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세탁기가 하프를 켜고 카드에서 멜로디가 나오네

입력 2019.11.08 03:00

[이철민의 Global Prism] <26> 소닉 브랜딩(Sonic Branding)

이철민 선임기자
이철민 선임기자
신용카드 회사인 마스터카드는 지난 2월, 처음으로 자사의 '소닉 브랜드(sonic brand)'를 발표했다. 온·오프라인 매장이든, 디지털 기기에서 음성을 통해 상품을 구매하든, 이 카드로 결제하는 순간 이 카드만의 독특하고 경쾌한 멜로디가 나온다. 보이스 쇼핑·팟캐스팅·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등 음성(voice) 기반 시장이 2022년에만 400억달러나 되는 등 계속 성장하면서, 어디서든 이 결제 사운드가 들리면 바로 마스터카드인 줄 알 수 있게 사운드 아이덴티티 구축에 나선 것이다. 또 빨강과 노랑 두 원이 겹친 기존 비주얼 로고에선 아예 'mastercard'라는 알파벳을 빼고, 두 원 주변에 음파(音波)를 상징하는 물결무늬를 넣었다.

특정 음악 들으면 특정 브랜드 연상

'소닉 브랜딩' '사운드 브랜딩' '오디오 브랜딩' '어쿠스틱(acoustic) 브랜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기업들이 독특한 사운드로 브랜드와 상품의 아이덴티티를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브리티시 항공은 이미 30년 전부터 오페라 라크메(Lakmé)에 나오는 '꽃들의 이중창(Flower Duet)'을 주제곡으로 선택해 소비자와 만나는 모든 공간에서 활용했다. 대한항공이 최근까지 썼던 짐 리브스의 '웰컴 투 마이 월드(Welcome to my world)'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오감(五感) 중에서 가장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는 감각인 청각을 이용한 브랜드 마케팅이었다.

우리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타닥타닥' 소리를 들으면 땔나무가 잘 타고 있는 것을 안다. '재깍재깍' 소리나 '찰칵' 소리에, 직관적으로 시계가 움직이고 카메라 셔터가 작동한다고 해석한다. 우리의 뇌는 소리 정보를 20분의 1초 내에 처리한다. 눈 깜박하는 것의 10분의 1밖에 안 된다. 또 수십년 전에 봤던 만화 책은 기억이 안 나도, 그때 들었던 음악은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은 위력적이다. 그래서 이미 1952년에 나온 미 웨스팅하우스사의 D-5 건조기는 입구를 열면 '하우 드라이 아이 엠(How dry I am)'이라는 미 서부영화 주제곡을 단음으로 들려줬다. 영화에서 '드라이'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뜻이었지만, 이 곡으로 건조 상태를 알린 것이다. 1980년대가 되면, 연기 감지기든, 전자시계든, 커피 머신이든 모든 전자기기가 단조로운 '삑' 소리를 내게 됐다.

소닉 브랜딩
그래픽=김란희
오디오 칩 내장 가능해지며 발전

기업의 소닉 브랜딩 전략은 MP3 퀄리티의 오디오 파일을 담은 칩을 저렴하게 기기에 장착할 수 있게 되면서 크게 도약했다. 다양한 음원(音源)에서 더 다양한 알림음을 제공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알리고 고객의 충성도와 제품 친밀도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표적 예가 애플 컴퓨터를 처음 켤 때 나오는 웅장한 '짜~잔' 사운드다. 원래 애플 컴퓨터의 부팅 사운드는 불안과 걱정의 감정을 초래한다고 해, 중세 종교음악에선 '악마의 음'이라 불리며 사용을 금한 3온음(tritone)이었다. 하지만 1998년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축출된 애플사에서 임원진은 이 음을 고집했다. 결국 이 회사의 사운드 디자이너인 짐 리크스는 밤늦게 몰래 작업해서 지금과 같은 C장조의 웅장한 음을 만들어냈다.

마이크로소프트(MS)사도 영국의 유명한 환경음악(ambient music) 전문가인 브라이언 에노에게 의뢰해, 윈도 95 구동 시 물결치듯이 반향(反響)되는 음이 계속 따라붙는 6초짜리 멜로디를 선보였다. 또 컴퓨터 메인 프레임에 장착돼 있어 소비자에겐 보이지 않지만, 자사의 혁신·문제 해결 능력을 전달하기를 원했던 인텔사의 대표적인 5음표짜리 테마 사운드도 이런 맥락에서 제작됐다. 이 밖에, 모니터에서 파일을 휴지통에 넣으면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나오고, 메일을 보내면 3음표로 '휘익' 소리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어콘(earcon)'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음성 기반 마케팅 급증 전망

하지만 최근 수년간의 소닉 브랜딩 프로젝트는 마케팅의 주축(主軸)이 비주얼에서 오디오로 옮아간다는 전망에 따른 것이다. 특히 아마존·구글·애플 등이 모두 음성에 기반한 스마트 스피커를 내놓으면서, 앞으로 제품 검색에서도 오디오 비중이 높아진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스트리밍 오디오 업체인 판도라의 로런 네이절은 "음성으로 통제하는 각종 기기들이 쏟아지면서, 오디오-퍼스트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모든 기기가 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기업에 사운드 로고는 예전처럼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하나 있으면 좋고'라고 안일하게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전제품과 의료기기 제조사인 필립스는 작년 12월, 자사의 전(全) 제품과 앱을 켤 때에 공통으로 나오는 사운드 로고를 선보였다. 필립스 측은 이 사운드의 음원을 바로 자사의 출발점인 전구(電球)에서 찾았다. 전구 표면을 튕기고, 전구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필라멘트를 첼로의 활로 켜는 소리, 인체의 심박동 소리,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등을 조합했다. 필립스의 브랜드 경험 부문 총책임자인 토마스 마르자노는 "필립스 브랜드를 새롭고 심플한 오디오 자산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병을 따면 가스가 빠지고 유리잔 속의 얼음과 음료가 부딪치면서 거품이 이는 소리로 이어지는 사운드 브랜드로 친숙한 코카콜라는 지난 4월 유럽에서 정반대의 '사운드 로고'를 내놨다. 각종 인쇄매체와 야외에 이 사운드를 잇단 장면으로 표현한 이미지 광고를 내고, 소비자들이 이 음악적 파노라마(soundscape)를 상상해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사운드 마케팅 효과 작다" 반론도

기업의 소닉 브랜딩은 또 제품의 작동 단계별로 다양한 사운드를 제공, 소비자가 다음 동작을 취하거나 뭔가를 기대하게끔 유도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월풀 사의 세탁건조기는 시작 버튼을 누르면 하프 멜로디가 나온다. 마치 이용자를 위해 사람이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겠다는 것이다. 또 건조를 마치면, 깨끗한 옷을 품에 안고 상쾌한 냄새를 맡는 순간의 느낌을 더욱 강화하는 사운드가 나온다. 키친에이드사의 오븐은 시작할 때에는 엄지로 얇은 쇠 바(bar)를 쳐서 소리를 내는 칼림바(kalimba)의 연주곡이, 타이머 작동 시엔 유리잔을 쇠 스푼으로 칠 때의 경쾌한 소리가 난다. 월풀의 디지털 이용자 경험 디자인 파트 책임자인 브랜든 새터넥은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되면, 월풀 브랜드의 다른 제품들도 계속 찾게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이 전망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불분명하다. 제품 하나하나는 의도에 맞게 최선의 사운드를 내더라도, 물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 전화벨 등 온갖 소음이 난무하는 부엌 공간에서 한데 어울리면 불협화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제품의 사운드가 좋다고, A사 제품이 아닌 B사 제품을 선택할지도 의문이다. 또 이미 현대인은 너무나 많은 소음에 노출돼 '알람 피로'에 시달리기도 한다. 2010년 미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간호사들은 너무나 많은 경보음에 노출돼, 환자의 위독 상태를 알리는 치명적인 '삑' 소리까지도 무시하게 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지난 9월 미 월간지 애틀랜틱 몬슬릭은 "소닉 브랜딩 디자이너들은 사운드를 파는 게 직업이지만, 제품 개발자는 '충분히 조용한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소닉 브랜딩 (Sonic Branding)

소닉 브랜딩은 소리나 노래 같은 청각적 요소를 활용해 특정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인식시키는 마케팅 방법이다. 소리라는 의미의 영단어 ‘소닉(sonic)’과 브랜드화 작업이라는 의미의 ‘브랜딩(branding)’이 합쳐졌다. 독특한 사운드로 회사 브랜드와 상품의 정체성을 소비자의 무의식에 심는 게 목적이다. 사운드 브랜딩, 오디오 브랜딩, 어쿠스틱 브랜딩 등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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