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군주는 삼촌 앞의 촛불? 주 성왕 도운 삼촌 周公은 달랐다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입력 2020.01.17 03:00

[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7) 어린 후계자를 믿고 맡길 만한 신하(託孤之臣)

어린 군주는 삼촌 앞의 촛불? 주 성왕 도운 삼촌 周公은 달랐다
일러스트=김영석
은(殷)나라를 무너트리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이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아들 성왕(成王)은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이때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이 성왕을 대신해 섭정(攝政)했다. 당연히 주공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렸다. 과연 그는 조카 성왕에게 단심(丹心)을 다할 것인가? 심지어 주공의 형인 관숙(管叔)을 비롯한 여러 형제까지 주공을 의심해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주공은 앞으로 결국 성왕을 해칠 것이다." 군주제하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조선시대 때도 세조가 보여주듯 어린 군주는 삼촌들 앞에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공은 말 그대로 '육척 고아를 맡길 만한 신하'였다. 그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태공망(太公望)과 소공(召公)에게 말했다. "내가 오해받는 것을 피하지 않고 섭정하는 것은 천하가 왕실을 모반할까 두렵기 때문이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조카에게 명군 기반 닦아준 주공

심지어 주공의 형제들인 관숙과 채숙(蔡叔)이 주공을 의심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망한 은나라 잔존 세력인 상족(商族)을 이끌고 있던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함께 동이(東夷)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은 그들을 주살하거나 유배 보냈다. 이어 선정(善政)을 위해 주공은 인재를 널리 구했다.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는 주공의 인재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한유가 듣건대 주공이 (천자를) 보필하는 재상이 됐을 때 뛰어난 이를 만나 보게 돼 그 상황이 급박하자 바야흐로 한 번 먹을 때 세 번이나 먹던 음식을 토해냈고[一食三吐] 바야흐로 한 번 머리를 감으면서 세 번이나 머리카락을 붙잡아 올렸다[一沐三捉]고 했습니다. 이런 때를 만나 천하의 뛰어난 인재들은 다 이미 들어서 쓰였고 간사하고 중상모략으로 잘 속이는 무리들은 다 이미 제거됐습니다."

섭정 7년째가 되던 해 성왕이 성장하자 마침내 주공은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섭정을 마친 주공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주공은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북쪽을 향해 신하의 자리에 서서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마치 뭔가를 두려워하듯이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주공은 성왕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정사에 게을러질까 두려워 '무일(無逸)'이라는 글을 지어 경계로 삼도록 했다. 말 그대로 안일함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한무제, 4명이 함께 보필토록 해

중국 역사에서는 이처럼 선왕의 고명을 받아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한 인물로 주공 다음으로 한나라 때의 대장군 곽광(霍光)을 들 수 있다. 현대 중국 역사학자 강붕(姜鵬)은 '혼군 명군 폭군'(왕의 서재)에서 한나라 무제(武帝)가 곽광을 첫 번째 고명대신으로 꼽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한무제 곁에서 20년 동안 시종하면서 한 번도 실수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수하지 않는다면 참을성이 강하고 스스로 신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속담에 '본심은 한 겹 뱃속에 있다'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릴 때 겉모습은 그려도 그 속은 그릴 수 없듯이 시간이 지나야 본심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한무제는 곽광의 충성도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파악은 어려우나 곽광의 이복형인 곽거병(霍去病)은 한무제가 인정하는 충복(忠僕)이었다. 그래서 한무제는 곽거병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인 곽광을 대우하며 은혜를 베풀었다. 곽광으로서는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고, 20여년 동안 실제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곽광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경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주도면밀했던 무제는 곽광 외에 상홍양(桑弘羊), 김일제(金日石單), 상관걸(上官桀)도 함께 고명대신으로 삼았다. 이들도 모두 무제가 크게 신임했던 신하들이다. 즉 1대3의 견제 구도를 만들어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한 것이다. 결과는 크게 성공적이었다. 강붕의 말이다. "고명대신을 선택한 일에서 우리는 한무제의 안목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한무제는 확실히 용인술에 능통했다. 한무제 사후에 한나라가 근 100년 동안 수성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가 선택한 고명대신들의 공에 기인한 것이다. 그중에 곽광의 활약이 대단했다."

어린 단종 못 지킨 김종서

우리 역사에서 주공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인물은 수양대군이다. 그러나 문종이 죽자 수양대군은 대권을 향한 길을 걸었고 마침내 정란(靖亂)을 일으켜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반면에 김종서(金宗瑞)는 문종으로부터 유명을 받아 고명대신으로서 단종을 보위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분명 김종서는 세종 대와 문종 대에 큰 업적을 남긴 신하임이 분명하지만 고명대신의 책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충성심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육척 고아를 지켜내야 할' 책무에서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서는 당시 좌의정으로 사실상 인사권은 물론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양대군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면밀하게 살폈어야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 자기 집에서 일격을 당해 결국은 단종까지 죽게 만들었다. 이 점에 관한 한 김종서는 죄인일 뿐 의인(義人)이라 할 수 없다. 학계의 김종서 평가가 워낙 일방적 칭송 일변도이기에 지적해두는 말이다.

광해군에게 아들 죽게 만든 선조

광해군 때의 영창대군 죽음은 사실 선조(宣祖) 자신이 만든 비극이라 할 수 있다. 1602년(선조 35년) 7월 13일 51세의 늙은 국왕 선조는 19세 신부와 국혼을 거행했다. 그때까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미뤘던 선조는 결국 후궁의 자식이 아니라 정비(正妃)의 혈통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4년 후인 1606년 드디어 원자가 태어나니 이 아이가 훗날의 영창대군이다.

당시 영의정이던 유영경(柳永慶)은 대대적인 하례(賀禮)를 열 것을 주청해 이를 관철한다. 이는 사실상 광해군을 배제하겠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선조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결국 2년 후에 세 살짜리 적자(嫡子) 하나를 남긴 채 왕위는 광해군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이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는 선조가 미리 써놓았던 유언을 공개한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본받아라."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숨어 있다. 원칙대로 하자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왕위는 영창대군에게 가도록 하고서 인목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도록 했어야 사리에 맞는다. 그렇지 않고 애당초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국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리(事理)를 저버린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광해는 친형인 임해군도 죽였고 영창대군도 죽였으며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서인들의 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오랜 유배 생활을 했다. 유영경의 경우는 고명대신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광해군이 임금이 된 상황에서 영창대군을 지켜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유영경은 결국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를 갔고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선조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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