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戰에 등장한 이 박스 한국 현대사를 바꾸다

    •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입력 2019.10.11 03:00 | 수정 2019.10.11 21:04

[홍춘욱의 경제사 여행] <3> 컨테이너 혁명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최근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철도 수송이나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부풀고 있다. 그런데 '경제성'만 따져 본다면 육로 수송보다는 해상 수송이 운임이 저렴하다. 최근 해외 해상 운송 전문지에서 읽은 '철도운송과 해상수송 단가 비교'를 보면 미국 LA 롱비치 항구에서 테네시주 멤피스까지 컨테이너를 수송하는 경우, 배를 이용하면 철도보다 2000달러 싸다고 한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남부에 위치한 멤피스까지 배로 가려면 파나마운하를 거쳐 뉴올리언스에 도달한 후 다시 미시시피강을 타고 올라가야 하기에 4800마일(7724㎞) 거리다. 반면 철도를 이용하는 경우 2000마일 정도만 운송하면 되니, 거리 면에서 해상 운송이 2배 이상 더 걸리는 셈이다.

해상 운송이 철도보다 70% 저렴

운송 거리의 차이가 이렇게 큰 데도 해상 운송이 더 저렴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규모의 배를 빌리면 1마일(1.6㎞)당 약 0.80달러(약 958원) 비용이 드는 반면, 철도 수송은 1마일당 2.75달러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서 해상 수송은 이렇게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크 레빈슨이 쓴 역작 '더 박스(The Box)'는 이런 의문을 풀어준다. 이 책은 컨테이너선 도입이 어떤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는지 분석하는데, 그 출발점을 1950년대 말로 본다.

컨테이너
"정부가 지원한 연구조사 결과 컨테이너 해상 운송 비용이 전통적인 방식 운송의 39~74%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해운사 경영자 모임인 프로펠러클럽은 1958년 총회 일정 중 하루를 통째로 비워 컨테이너 관련 논의를 했다. 전통적인 방식의 해상 운송이 머지않아 위기를 맞을 것임을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생산성이 높은 시스템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컨테이너 항을 새로 건설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역 노조 등 기득권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2년 기준으로 뉴욕항 전체 일반 화물 중 컨테이너가 차지하는 비중은 8%에 불과했다. 아마 그대로 내버려뒀다면 컨테이너의 승리는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순식간에 운송업의 흐름을 바꾸었다.

베트남전이 촉진한 컨테이너 혁명

1960년대 초반, 베트남에서 미군은 SOC(사회간접자본) 함정에 부딪혔다. 베트남은 국토의 남북 길이가 1100㎞가 넘었지만 수심이 충분히 깊은 항구는 단 한 곳밖에 없었고, 거의 운영되지 않은 철도선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건 본토의 사령부가 베트남 현실을 잘 모른 채 계속 병력과 물자를 밀어내기 급급했던 데 있다.

출퇴근 시간 도심에서 종종 벌어지는 교통정체가 남베트남의 하나뿐인 항구, 호찌민에서 벌어졌다. 물자는 미국에서 계속 넘어오는데, 전방 부대는 탄약도 제때 보급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군 지휘부는 해결책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열한 토론과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는 '모든 물건을 보낼 때 통일된 포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컨테이너 산업에 일대 '전환점'을 제공했다. 컨테이너는 규격이 통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배에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낙찰 경쟁이 치열했지만, 컨테이너 해운선사인 시랜드 서비스는 t당 고정 요금을 제시함으로써 경쟁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시랜드는 만성적인 적체에 시달리는 호찌민항 대신 캄란만에 대형 컨테이너 항구를 만들어 돌파구를 찾았다. 당시 미군 해양수송지원단 사령관 로슨 래미지는 시랜드 컨테이너선 7척이 기존 벌크선 20척 몫을 했다고 평가했다.

韓·日·대만 수출도 크게 늘어

그러나 컨테이너선 도입은 베트남 참전 미군에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에도 엄청난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시랜드의 최고경영자 맬컴 맥린은 베트남으로 향할 때 컨테이너선에 군수품이 가득 차 있었지만, 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텅 빈 채로 돌아오는 데 불만이 많았다. 이 문제를 곰곰이 고민하던 맥린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일본에 들르면 어떨까?' 1960년대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 마침 일본 정부는 컨테이너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중이었다. … 도쿄·요코하마와 오사카·고베 두 지역에 이미 컨테이너 터미널을 짓고 있었다."

물론 시랜드의 컨테이너선은 일본만 가지 않았다. 대만과 한국 모두 새롭게 형성된 컨테이너 수송망에 편승했다. 글로벌 교역량 증가세를 5년 단위로 끊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베트남을 아우르는 컨테이너 운송망이 생기기 전인 1961~1965년의 연평균 세계 교역량 증가율은 7.8%에 그쳤지만, 컨테이너선의 본격적인 운행이 시작된 1966~1970년에는 연간 성장률이 11.1%로 뛰어올랐고 1971~1975년에는 연 22.6%씩 성장했다.

일각에서 베트남 전쟁 특수로 한국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이야기하는데, 그보다 더 큰 특수는 바로 '동아시아의 컨테이너 항로' 개척이 가져온 해상 운임 비용의 경감이었던 셈이다.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보다 동아시아에서 생산된 물건이 미국에서 더 싸게 팔리는 현상은 컨테이너 없이 출현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당시에는 아마 50년이 지난 후 아시아 공업국에 일자리를 뺏긴 미국 유권자들이 ‘반()자유무역’ 기치를 내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될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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