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거북선 건조는 '반란'이었다

    • 민계식 前 현대중공업 회장

입력 2019.11.08 03:00

[거북선의 진실] (1) 탄생과정

거북선 원형은 배에 뛰어오르는 왜군 막기 위한 고려 '과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거북선에 대해 깊은 관심과 애착이 있을 것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 거북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자라났으며, 조선공학을 전공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 진학한 후부터 임진왜란 당시 실제로 전투를 한 거북선이나 그 잔해라도 발굴되기를 기다리면서 평생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왔다.

그러나 사료가 워낙 부족하고 또한 단편적이라 그 당시 거북선의 전체적인 면을 파악하기가 어려워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오늘날 회자되는 거북선 이야기나 거북선 모형은 임진왜란 당시 실제로 전투를 한 거북선의 실체와는 많이 다르다. 따라서 세간에 회자되는 과장보다는 현존하는 사료와 필자의 조선공학적 경험에 입각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부족한 부분은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도록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고려 수군, 과선 만들어 여진족 소탕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조직과 전선(戰船) 및 무기 체계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외적의 침탈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퇴치하기 위해 오랜 역사 속에서 정비되고 발전하여 온 결과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일본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하여 개발된 전선이다. 거북선 역시 아무 연고 없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전설적인 전선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해안 방어와 조선 기술의 오랜 전통 속에 출현한 전선이다.

일본의 해적 떼, 이른바 왜구(倭寇)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를 수시로 침범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약탈을 일삼아 왔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말기 왜구 토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가 건국되고 비교적 초기라고 할 수 있는 제8대 현종 때에는 북으로는 거란이 두 번째로 침입하여 개경을 점령하였고, 남으로는 왜구가 창궐하여 국가적인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11세기 초에는 여진족 해적이 울릉도, 대마도 연안까지 출몰했다.

이때 여진족 해적을 소탕한 것은 고려 수군이었다. 고려에서는 제8대 현종 즉위년인 1009년부터 과선(戈船)을 건조하기 시작하여 동해안 진명(함경남도 덕원), 원흥진(정평) 등지에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라는 수군기지를 두고 과선을 배치하여 동북의 여진 해적을 방어하였다. 과선은 배의 좌우에 칼과 창을 빽빽하게 꽂아 적병이 배에 뛰어오르는 것을 막고 선두에는 쇠로 만든 뿔을 달아 적선에 충돌, 파괴하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려사지(권제 36 병 2)에 따르면 고려의 수군은 제8대 현종 즉위년(1009년)부터 제15대 숙종 2년(1097년)까지 약 100년 동안 과선 75척을 동원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다고 한다. 왜구는 전통적으로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 즉 배에 뛰어올라 창칼로 싸움을 하는 접근전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왜구의 전법을 막기 위하여 개발된 고려의 전선이 바로 과선이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 수군은 과선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별맹선(別猛船)이라는 전선을 개발하였는데, 상갑판을 둥글게 만들어 완전히 복개(覆蓋)를 하고 적의 공격에서 군사들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별맹선 안의 군사들은 판옥 내부에 숨어서 적을 공격하기 때문에 적이 공격 방향을 감지할 수 없는 장점이 있기도 했지만, 왜군들이 복개한 덮개 위에 뛰어내릴 수도 있고 갑판 안에서의 시야가 좁아 왜구와의 싸움에서 큰 활약은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용머리와 덮개 위의 칼과 송곳만 없을 뿐이지 형태와 개념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매우 흡사한 듯하다.

이미지 크게보기
(오른쪽)전라좌수영귀선도(全羅左水營龜船圖).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하루 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해안 방어와 조선 기술의 오랜 전통 속에서 태어났다. /게티이미지·이충무공전서 청주판
조선 태종 때 거북선이 해전 참여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탈에 시달려 왔다. 특히 남서해 해안 마을의 피해가 심했다.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은 드디어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정벌을 위한 많은 전선이 건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종 13년(1413년) 2월 5일 임진강에서의 진법훈련 때 거북선(龜船)과 가상 왜선, 즉 가왜선(假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관전(觀戰)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거북선은 정원 80명 정도 대맹선과 60명 정도 중맹선을 기반으로 개발된 전선으로 대마도 정벌에 참여하기는 하였으나 규모도 작고 척수도 적어 큰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특성이나 건조에 대해서 남아 있는 기록은 전혀 없다.

대마도 정벌 후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진작에 수군을 육군에서 분리하여 독립 운영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제한된 소규모 해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면전을 대비한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 편제는 크게 보아 경상 좌도·우도 수군절도사, 전라 좌도·우도 수군절도사, 충청 수군절도사, 경기 수군절도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기 수군절도사는 제외되어 있었으며,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될 때까지는 삼도수군 전체를 총 지휘하는 지휘부는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을 받고 1591년 2월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였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왜의 침략을 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대비하여 전력(戰力)을 증강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우선 전라좌수영 본영과 예하 5관(官, 순천부·낙안군·보성군·광양군·홍양군), 5포(浦, 방답진·여도진·사도진·녹도진·발포진)의 성곽을 보수, 성 둘레에 방어용 연못이나 수렁인 해자(垓字)를 깊이 팠다. 또 병기를 수리·정비하고 전선(戰船)을 새로 만들었다.

고려 과선(戈船)의 축척선(縮尺船). 좌현 전 측면도. / 현대중공업 선박해양연구소
왜적의 접근전 우려했던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왜적이 침입하면 해전은 필연적인데 장차 벌어질 해전에서 왜적의 전통적인 전법을 심히 염려하였다. 전통적으로 왜적은 갈고리를 던져 전선을 끌어당긴 후 뛰어올라 접근전, 즉 칼싸움을 하는 전법을 쓰고 있었으므로 배에 뛰어오른 왜적을 물리친다고 해도 아군 측에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왜적의 접근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선의 개발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전쟁 분위기가 짙어지자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의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진중회의를 대략 열흘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진중회의에서 왜적의 접근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선, 즉 왜군들이 뛰어오르기 어렵고 우리 군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선의 개발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1592년 임진년 1월 1일부터 시작되는데 그 이전에도 일기를 쓰셨을 것이다. 그 이전의 일기나 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진중회의록을 찾을 수 있다면 거북선을 개발하게 된 내용과 거북선의 특성을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Insight

더보기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