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코로 마시는 사나이 "맛은 다섯가지, 냄새는 수만가지"

입력 2019.12.20 03:00

박순욱의 술술 경영 <2>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의 '후각 경영'

한의사의 손자로 태어나 당귀, 지황, 천궁 같은 한약재 냄새를 늘 맡고 자랐다. 남들보다 코가 약간 예민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어릴 때부터 집안 곳곳에 널려 있는 약재 냄새를 워낙 많이 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코로 평생을 벌어먹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경북 문경에서 세계 최초의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를 만든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 그의 예민한 코는 방송을 통해 처음 전국에 알려졌다. MBC '생방송 주병진 쇼'(1993년)에 출연, 눈을 가리고 위스키 향만 맡고도 10여개의 위스키 이름을 척척 맞혔다. sbs '불가능은 없다'(1997년)에서는 즉석에서 나온 달팽이 요리에 들어간 식재료 20가지를 다 맞혀 25돈 금메달을 상품으로 받았다. 레시피도 모르는 달팽이 요리에 들어간 로즈마리, 타임, 계피, 월계수잎, 땅콩, 후추 등을 코로 다 알아냈다.

위스키 블렌더로 30여년

이 대표는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OB맥주에 입사했다. 이후 지금까지 40년 남짓 '술 개발' 한우물만 파고 있다. 그동안 세상이 다 알아주는 술을, 그것도 여럿 만들었다. 하지만 술에 관한 한 그의 욕심은 아직 다 채워지지 않았다.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가 서울 조계사 맞은편 나인트리호텔 12층 전통술 바인 스페이스 오에서 오미로제 스파클링와인 향을 맡고 있다.
이종기 오미나라 대표가 서울 조계사 맞은편 나인트리호텔 12층 전통술 바인 스페이스 오에서 오미로제 스파클링와인 향을 맡고 있다. /조인원 기자
2011년 세상에 나온 '오미로제'는 국내외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청와대 행사를 비롯해 국가 정상급 행사의 단골 건배주로 쓰이고 있으며, 샴페인의 본고장 프랑스에도 수출됐다. 문경에 있는 그의 양조장 복도에는 2012년 서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 만찬장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미로제로 건배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다.

요즘 그를 대표하는 술로는 오미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꼽지만, 사실 그의 전공은 위스키다. 원료와 숙성 연도가 각기 다른 여러 위스키 원액을 블렌딩(blending)해서 최상의 향과 맛을 내는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ey)를 만드는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가 30여년간 그의 직업이었다. 국내 위스키시장 1, 2위인 '윈저'와 '골든블루'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프랑스도 포기한 오미자 발효 성공

디아지오코리아 부사장을 끝으로 2006년 말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우리 농산물로 한국을 대표할 술을 만들겠다"고 '제2의 도전'을 선언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고향도 아닌 문경에서 칩거한 끝에 이종기 대표가 새로 내놓은 술이 '오미로제'(2011년), '고운달'(2016년), '문경바람'(2016년)이다. 이 중 오미로제는 스파클링 와인, 고운달과 문경바람은 오미자 증류주, 사과증류주이다.

이 중 개발에 가장 애를 먹은 술은 오미로제다. 오미자가 워낙 신맛이 강해 발효가 쉽사리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술은 반드시 발효를 거친다. 발효는 한마디로 곡물, 과일이 갖고 있는 당분을 알코올로 바꾸는 과정이다. 발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당분이 알코올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오미자 발효의 문턱을 넘지 못한 그는 프랑스 샴페인연구소를 찾아가 발효를 의뢰하지만 '오미자는 신맛이 강해 발효가 어렵다'는 답변밖에 듣지 못했다. '한국이 원산지인 오미자는 내가 아니면 알코올 발효에 성공할 수 없다'는 배수진을 치고 다시 연구에 몰입했다. 이종기 대표는 2년여가 지나서야 마침내 오미자 발효에 성공했다. 그때가 2008년 말. 그로부터 3년 뒤인 2011년에야 오미로제가 정식 제품으로 세상에 나왔다. 발효와 숙성에 꼬박 3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이 집산지인 오미자 열매. 오미자로 술을 빚으면 로제와인보다 빛깔이 더 곱다.
경북 문경이 집산지인 오미자 열매. 오미자로 술을 빚으면 로제와인보다 빛깔이 더 곱다. /오미나라
이종기 대표가 다른 과일이 아닌 오미자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든 이유는 오미자의 다양한 향 때문이다. '코 박사' 이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양인이 좋아하는 모든 향이 오미자 열매에 다 있다"고 한다. "서양인이 좋아하는 향은 세 가지 종류다. 허브향(로즈마리 등에서 나는 향), 스파이시한 향(후추와 계피 등에서 나는 매콤한 향), 과일향(사과와 포도 등에서 나는 달콤한 향) 등 이 세 가지 향을 다 갖고 있는 유일한 과일이 오미자다. 그래서 외국인이 오미자 스파클링 맛을 보면 열광한다."

술 제조엔 미각보다 후각이 중요

―후각이 미각보다 술 개발에 더 중요한 이유는?

"미각은 금방 지친다. 특히 알코올 도수가 40도가 넘는 독한 위스키 원액 수십 가지를 테이스팅하는 경우, 혀로는 제대로 느낄 수 없다. 한두 모금만 맛봐도 혀가 얼얼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코는 하나의 향기를 맡은 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둘째, 미각의 세포는 제한적이다. 우리가 느끼는 맛은 다섯 가지밖에 없다.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 정도다. 매운맛이나 떫은맛은 맛이 아니라 자극이다. 이에 비해서 후각세포는 수만 가지다. 시각만큼이나 가지 수가 많은 게 후각이다."

―뛰어난 후각으로 실제 술 개발에 효과를 본 사례를 든다면?

"1996년 '윈저' 개발할 때 후각이 절대적이었다. 위스키를 새로 개발하려면 우선 수백 가지 위스키 원액 향을 맡아본 뒤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압축시킨 뒤에야 맛을 본다. 결국 술맛을 결정하는 것은 블렌딩인데, 블렌딩 완성도는 예민한 코가 좌우한다."

오미로제 결
오미로제 결
오미로제는 품질 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판매에 날개를 달지는 못했다. 원료인 오미자 가격이 워낙 비싼 데다 발효와 숙성 등 생산에 걸리는 시간이 3년이나 걸리면서 한 병 가격이 10만원에 가깝다. 프랑스의 유명 삼페인도 5만원대 제품이 즐비하다 보니, 샴페인보다 더 비싼 '한국산' 스파클링 와인을 소비자들이 곱게 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이 대표는 이 난관 역시 내년 봄이면 극복한다. 기존 오미로제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4만원대 신제품 '오미로제 연'이 내년 4월쯤 출시되기 때문이다. 기존 제품 오미로제는 신제품과 구분짓기 위해 이름을 '오미로제 결'로 바꿨다. 연, 결 모두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다. 신제품 스파클링은 제조 공법을 혁신해 종전 생산 기간 3년을 1년으로 대폭 줄였다.

후각 외에 향기 기억술도 갖춰야

이 대표가 선보인 오미자 증류주 고운달은 원래 52도짜리 술이다. 그는 도수를 낮춘 고운달 43도를 곧 내놓는다. 증류주는 도수를 낮추면 쓴맛이 도드라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쓴맛이 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쓴맛을 없앴나?

"증류주가 도수를 낮추면 쓴맛이 나는 까닭은 높은 도수의 술에 물을 타서 희석시키기 때문이다. 고운달 43도는 물을 타서 도수를 낮춘 게 아니다. 쓴맛을 해결한 것은 블렌딩이다. 증류할 때부터 여러 가지 도수의 증류주를 만들어 숙성 후 섞으면 쓴맛이 나지 않는다. 40도짜리 증류주도 만들고 50도짜리, 60도짜리 증류주 등 다양한 원액을 만들어 장기 숙성 후 이를 적절하게 블렌딩하는 방식으로 43도를 맞춘 것이다."

―이때에도 코가 중요한 역할을 했나?

"와인이든 위스키든 대부분의 술은 블렌딩(혼합)을 통해 맛과 향이 완성된다. 결국 블렌딩이 가장 중요하고 그 블렌딩 기술은 혀가 아니라 코가 좌우한다. 그러나 코만 발달했다고 끝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한다. 예민한 코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향을 머리가 기억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특정 향기를 맡았을 때 어떤 특별한 시기, 장소를 연상하는 것이 향기를 기억하는 좋은 방법이다. 와인 만화로 유명한 '신의 물방울'에서도 그러지 않던가? 주인공이 부르고뉴 와인 향을 맡으면서 '이 와인은 어릴 적 라벤더 꽃밭에서 맡은 향을 떠올리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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