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은 복지만이 아니다… 집중해 창의적으로 일하기 위한 기술이다"

입력 2019.11.08 03:00 | 수정 2019.11.08 14:45

실리콘밸리의 '휴식 컨설턴트' 알렉스 수정 김 방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휴식 컨설턴트' 알렉스 수정 김 방.
미국 실리콘밸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휴식 컨설턴트' 알렉스 수정 김 방. / 최종석 기자
마이크로소프트, IBM, 오라클, HP 등 테크(기술) 회사를 고객으로 둔 영국의 텔레마케팅 회사 퍼수트 마케팅은 2016년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테크 기업 콜센터는 일반 콜센터와 달리 직원 교육이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높은 전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껏 숙련된 직원을 길러놓으면 경쟁사들이 더 높은 급여를 제시하며 낚아채 가는 경우가 많았다. 퍼수트 마케팅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신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급여는 그대로 유지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생산성이 30% 이상 증가하면서 목요일 오후까지 직원의 90%가 주간 통화 목표를 달성했다. 직원당 매출도 38시간 일할 때보다 더 늘었다. 소문이 나면서 입사 신청서가 쇄도했다. 이직률이 2%로 낮아지면서 헤드헌터에 주는 돈도 아낄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병원 가거나 운동할 시간이 늘면서 병가 쓰는 사람이 '제로(0)'가 됐다. 콜센터 업계에선 말이 안되는 성과라고 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모든 직장인들이 마음 속 한쪽에 숨겨놓은 열망이자 생산성을 저해하지 않은 채 이를 구현할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는 회사들이 전전긍긍하는 숙제다. 과연 성장하는 기업에서 워라밸은 사치일까 아니면 고속 전진을 위한 윤활유일까.
이런 갈등과 모순에 대한 현명한 해법을 연구해온 이른바 '휴식 컨설턴트' 알렉스 수정 김 방(55)을 미국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한 카페에서 만났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실리콘밸리 싱크탱크 스트래티직 비즈니스 인사이트 등에서 일했던 그는 2016년 '휴식(Rest): 왜 일을 덜하는데 성과는 더 좋을까'란 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세계 13개 언어로 출간됐다. 이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는 재미 교포 2세다.

'생산적 휴식'이 필요

―당신이 말하는 휴식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숨을 쉬지만 운동선수와 가수의 호흡은 다르다. 명상할 때 호흡법도 다르다. 그렇듯 일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은 '생산적인 휴식'을 말한다. 소파에 파묻혀 TV 채널을 돌리거나 한없이 자는 게 아니다. 우리를 좀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드는 휴식은 어떤 휴식일까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휴식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다."

―왜 휴식이란 주제에 몰두하게 됐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할 때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냈는데 신기하게도 회사 다닐 때는 생전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더라. 그제서야 일과 휴식, 그리고 창의성과 관계에 대해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학에서 과학사를 전공해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엄청난 야심가였지만 결코 하루종일 일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놀라운 성취 뒤에는 맹목적인 근면성 대신 계획적이고 효과적인 휴식이 있었죠."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해 달라.
"진화론을 집대성한 찰스 다윈은 평소 하루 4시간만 연구했다. 4시간을 정말 열심히 일한 뒤 나머지 시간에는 산책했다. 그는 산책하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산책이 잠재적인 창의성을 깨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패턴이다."

―그런 건 과학자나 작가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창의성이 중요한 직업에만 해당하는 것 아닌가.
"보통 직장인이나 요리사, 정비공 등도 문제 해결 과정에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근로시간이 길어지면 공장 생산성도 뚝 떨어지게 된다. 판단력이나 반응 시간에 악영향을 미친다. 초과 근무를 자주 하면 고도로 훈련된 의사들조차 실수가 잦아진다. 그 과정에서 몸 여기저기가 아픈 사람도 자주 나온다."
알렉스 수정 김 방(Pang·55) 프로필
더 짧게 더 스마트하게 일하는 시대

그는 요즘 내년 3월 출간을 목표로 속편을 쓰고 있다. 속편 제목은 '더 짧게(Shorter): 더 뛰어나게, 더 스마트하게, 더 적게 일하라'다. 주 4일 근무제 도입 등으로 근무시간을 줄여 생산성을 높인 기업 100여 곳을 분석했다. 그 중 절반은 직접 방문 조사까지 했다. 그는 "다양한 업종에서 근로시간 단축의 효과를 확인했다"며 "생산성이 드라마틱하게 뛰었다"고 했다.

덴마크 미슐랭 레스토랑인 노마는 지난해 중대 결정을 내렸다. 가게를 일주일에 4일만 열고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한 것. 그리고 그만큼 음식값을 인상했다. 
방씨는 "레스토랑 업종은 특히 장시간 근무가 많고 업무 스트레스도 심해 그만두는 직원이 많다"며 "최근에는 노마 외에도 근무시간을 줄이는 레스토랑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한국 기업 우아한 형제들은 생산성 향상을 전제로 2015년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7.5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2017년 남들은 주 52시간 도입을 준비할 때 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더 줄였다. 이 회사 직원들은 또 매주 월요일 오후에 출근한다. 
효과는 남달랐다. 2015년 495억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3193억원으로 3년새 6배가 됐다. 월요병에 허덕이던 월요일 오전 시간을 과감하게 삭제하니 사무실에는 생기가 돌았다.

급여 인센티브 줘서 이직률 낮춰

2000년대 초 스웨덴 예테보리 도요타자동차 서비스센터는 악명이 높았다. 대기 시간이 길어 고객 불만은 하늘을 찔렀고 정비공들은 초과 근무에 시달렸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센터는 정비공들의 근무 시간을 면밀히 살폈고 6시간이 지나면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센터는 2003년 정비공의 근무 형태를 수술했다. 주당 근무 시간을 38시간에서 30시간으로 줄이는 대신 근무조를 나눴다. 오전 6시~낮 12시 30분 근무조와 오전 11시 55분~오후 6시 근무조로 나누고 주말에도 4시간씩 교대 근무를 도입했다.

덕분에 센터 운영 시간은 늘어났다. 고객들은 아침 일찍 차를 손본 뒤 출근할 수 있게 됐다. 대기 시간이 줄고 정비 효율이 높아지면서 정비공들에겐 더 많은 돈이 돌아가게 됐다. 방씨는 "이곳 정비공들은 6시간 일하고 8.40시간만큼 돈을 벌게 됐다"며 "8시간 일하고 7.36시간만큼 임금을 받는 보통 정비공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했다.

미국 버지니아 노인 요양원 글레베는 지난해 간호조무사를 대상으로 '30/40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근무 시간을 잘 지키고 교대 근무에 빠지지 않으면 30시간 근무에 40시간치 급여를 주는 인센티브 프로그램이다. 일만 열심히 하면 하루 6시간 근무하고 8시간에 해당하는 급여를 받아갈 수 있는 것. 미국 간호조무사는 급여 수준이 낮아 이직률이 높은 편. 게다가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글레베는 간호조무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새 프로그램을 도입한 이후 이직률이 128%에서 44%로 떨어졌다. 환자가 벨을 눌렀을 때 응답 시간은 57%가 단축됐고 감염 사례는 65%가 줄었다.
근무시간 단축의 목적은 집중 근로

―성공한 이 회사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단순히 복지 차원에서 근로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근로자들이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초점이 일에 있다. 이들은 단순히 근로시간만 줄이지 않았다. 직원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매일매일 스케줄을 재설계했다. 일하는 방식을 아예 새롭게 리디자인한 것이다. 근로시간을 줄이면 자연스럽게 매일 어떻게 일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생산성이 따라 상승하는 것이다. 이들의 변화는 대부분 CEO(최고경영자)로부터 시작됐다. CEO가 먼저 나서야 한다. 이들은 고객과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변화의 취지를 고객에게 명확하게 전달했다. 근무시간을 줄이는 게 고객을 소홀히 대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에 조언하자면.

"우선 불필요한 회의 시간과 횟수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라. 회의는 누구나 싫어하기 때문에 당장 도입하기 쉽다. 없애고 나면 반드시 변화가 생길 것이다. 1시간씩 관성적으로 하던 회의를 줄이고 업무 프로세스를 재정비하라. 그게 생산성을 높이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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