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찍어 공급한 건 같은데… 왜 후진국은 하이퍼 인플레이션, 선진국은 멀쩡?

    •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입력 2019.12.06 03:00

홍춘욱의 경제사 여행 (4) 하이퍼 인플레이션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주요국 중앙은행은 공격적으로 통화 공급 확대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1920년대 독일처럼 심각한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할 것이란 우려가 퍼졌다. 하이퍼 인플레는 매월 물가가 50% 이상 상승하는 극단적 인플레이션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금융 위기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남미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한 나라는 없다.

하이퍼 인플레가 어떻게 발생하며 사그라지기에 이런 예상이 빗나갔을까. 이 의문을 푸는데, 경제학자 제프리 색스 컬럼비아대 교수의 경험이 도움을 준다. 그는 저서 '빈곤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23년 독일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사례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책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실제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현장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카를로스 이투랄드라는 볼리비아 학생을 만나기 전까지는… 1985년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거대한 재정 적자를 메우려고 돈을 마구 찍어내고 있었다… 볼리비아 정부가 군대와 광부, 교사들에게 지급할 현금을 얻으려고 볼리비아 중앙은행(BCB)에 직접 채권을 매각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볼리비아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인류 경제사의 다른 사례들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당시 색스 교수는 28세로 하버드대 종신 교수가 된 참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 업적에 박차를 가하려던 순간, 볼리비아에서 유학 온 학생이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대해 그렇게 잘 알면 우리나라 문제도 해결해달라"고 이야기한 게 그를 '현실' 경제학자로 바꾼 첫걸음이 되었다고 한다.

색스 교수 설명은 이어진다. "연 2만4000%나 되는 인플레가 갑자기 종결될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떠올리기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완만히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급격히 중단되어 왔다… 볼리비아인 동료와 토론한 결과, 볼리비아 예산의 핵심이 석유 가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유류세에 재정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었으며, 정부는 석유 가격을 몇 개월마다 한 번씩 바꾸었는데 이렇게 낮게 유지된 석유 가격이 예산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석유 가격 인상으로 인플레 잠재워

당시 볼리비아 정부가 석유 가격을 인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기득권의 저항' 때문이었다. 볼리비아에서 자동차와 보일러에 기름을 넣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층이며, 이들의 이익을 해치는 정책이 시행되려면 "하이퍼 인플레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했으니, 이제 남은 건 볼리비아 정부의 결단뿐이었다. 당시 삭스 교수는 급격한 석유 가격 인상과 보조적 재정 패키지를 제안했고, 이를 볼리비아 정부가 수용하고 실천에 옮기자마자 거짓말처럼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사라졌다. 볼리비아 국민이 물가가 끝없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유는 정부가 '세금을 걷을' 마음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석유 가격을 인상하는 등 조세 수입을 늘리겠다는 의지를 실천으로 입증하자 볼리비아 국민의 인플레 기대도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이다.

볼리비아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수지와 소비자물가 상승률 관계를 보면 재정 적자가 GDP의 10% 선을 넘어서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이 나타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반대로 GDP 대비 재정 수지가 1985년부터 개선되자마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대로 떨어졌다.

지난 2016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 운전자가 지폐를 꺼내 세고 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2016년 물가상승률을 274%, 2017년 862%, 2018년 13만60%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블룸버그
정부 정책 신뢰성이 문제 해결 핵심

볼리비아의 교훈을 베네수엘라 사태에 적용해보자. 최근 베네수엘라 경제지표는 1985년 볼리비아와 판박이다. 차베스 정부 시절부터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서 인플레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으며, 특히 GDP 대비 재정 적자가 10% 선을 넘어선 2014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하이퍼 인플레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85년 볼리비아와 달리 베네수엘라는 하이퍼 인플레를 해결하는 데 몇 가지 난관이 있다. 최근 정치적 불안정 흐름 속에서, 과거 볼리비아처럼 인기 없는 정책을 시행할 주체가 부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이퍼 인플레를 억제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기득권의 저항을 누르고 재정 긴축을 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재정 긴축 정책을 누가 시행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해결은 요원한 상태다.

마지막으로 2008년 이후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 등 세계 주요 선진국이 대대적 재정 적자를 기록하고, 또 중앙은행이 정부 발행 채권을 사들였음에도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과 한국 등 상당수 중앙은행은 물가의 지속적인 하락, 즉 디플레 위험에 대비해 적극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중이다.

베네수엘라와 달리 선진국에서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국민의 '기대'에 있다. 베네수엘라와 달리, 미국과 유럽 선진국은 오랫동안 재정을 건실하게 운영해 왔던 경험이 있기에 인플레에 대한 '기대'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2010년을 전후해 경기가 회복되고 또 인플레 압력이 높아지자마자, 긴축 정책이 시행됨으로써 '건전 재정'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당시 긴축 정책 타이밍이 적절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긴축 정책 시행 이후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위기를 겪은 데다, 일부 국가는 지금까지도 저성장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하이퍼 인플레의 위험을 차단할 수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둘 가치가 있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Book

더보기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