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제품에 투자 받고 판매까지… 日 크라우드펀딩이 제조업 살린다

입력 2020.01.03 03:00

새 유통채널 日크라우드펀딩 플랫폼 '마쿠아케'

일본 쇼핑의 메카인 도쿄 신주쿠의 이세탄백화점 2층. 5년째 이색적인 매장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최대 크라우드펀딩(CF) 플랫폼 마쿠아케(Makuake)에서 선보인 패션 아이템이나 첨단 IoT(사물인터넷) 제품들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아이디어 단계의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에 일반 이용자들이 소액의 자금을 투자, 제품이나 서비스의 정식 출시를 돕는 서비스다. 이세탄은 전시된 제품이 마쿠아케 플랫폼에서 목표 펀딩(자금조달)에 성공하면 총금액의 5%를 수수료로 받는다.

크라우드펀딩 최대 격전지인 미국에서 CF플랫폼이 처음 등장한 건 2008년이다. 2013년 등장한 마쿠아케는 미국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일본 최대 규모(조달 자금 기준)의 CF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마쿠아케의 접속자 수는 2016년 530만명에서 2019년 1534만명으로 약 세 배 늘었다. 결제 총액도 2016년 10억엔에서 지난해에는 약 55억엔(약 583억원)으로 다섯 배 이상 증가했다.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8년 일본의 크라우드펀딩 시장 규모는 2045억엔으로 전년보다 20% 이상 증가했다. 2013년 8월 서비스를 시작한 마쿠아케는 누적 프로젝트가 6000건이 넘는데, 이 중 목표 펀딩액을 채운 기업은 5500여 건으로 성사율이 92%에 달한다. 미국의 대표적 CF 플랫폼 킥스타터의 경우 성공한 프로젝트(10만건)가 목표 펀딩액에 미치지 못해 실패한 프로젝트(19만건)의 절반에 불과하다. 후지모토 겐타로 전 노무라연구소 애널리스트는 "일본은 미국보다 모노즈쿠리(제조) 부문에서 우위에 있어 마쿠아케 같은 구입형 CF 시장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 제품 위기감에서 시작

마쿠아케는 일본 제품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졌다. 나카야마 료타로 현 사장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베트남에서 벤처기업의 투자 발굴가로 활동했는데, 당시 "일본 제품들이 미국이나 한국 제품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모기업인 사이버에이전트를 설득해 마쿠아케 서비스를 출시했다. 일본의 우수한 제조 기술들과 아이디어의 제품화를 돕자는 취지였다. 서비스 초기에는 300곳이 넘는 기업을 돌며 유치전을 펼쳤지만 거절당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하지만 마쿠아케는 창업 6년 만에 일본을 대표하는 유통 채널로 탈바꿈했다. 지난해까지 1000만엔(약 1억원) 이상의 자금 조달에 성공한 프로젝트는 총 200건이 넘는다. 누적 조달 금액도 100억엔(약 1060억원)을 돌파했다.

크라우드펀딩은 대체로 참가자들이 원하는 금액을 창업자금으로 투자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이에 반해 마쿠아케는 구매계약형 CF 플랫폼이다. 마쿠아케의 이용자는 단순히 돈을 투자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정 금액을 지원하는 대가로 개발 단계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미리 할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특전을 제공받는다. 예컨대 생산업체는 선착순 200명의 지원자에게 정가보다 25% 할인된 가격에 제품을 제공한다. 이와 별도로 마쿠아케는 프로젝트별로 총조달 금액의 20%를 업체로부터 수수료로 받아 수익을 확보한다.

마쿠아케의 주요 이용자들은 30~50대 남성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상품에 열광하는 '얼리어답터'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마쿠아케에는 해외 기업들의 첨단 IT 기기뿐만 아니라 안경에 걸어 눈깜빡임으로 사진을 찍는 초소형 카메라, 여과지 없이도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도자기머그컵 등 일본 기업들의 아이디어 제품들이 가득하다. 자칫 묻힐 수도 있었던 많은 제품이 마쿠아케를 거치면서 소비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마쿠아케에 올라온 제품들은 참신하고 흥미롭다'는 입소문을 타고 대형 잡화 브랜드인 도큐핸즈 등 대형 소매업체 10곳과 판매 제휴도 맺었다. 시계 브랜드 노트(knot)는 2014년 마쿠아케에 신제품을 공개해 목표액의 다섯 배 이상을 조달했다. 노트의 엔도 히로미쓰 사장은 "마쿠아케의 가장 큰 이점은 자금 조달보다 제품을 만들기 전에 고정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제품 홍보와 컨설팅까지 제공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활용하면 제품을 론칭할 때 유통 채널 확보와 마케팅이 훨씬 쉬워진다. 마쿠아케는 소비자에게 제품의 가치를 전하는 홍보에 집중해 경쟁회사와 차별화를 꾀했다. 회사나 제품의 정량적인 스펙이 아니라 제품 아이디어의 원천이 무엇인지 같은 스토리를 최대한 흥미롭게 풀어 제품과 함께 실었다. 판매되는 모든 제품에는 2~3분짜리 소개 영상 링크가 걸려 있는데, 창업자나 직원이 직접 출연해 제품 개발 동기와 사용법 등을 얘기한다. 가령 샤프의 액정기술을 활용한 술 보랭제의 경우 담당자에게 개발 뒷이야기를 듣고 직접 인터뷰 기사를 만들어 블로그나 동영상TV에 배포해 목표 금액의 20배가 넘는 펀딩에 성공했다. 광고는 붙이지 않는다. 본래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홍보에는 모기업인 사이버에이전트가 운영 중인 블로그와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아메바TV'를 활용했다.

마쿠아케는 기업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주는 컨설팅도 병행했다. 2016년에는 기업 지원 센터인 인큐베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각 기업에서 신제품 아이디어를 전달하면 어떤 소비층을 겨냥할지, 구체적으로 제품의 매력을 어떻게 전달할지를 큐레이터가 지원한다. 마쿠아케는 60명의 직원 중 15명이 큐레이터다. 이들이 제품 매력도, 품질 등을 깐깐히 따지는데 성능시험까지 진행한다. 이런 절차 없이 팔 경우 기업 제품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어서다. 이와 더불어 금융회사 100곳 이상과 연계해 필요할 때 연결해주고, 생산을 위탁할 공장도 중개한다. 접이식 전동바이크를 개발한 일본의 벤처기업은 마쿠아케 진출 후 한 자동차 판매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대기업의 새 유통채널로 각광

일본 대기업들도 마쿠아케에 잇달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소니는 2014년에 마쿠아케를 통해 패션용 스마트워치와 스마트 잠금장치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지난달에는 캐논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초소형 디지털카메라 'iNSPiC'를 마쿠아케 플랫폼에서만 한정 판매해 화제를 모았다. 지금까지 대기업 17개사와 협업으로 내놓은 신제품은 30여개다. 도시바는 알코올 감지기기인 'tispy'를 시험 판매했다. 일용품 기업인 라이온은 처음으로 미용가전 시장에도 도전했다. 대기업들이 CF에 주목하는 이유는 최소 수억원에 달하는 신제품 개발 비용과 재고 부담을 줄이면서도 새로운 제품 개발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마쿠아케 플랫폼은 일본의 중소 제조업체가 저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대기업이 혁신을 지속할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마쿠아케는 글로벌 플랫폼으로의 도약도 꿈꾸고 있다. 지난달에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 산하의 CF 플랫폼 짜오뎬신훠(造点新貨)와도 손을 잡았다. 각자의 플랫폼에서 펀딩에 성공한 스타트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서로 추천해 시너지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

대중을 뜻하는 크라우드(crowd)와 자금 조달을 뜻하는 펀딩(funding)의 합성어. 개인이나 기업이 특정 아이디어나 프로젝트의 사업화 자금을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 일반 대중에게서 조달하는 방식이다. 조달 목적이나 출자자에게 돌아가는 혜택 등에 따라 기부형과 구입형, 융자형, 펀드 투자형, 주식형 5가지로 분류한다.

대표적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미국 킥스타터(Kickstarter) 시작 화면. 인디고고와 더불어 양대 크라우드펀딩 회사다. /블룸버그
소니는 직접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운영… 대기업 전용 플랫폼도 인기

대기업도 크라우드펀딩 열풍

JETRO(일본무역진흥기구)는 지난해 1월 펴낸 보고서에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글로벌 크라우드펀딩 플랫폼(구입형)의 취급 총액 연평균 성장률은 28.8%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취급 건수도 880만 건에서 1729만 건으로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이처럼 크라우드펀딩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대기업들이 직접 CF 플랫폼을 운영하는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소니는 지난 2015년 7월 자사의 독특한 제품에펀딩하면서 구매도 가능한 플랫폼 ‘퍼스트 플라이트’ 서비스를 시작했다. 파나소닉도 지난 11월 CF 플랫폼 타마테바(TAMATEBA)를 론칭했다. 이 사이트를 통해 IT(정보기술)로 기른 채소를 가공해 만든 샐러드 드레싱 판매를 시작했다.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한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인디고고는 지난 2016년 대기업 전용CF 플랫폼 인디고고 엔터프라이즈(Indiegogo Enterprise)를 따로 꾸려 론칭했다. 매달 세계 각국에서 10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플랫폼이라는 이점을 살려 대기업들이 신제품의 고객 반응을 미리 살펴보고 안정적으로 제품을 출시할 수 있는 크라우드펀딩 명가로 자리 잡았다. 인디고고는 직접 선정한 소비자 평가단과 제품 디자이너를 대기업들과 연결해주는 컨설팅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GE와 모토롤라, P&G, 코카콜라, 소니, 보스 등 글로벌 대기업들은 최근까지도 주로 소량 판매를 통해 새로운 제품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P&G는 인공지능으로 제어 가능한 스마트 방향제 에어리아를 2018년 처음으로 공개했다. 한 대당 100달러였던 제품 50개는 공개 2시간 만에 모두 동났고 수천 명의 구매 예약자를 받았다. 스피커와 음향기기로 유명한 보스는 이용자의 숙면을 방해하는 소음을 차단하는 초소형 무선 귀마개인 노이즈-마스킹 슬립버즈 시제품을 2017년 이 플랫폼에 처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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