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젓고, 대포 쏘고, 불화살 날리는 거북선… 갑판은 몇 층?

    • 민계식 前현대중공업 회장

입력 2019.11.22 03:00

거북선의 진실 (2) 선체 구조

민계식 前현대중공업 회장
오늘날 임진왜란 당시 실제 전투에 참가한 거북선에 대한 사료(史料)는 극히 희소하고 단편적인 기록이 전해올 뿐 거북선의 특성이나 설계도, 구조도, 건조 과정 등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직접 사료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선 이순신 장군 자신의 일기인 '난중일기'와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인 임진장초를 비롯한 각종 장계(狀啓), 조선왕조실록,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李芬)의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그리고 여러 가지 후대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에 대한 고증 작업은 우선 위에 기록된 사료들을 활용해야 되리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형상이나 구조, 전투 능력 등을 보고하거나 서술하는 기록 중에서 오늘날에도 전해 오는 세 가지 대표 기록을 들자면, 이순신 장군의 제2차 출전 후 장계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자 귀선(龜船) 관련 기록,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 등이다.

거북선은 1층? 2층? 3층?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해서 가장 자주 논란이 되는 것이 갑판 구조다. 학자에 따라 단갑판(1층 갑판), 두갑판(2층 갑판), 세갑판(3층 갑판) 구조까지 주장하는 바가 다양하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없으므로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사료에는 거북선은 "판옥선과 크기가 같고 판옥선 위를 거북이 등처럼 덮은 전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선체 구조, 특히 청판(廳板·마룻바닥) 아래 선체 구조는 판옥선과 동일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모체로 개발된 전선이므로 판옥선에서 거북선으로 변경되어 가는 과정을 논리적·합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림 1〉. 우선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단갑판 구조설(說)이다. 고(故) 김재근 교수의 저서인 '거북선'에는 "거북선은 판옥선의 상갑판을 제거하고 그 대신 둥그런 개판을 덮은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거북선은 단갑판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한 사료가 비록 희소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기술은 찾아볼 수 없다.

거북선의 갑판 구조가 단갑판이었다면 즉, 노갑판과 전투갑판이 하나의 갑판으로 되어 있었다면 거북선은 노갑판과 전투갑판을 분리시킬 수 있는, 판옥선의 이층 구조가 갖는 장점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돌격선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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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DB
단층은 전투에 비효율적

우선 전투 활동을 위한 군사 한 명당 점유 면적이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승선 인원은 150~160명 선으로 추정된다. 만약 거북선의 갑판이 하나였다면 군사 한 명당 점유 면적이 0.6㎡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 밀집대형으로 군사 퍼레이드할 때의 1인당 점유 면적 정도다. 이처럼 활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군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혼잡한 상태에서 노 젓고, 대포 쏘고, 불화살을 날리며 전투 활동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극히 비효율적이라고 판단된다.

그다음으로 전투 환경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당시 화약은 독성 매연이 심하여 거북선과 같이 폐쇄된 공간에서는 몇 번 포사격을 하고 나면 질식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격전을 수행하려면 계속 대포를 쏘아대면서 동시에 격군(格軍·노 젓는 군인)들은 최대의 기동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이것은 단갑판 구조 하의 좁은 공간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거북선이 단갑판 구조였다면 전투선으로서 기능은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다. 만약 1592년 임진년에 건조한 거북선이 단갑판 구조였다면 실전에서 비효율성을 확인하고 1593년에 추가로 건조한 거북선에서는 개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주장으로 세갑판 구조설이 있다. 3층 갑판설에 대해서는 3층 갑판이 되어야 할 이유, 즉 각각 갑판의 용도, 또는 역할에 대한 설명에서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는 모습 추정도. 아래 〈그림 1〉은 조선시대 전선의 갑판 구조 변화를 추정한 모습이다. 〈그림 2〉와 〈그림 3〉은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을 두갑판 거북선 추정 선체의 중앙횡단면도와 측면도이다. 〈그림 4〉는 두갑판 거북선이 돛을 단 범장구조도 우현측면도, 〈그림 5〉는 용머리에 현자총통을 설치한 모습이다. /현대중공업 선박해양연구소·게티이미지 코리아
노갑판·전투갑판 분리… 2층 유력

끝으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갑판 구조는 판옥선의 갑판 구조와 동일하게 노갑판과 전투갑판, 두갑판 구조로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대한 몇 가지 대표 사료를 살펴보자. 우선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을 보면 "또 큰 배를 만들었는데 크기는 판옥선과 같고 위를 판자로 덮었다(又創作大船 大如板屋 上覆以板)"라고 기술되어 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년) 5월 1일자 기록에는 "스스로 의지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배 위에 거북(잔등)과 같은 판자를 덮었다(自以意造龜船 其制船上鋪板如龜)"라고 되어 있다. 최유해의 이충무공행장을 보면 "큰 배를 지혜롭게 만들고 배 위를 판으로 덮었다[創智作大船 船上覆以板]"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선체 구조, 특히 청판 아래 선체 구조는 판옥선과 동일하였을 것이고 갑판 구조도 판옥선과 동일하게 두갑판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 10년(1555년)에 등장한 판옥선은 동아시아 최강의 전선이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으로 승선 인원이 200명 전후가 되어 고려 말과 조선 초 전선인 대맹선보다 2배 이상 전투원을 승선시킬 수 있었다. 특히 노 젓는 노갑판과 전투를 하는 전투갑판을 아래·위 갑판으로 분리하여 역할 분담을 충실히 하도록 했다. 능로군(격군)은 지붕이 덮여 있는 노갑판(하갑판) 안에서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으며 노 젓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해전(海戰)의 승패는 전선(戰船)의 기동력에 따라 좌우되며 전선의 기동력은 격군들의 역할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노 젓는 노갑판과 전투를 하는 전투갑판을 아래·위 갑판으로 분리한 판옥선의 장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거북선을 개발할 때도 판옥선의 장점을 그대로 살렸을 것이다.

2층 판옥선에 덮개 씌운 듯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크게 보아 판옥선의 상갑판(전투갑판) 위에 거북이 등과 같은 덮개를 씌우고 덮개 위에 철첨을 꽂았으며, 뱃머리에 용머리를 설치한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북선의 갑판 구조도 판옥선의 갑판 구조와 동일하게 노갑판과 전투갑판 두 개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그림 2·그림3·그림4〉. 물론 이것은 필자의 추정이고 필자의 바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갑판 구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어느 갑판 구조가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를 염려하여, 용의 머리를 단 귀선을 만들어 입에 대포를…"

이순신 장군이 직접 밝힌 구조

이순신 장군은 여러 번의 장계를 통하여 거북선의 활약과 전과에 대하여 보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건조 동기, 구조, 전투 능력 등에 대한 보고는 제2차 출전 후 선조 임금에게 올린 장계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단 한 번뿐이다. 당포파왜병장 장계 중 거북선의 구조와 전투 능력에 대한 이순신 장군의 보고를 원문과 함께 다시 옮긴다.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를 염려하여, 전선과 다른 제도[別制]로 귀선(龜船·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배 앞(이물)에는 용의 머리를 달았고, 입에 대포를 놓으며, 잔등에는 철첨(鐵尖·쇠꼬챙이)을 꽂았습니다. 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의 배가 수백이라도 그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대포를 놓을 수 있습니다(臣嘗慮島夷之變, 別制龜船, 前設龍頭, 口放大砲, 背植鐵尖, 內能窺外, 外不能窺內, 雖賊船數百之中, 可以突入放砲)."

이순신 장군 자신이 직접 거북선을 소개한 장계 당포파왜병장에는 거북선의 등에 꽂힌 것이 '철첨'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반면, 선조수정실록과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는 '칼과 송곳(刀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거북선의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달았고, 등에는 칼·송곳 같은 쇠꼬챙이를 꽂았다는 것은 당시의 여러 사료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나 선조수정실록 등에 따르면 용머리의 입과 거북 꼬리에도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을 설치하고 포를 쏘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용두를 아무렇게나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포를 쏠 수 있도록 현자총통의 포신(砲身)과 용머리 입을 맞추어 설치해야 한다. 추정 배치도〈그림 5〉를 보면 용머리 입을 통하여 발포할 수 있도록 용두와 현자총통의 위치를 맞췄음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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