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위기도 손, 극복할까

입력 2019.11.22 03:00

20대에 죽을 고비, 40대엔 거품 붕괴, 그리고 60대에 또…

송의달 선임기자
송의달 선임기자
"온통 새빨간 숫자다. 엄청난 적자다. 잘못 판단했다는 점에서 크게 반성한다. 너덜너덜한 실적을 내 참담하다."

지난 6일 낮 도쿄 시내에서 열린 소프트뱅크그룹(SBG) 실적발표회장. 손정의(62·일본명 손 마사요시) 사장 겸 회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SBG가 올 2분기(7~9월)에만 창사 38년 만에 최대 규모인 7001억엔(약 7조5398억원)의 적자를 낸 탓이다. 상반기 실적도 지난해 15조원대 흑자에서 올해는 1647억원 적자가 됐다. "'마이더스의 손(孫)'이 '마이너스의 손'으로 침몰했다"는 비아냥이 쏟아진다. "조만간 태풍, 폭우가 쏟아질 상황"이라는 그의 말대로 앞날도 험난하다.

지난달 29~31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 포럼. 연설마다 우레와 같은 청중이 몰리던 예전과 달리 손 회장이 연단에 섰을 때 청중석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전날 같은 장소에서 열린 다른 연설에 청중이 가득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텅 빈 청중석'이 그의 추락하는 위상을 상징한다는 분석이 일각에서 나온다.

'정보혁명으로 인류를 행복하게'라는 비전을 품고 24세 때 사업에 투신한 손정의는 2017년 세계 최대 테크투자 펀드인 '비전 펀드'를 세워 유망 혁신 기업들에 집중 투자해 왔다. '인공지능(AI) 기술 혁명을 이끄는 지휘자'를 자임하며 300년 소프트뱅크 제국 건설을 향해 나선 그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든 것이다. 손정의는 20대와 40대에도 큰 위기에 직면했었다. 그는 어떻게 두 번의 위기를 이겨냈으며 세 번째 위기에도 불사조(不死鳥)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까.

①1980년대 중반 : 시한부 판정

1983년 봄 손정의는 건강검진에서 '만성간염으로 5년 시한부 생존' 판정을 받았다. 바로 그날 입원했다. 소프트뱅크 창업(1981년 9월) 후 1년 반쯤 된 때였다. 병실에 PC, 팩시밀리 등을 두고 원격 경영을 했지만 이듬해 상품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 실패로 재무 상황이 곤두박질쳤다. 1986년엔 신뢰하던 유능한 임직원 20명이 배신했다. 한꺼번에 사표를 내고 독립해 별도 회사를 차린 것이다. 건강, 사업, 인간관계 등 모든 게 수렁에 빠져 회사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최악이었다.

손 회장은 병실에서 3000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절치부심했다. '손자병법'을 숙독하며 평생 경영 전략이 된 총 25자(字)의 '제곱 병법'을 만든 것도 이때였다. 1986년 5월 일선에 복귀했지만 회사는 10억엔의 빚을 지고 있었다. IT 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 창업자와 손잡고 만든 '가장 값싼 전화회선을 자동으로 찾아주는 통신기기'로 20억엔을 벌어 급한 불을 껐다. 사내 활력 제고와 단합을 위해 일별(日別) 관리제와 10명 단위 독립채산제, 스톡옵션제(일본 최초) 등을 도입하고 과감한 성과 보상을 했다. '신기술'에 활로가 있다고 판단한 손정의는 매년 절반 정도 미국에 머물며 신생 벤처기업들에 공을 들였다. 1992년 일본에 독점 판매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3.1 등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데 힘입어 그해 소프트뱅크 매출은 처음 1000억엔을 넘었다. 여세를 몰아 손정의는 1994년 소프트뱅크 주식공개(IPO)를 성공시키며 단숨에 2000억엔을 손에 쥐었다. 만성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②2000년대 초 : 초대형 적자

미국 야후 등 벤처기업 투자로 대박을 낸 손정의의 재산은 1999년 말부터 다음 해 2월까지 매주 거의 1조원씩 불어났다. 같은 해 3월부터 '인터넷 거품'이 꺼지자 1200만엔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순식간에 100분의 1 토막 났다. 700억달러이던 개인 재산은 10억달러 밑으로 줄었다. 하지만 손정의는 "이때가 오히려 투자할 적기(適期)"라며 그해 투자처를 600여개사로 더 늘렸다. 2001년 일본 최대 기업인 NTT보다 속도는 5배 빠르고 가격은 8분의 1에 불과한 초고속인터넷 사업에 뛰어들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손정의가 이번엔 제대로 미쳤다"는 반응 속에 회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반발·퇴사했고 은행들은 대출을 끊었다.

자금난에 몰린 손정의는 '알짜'이던 야후 본사 주식 등을 팔았다. 사장실 대신 다른 건물의 손바닥만 한 소회의실로 옮겨 밤샘하며 하루 15~19시간씩 일했다. 툭하면 새벽 3시, 6시에도 회의를 여는 사투(死鬪)의 연속이었다. 인터넷 회선 공사에 협조하지 않던 NTT를 압박하려 관할 관청(총무성)을 찾아 "분신자살 하겠다"며 협박했다. 2001년부터 4년 연속 매년 1000억엔씩 적자를 봤지만 밀어붙였다. 손정의는 "'크레이지(crazy·미쳤다)'라는 말 외에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시기"라고 했다. 유선통신 사업자인 일본텔레콤 인수 후 2005년 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500만명을 넘으면서 회사는 흑자를 냈다. 2006년엔 전 재산과 그룹 자산을 총동원해 이동통신업체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대폭 할인 요금제와 TV 광고, 애플 아이폰 공급 등이 연속으로 적중하면서 2009년 상반기 소프트뱅크는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순이익은 1년 전 대비 72% 급증했다.

③2019년 : 비전펀드 큰 손실

그로부터 10년 후 불어닥친 세 번째 위기는 규모부터 다르다. 손정의가 사우디 국부펀드와 주도해 만든 '비전펀드'(총 1000억달러·약 116조원)가 올 9월 말까지 88개 기업에 707억달러를 투자했지만 대다수 기업의 실적 악화로 대형 손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118억달러를 투입한 중국 디디추싱은 6년 연속 적자에 감원 등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있다. 세계 최대 공유사무실 기업 '위워크'는 사업성에 의문이 커지면서 지난달 예정된 기업공개(IPO)가 무기 연기됐다. 비전펀드와 소프트뱅크는 위워크에서만 154억달러(약 18조원)의 투자 손실을 냈다. 소프트뱅크 역사상 최악의 투자 실패 사례다. 비전펀드 투자를 받은 뒤 상장(上場)한 6개 기업 중 IPO 때보다 주가가 오른 기업은 2개뿐이고 우버와 슬랙 등 나머지 4개사는 주가가 20~40% 떨어졌다.

직감(直感)에 의존한 순간의 판단으로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는 '손정의 식(式) 투자'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다. 그가 올 7월 시작한 2차 비전펀드 모집에 사우디 정부조차 냉담한 게 이를 보여준다. 소프트뱅크그룹의 부채는 이미 1600억달러(약 187조원)에 달한다. 비전펀드 내부의 관리 부실과 불화설(說)이 이는 것도 부담이다. 그나마 알리바바그룹 지분(총 26%)을 포함해 손 회장이 쓸 수 있는 총자산이 48조엔(약 512조원)쯤 되는 게 버팀목이다. 그는 6일 "반성은 하지만 위축되진 않는다. 미동하지 않고 비전 그대로 전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위워크' 같은 투자 실패가 한 번만 더 반복되면 소프트뱅크는 물론 전 세계 벤처투자 업계가 휘청거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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