁에서 중국 기업들을 우위에 서게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중국 주도 D램 사업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인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은 "우수한 D램 설계 기술자를 모집하는 데 중국 기업이라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면서 "첨단 D램 생산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도 변수다. 미국이 중국 기업에 반도체장비 수출을 규제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지난 2018년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 D램 국산화를 추진하던 중국 국유 반도체 기업 JHICC에 반도체장비 수출을 규제한 적이 있다. JHICC가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을 경유해 마이크론의 기술을 빼내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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